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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 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保身)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竹槍)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씨
‘참회’는 아름답다. 진솔한 참회는 숭고하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보통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냈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소위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 중에서도 더러는 자신의 친일전력을 참회한 바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최린(崔麟)은 1949년 반민특위 재판 때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주십시오”

그의 진실한 참회 한 마디가 사람들을 울린 것이다. 파인 김동환(金東煥)은 반민족행위를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 현석호(玄錫虎. 일제때 충남 광공부장, 2공화국에서 국방장관 지냄, 88년 작고)는 회고록(『한 삶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한 바 있다.

한편 자신의 친일행적을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참회, 사죄한 인사도 있다.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李恒寧·89·학술원 회원) 씨가 그 주인공이다. 다소 껄끄러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외로 단번에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허락했다. 정릉 자택으로 그를 찾아가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일제 때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모두 친일파…”

― 첫머리의 내용은 언제, 어디서 하신 말씀입니까?
"91년 7월 10일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에서 인삿말로 한 것인데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됐더군요."

― 주최측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달라고 주문을 하던가요?
"아닙니다. 제 스스로 한 얘깁니다. 그 자리에 서니까 50년 전의 일이 생각도 나고 군민들을 직접 뵈니까 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이야기가 저절로 나옵디다."

― 처음 주최측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 없을 수야 없지요. 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 해방 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만 ‘죄의식’ 때문에 (군민들을) 찾아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 ‘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일제 말기 하동·창녕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돼 군민들을 괴롭힌 행위를 말합니다."

1915년 충남 아산 출생인 이씨는 1934년 경성(京城)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격)에 입학해 예과 3년, 본과 3년의 6년 과정을 마치고 40년 졸업했다.

본과 3학년 때인 19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이씨는 대학 졸업 후 1년간 시보(試補)생활을 거쳐 1941년 6월 하동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다. 1년 뒤인 1942년 7월 그는 창녕(昌寧)군수로 전보돼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군행정 책임자로 '영감님'으로 불려
일제하 ‘군수’ 어떤 벼슬자리였나?

일제하 공직자 관등(官等)은 네 종류였다. 최상급은 일황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親任官)으로 조선 내에서는 조선총독·정무총감 두 사람뿐. 그 다음이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순. 주임관 이상을 고등관(高等官)으로 쳤는데 현 사무관(5급)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다.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됐다. 고문(高文) 출신자의 경우 1년간 시보 시절에는 판임관 6급(군청 과장급) 대우를 받다가 군수로 정식 임용되면 주임관 7등급 대우를 받았다. 초임 연봉은 1940년 7월 1일 기준 1,650원(당시 초등학교 교사 초봉은 45원).

군수는 면장 이하 군청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군 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영감(令監)님’으로 불렸고 부인은 ‘마님’ 소리를 들었다. ‘각하(閣下)’라는 용어는 도지사급의 칙임관들에게 붙였다. 이항녕 씨는 “사법과 출신의 법관들은 판결문 작성 등 잡무가 많았으나 군수는 도장찍는 일밖에 없어 편했다”고 회고했다. / 정운현 기자
― 군수는 어떻게 됐습니까?
"당시 대학을 나와도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재학중에 고시(考試)공부를 해서 (군수가)됐습니다."

― 당시 고시공부는 주로 직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 시보생활은 어디서 했습니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했습니다. 국회 부의장을 지낸 윤길중(尹吉重) 씨가 저와는 고시 동기생인데 윤씨는 총독부 농림국에서 시보생활을 했습니다."

― 군수 부임 후 대우는 어땠습니까?
"당시로선 비교적 많은 봉급을 주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인에게만 주던 가봉(加俸)을 조선인들에게도 지급해 봉급 차이도 없어졌습니다."

― 하동군수 시절 식량공출(供出)문제로 고생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공출제도’가 시행됐습니다. 그런데 하동에선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많아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 공출미 할당은 어디서, 누가 결정하였습니까?
"당시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있던 김대우(金大羽) 씨가 군수회의를 소집한 후 각 군수에게 강제로 할당해주었습니다."

― 하동군에 할당된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당시 군 양곡담당 기수(技手)에게 물어보니 재고가 6천 석이라고 하더군요. 그 내용을 김대우 씨에게 보고했더니 ‘기수 말은 못 믿겠다’며 재고량의 무려 5배인 3만 석을 할당하더군요."

― 최종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할당량의 1할 정도인 3천 석 가량을 공출했습니다."

― 당시 다른 군의 사정은 어땠습니까?
"대개 할당량의 절반 정도는 달성했습니다. 그때 제가 있던 하동군이 꼴찌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 ‘죽창’ 이야기는 왜 나온 겁니까?
"당시 군민들이 집안 곳곳에 쌀을 감추어 두니까 군청 직원들이 죽창을 들고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 만한 곳을 쿡쿡 찔러본 것을 두고 한 얘깁니다."

― 죽창으로 사람을 해친 사례도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공출독려반’들이 죽창을 들고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위협은 됐을 겁니다."

― 하동군수에서 1년 만에 창녕군수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승진은 아니지요?
"예, 군세(郡勢)로 보면 오히려 좌천인 셈이지요. 부진한 공출성적이 문제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식량공출이나 노무자징용, 학병권유, 징병제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 독려했습니다. 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 그 같은 일은 당시 군수의 기본적인 직무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그러나 그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자리를 직업으로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

― 항간에는 일제 말기에 군수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 일본인 관리들과의 차별대우는 어땠습니까?
"고급관리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임금 차이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총독부 내에 ‘계림구락부’라는 고등문관시험 출신 고등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저도 시보시절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손가락질해다오”

해방 후 그는 45년 10월까지 창녕군수로 계속 근무하다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한 달 만에 사표를 썼다. 이유는 자신은 일제때 관리를 지낸 몸이라는 것. 이후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부산 동래구 범어사 입구 청룡초등학교였다.

“해방 후 민족 앞에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딸린 아이가 다섯이나 돼 혼자 이 문제를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범어사 하동산(河東山) 스님 밑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

지난 81년 홍익대 총장을 그만둘 때까지 그는 35년간 교육계에만 몸담았다. 그 나름의 ‘근신’이었다.

60년대 초 그는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했다. 또 80년 봄에는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글을 발표, 지식인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

거듭된 ‘참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상습적 양심선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그의 ‘참회’는 앞뒤, 체면 안 가리고 솔직하다. 사실왜곡이나 자신을 미화한 구석도 없다.

“사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 묻는 말에 뭘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 그의 얼굴 가득히 ‘뉘우친 자’의 평화감과 여유가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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