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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최근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 신직은 신사 내의 각종 제사를 주관하고 사무(社務)를 담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진은 조선신궁의 한 행사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신직들의 모습.

흔히 '친일파'라고 하면 한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나 일제강점기에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일제의 침략정책에 협조한 관료·지식인이나 민족진영에서 변절한 인사들을 보태기도 한다.

그러나 35년간에 걸친 일제 통치기간 동안에는 실로 다양한 형태의 친일파들이 준동했다. 배운 자는 지식을 팔아 출세길에 나섰고, 부자는 돈을 바쳐 재산을 보전하였다. 그도 저도 없는 자들은 매신(賣身)을 통해 일제의 식민정책에 부화뇌동했다.

그런 자 중에서 더러는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조상까지도 아예 일본인 조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번에 최초로 발굴, 소개하는 친일파 이산연이 바로 그런 부류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인 행세는 물론 조상까지 일본인 조상으로

'신직'이란 어떤 자리며, 뭘 했나

'신직(神職)'이란 글자 그대로 '신성스런 직업' 또는 '신을 모시는 직업'이란 뜻.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신사(神社)에 근무하면서 제사와 기도 등 신사(神事)를 집행하는 사람을 통칭한 용어다. 다른 용어로는 신주(神主), 신관(神官), 사사(社司), 궁사(宮司) 등으로도 불렸다.

일제 당시 각 지역의 신사는 도(道) 지방과에서 관리하였는데 출사(出仕)는 고원(雇員)에 해당하는 낮은 직급이