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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길수
서재필(1864-1951) 선생은 요즘으로 말하면 '마마보이'로 불릴 만도 한 사람이다. 외가에서 태어나 외갓집 밥을 7년 넘게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선생은 현재의 행정 구역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가내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천리에는 대구(달성) 서씨인 재필의 외가 성주 이씨가 넉넉하게 살고 있었다.

한국식 나이 계산법은 서구식 나이 계산법보다 약 280여일 앞선다. 한국식은 '응애'하고 태어난 뒤 1년이 된 첫돌을 맞아 2세로 계산한다. 반면 서구식은 엄마 뱃속 기간은 포함하지 않고 태어나고 나서 365일이 지나야 비로소 1세가 된다. 이러한 한국식 나이 계산법에는 '엄마 뱃속 10개월'에 대한 '가치 부여'와 '태교 철학'이 들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태아를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교육의 대상으로 여겼다. 태아를 만드는 남녀 주인공인 아버지와 어머니 포함, 온 대가족 일원, 그리고 산수와 자연조건 등이 한 인간의 탄생과 완성을 위해 엄숙해야 했던 것이다.

'어려서는 외가(어머니), 장가 들어서는 처가(부인), 늙어서는 사돈가(며느리)'를 통해 일평생을 살아낸 옛 분들의 인생 철학, 즉 '남자의 3가 일생관'은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한다'는 '사내 대장부 고집 일생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어느 일생관이 현명하게 사는 남정네의 일생인지 여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인류사 성공한 사내 치고 독불장군은 없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남자 성공 인생을 위해서는 '치마 세 벌을 잘 입어야 한다'는 '인생 진단 도사연 하는 처사들의 발언'도 한번쯤은 새겨들어야 할 법도 하다.

▲ 서재필의 생가이자 외가 마을인 가내 마을 전경. 전형적인 남향 양택지이면서도 산세가 범상치 아니하다.
ⓒ 유길수
송재 서재필 선생은 우리 한민족의 조선왕조(일본인이 폄하한 씨족국가 이씨 왕조가 절대 아닌)가, 소위 강대국의 제국주의 논리에 의해 말대답조차, 힘대꾸조차 하지 못할 상황일 때 태어났다.

제국주의는, 프랑스가 '문명의 사명'을, 독일인이 '문화의 전파'를, 미국인이 '앵글로 색슨의 보호를 받는 축복'을, 일본이 '일본 황도 정신 대륙 팽창'을,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이은 태평양 연안 개발'을 내세운 1880년경의 세계 대유행 논리였다.

태교 교육과 7년여 '사람 주춧돌 교육'을 보성땅에서 받은 서재필은 1882년 과거 급제했다. 다음해에는 일본 동경 육군 호산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갑신개혁을 주도하여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되었다. 이후 서재필은 개화파로 불리게 된다.

그 뒤 송재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의학을 공부해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건립하고, 민족 근대화 운동 등을 펼쳤다. 1947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미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인 1951년 8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이전까지만 해도 서재필은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국민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그동안 가려졌던 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국, 일본, 미국을 넘나들며 일평생을 살다간 서재필과 보성땅은 1991년부터 서재필 기념공원을 계기로 다시 인연을 맺고 있다.

▲ 독립문의 위용. 보성들판과 주암호를 압도한다.
ⓒ 유길수
서재필의 외증조부 이유원은 이조참판을 지낸 조선시대 관리로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전국의 산수와 지리를 답사한 뒤에 '훌륭한 후손'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득 품고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 가내 마을에 정착했다.

이른바 '가내 이씨'로 터잡은 서재필의 외가는 외조부대에서 부인을 둘 두어 후손 늘리기에 노력했다. 첫째 부인 장흥 임씨에게서 1남 5녀, 둘째 부인 경주 김씨 사이에서 1남, 총 2남 5녀를 두게 됐다. 서재필의 모친은 막내딸인 5녀였다.

어머니가 된 막내딸은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당시 부부생활은 집안 어른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던 모양이다. 이른바 명분이 있어야 합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부인은 꿈속의 뽕나무 잎을 즙을 내어 모두 마셨다. 그리고 서재필의 아버지인 동복현감을 모셔 왔다.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한다'는 논리주의자들은 평생을 살아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이들 교육이 외가 이상 없다는 진리를, 엄마 품속이 보약보다 더 약효가 있다는 인륜의 이치를 터득했던 우리 조상들은 실로 오랜 세월 동안 2세들에게 '외가교육'을 시켜왔다.

가내 이씨가는 서재필의 큰 외숙인 이지용(1825-1891)이 덕망가로, 그의 장남 이교문 (1846-1914)이 항일의병장으로, 그의 손자 이용순이 후진 양성가와 지역유지로, '지역 명문가'의 가풍은 오랫동안 보성 고을에서 이어왔다.

▲ 보성강의 하류인 주암호 풍경.
ⓒ 유길수
한국인들에게 본가는 계급 질서요, 외가는 추억과 인정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그 무엇일까. 보성땅은 땅이름부터가 외가집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오는 고장이다. 보물처럼 성벽을 둘러놓고 성스러운 여인들이 기도 생활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도 하다.

보성이 남녘이어서 낮은 곳에 위치할 것이란 착각은 '동고서저 북고남저'의 한반도 일반적인 '지형상식' 탓이다. 사실 보성의 지반은 전라도 땅에서 지리산 운봉골 다음으로 높은 곳이다.

보성을 가기 위해서는 사방에서 재를 넘어야 가능하다. 보성 고을은 북쪽 천봉산(629m)-동쪽 존제산(704m)-남쪽 활성산(470m)-서쪽 벽옥산(479m)으로 둘러싸인 '천연산성' 안에 요람처럼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녹차의 고장인 덕분으로 요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봇재(18번 국도상) 정상을 가본 사람이면 보성의 지형을 이해하기가 편리할 성 싶다. 봇재(보성의 옛이름이라는 설도 있음)의 남쪽은 갑자기 급하향해 율포해수욕장 인근 해면과 어깨를 나란히 해버린다. 그러나 봇재 북쪽은 높낮이가 없는 도로가 장시간 연속된다.

▲ 조각공원 여인상. 풍요의 상징인가
ⓒ 유길수
보성강은 한반도 지형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을 무안하게 할 정도로 북으로 흐른다. 장흥군과 경계산인 제암산(779m) 줄기에서 발원해 장흥 땅에다 잠시 '물젖꼭지'를 물렸다가 갑자기 보성땅 안으로 물방향의 꼭지를 돌려버린다. 장흥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나 물 먹어라'했다가 배부르게 먹지 못한 수량 탓에 약오를 만도 하다.

노동면으로 강머리를 돌린 보성강은 미력·겸백·율어·복내·문덕면의 보성땅 기름진 토지를 충분히 적시면서 보성땅이란 '토지아들'에게 영양분을 제공한다. 지금의 보성강물은 화순의 동복·사평천 등과 합류한 주암댐에서 광주광역시민을 비롯한 수백만 대중들에게 상수도로 제공된다.

보성강은 보성 지방을 비롯한 남도의 젖줄이다. 젖줄은 생산성을 가진 여성의 상징이며 생명의 터전이다. 서재필은 보성강물을 먹고 자랐다. 그래서일까 서재필의 정신에는 보성강물처럼 모성애가 가득하기만 하다.

"한국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다. 그들은 영리하고 건강하며 생산적이다. 수세기 동안 시련과 고난에 시달려 왔지만 여전히 고유한 민족문화를 갖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더 높고 고귀한 지위를 획득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한국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열망을 결집하는 것이며, 정치적·경제적·개인적 자유를 위한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나라들이 한국 민족의 장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1939년 12월 7일, 서재필).

▲ 서재필 선생 동상. 선생은 사망후 5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 유길수
서재필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외가인 가내 이씨들의 고통은 참담할 정도였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씨들의 의로움은 어머니의 모성 본능처럼 서재필의 정신을 끝까지 뒷받침했다. 이용순은 일본 압제 당시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보성군청과 전남도청은 서재필의 정신과 가내 이씨들의 의기를 기른다는 목적으로 서재필 공원 기념화 사업을 12년 전부터 추진하고 있다.

기념관측에 따르면 2004년 3월 초 현재 전남도청과 보성군청 그리고 기념사업회 등 사이에서 '완공 후 관리주체선정' 등을 놓고 의견이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이고, 전남도의회 등의 반대 표결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조각공원 설경
ⓒ 유길수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은 인구가 집중 거주하는 한강변에 몰려 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심지어 독립 유공자들도 수도권 등에 밀집돼 있는 형편이다.

그에 대한 입증은 보성군 문덕면민 현황을 보면 더욱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문덕면민은 약 9백명 선으로 웬만한 도시의 아파트 한 단지 인구수에도 미달된다. 그것도 노령인구가 대부분이다.

이런 문덕면에 들어선 1만 7천 평 넓이로 들어선 서재필독립기념관. 도시민들이 찾아주지 아니한다면 모래 위에다 성을 지은 격이지 아니하겠는가.

보성군에 산다는 한 여인은 "차밭과 서편제의 관광지인 보성, 승주의 송광사 낙안읍성, 화순의 운주사와 유마사 등의 '관광 삼각주' 안에 서재필기념관이 있다"고 말한다.

여인은 "주암호 드라이브 코스는 둘이 구경하다 잘못하면 물에 빠질 정도로 절경"이라면서 "서재필기념관에서 '자립 태교 교육'을 받으면 도시 아이들이 건강할 것이니 내외간에만 오지 말고 가족이 다 함께 구경오라"고 특별 주문했다.

덧붙이는 글 | 서재필 기념관 가는 길은 세 방향에서 가능하다.

제1방향은 광주광역시-화순읍-구암 삼거리-사평-주암호로 연결된다. 4차선 도로가 완공되면 광주에서 약 30분여 거리로 연결될 전망이다.

제2방향은 남해 고속 도로에서 주암IC를 나와 송광사-광천-고인돌 공원-전망 좋은 곳을 통해 좌회전하지 않고 계속 진행하면 된다.

제3방향은 보성읍에서 18번 국도를 이용해 북상하면 된다. 이 길은 보성강과 나란히 북행하는 길이다. 서재필 생가는 기념관 안길로 우회전 용암호텔을 통과하면 된다. 약 5분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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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를 시작으로 30여년간 언론계에 종사. 5세부터 한문 서당 수학. 족보 연구와 역사 연구로 1994년 소설가 등단 남도 지역 고을사, 인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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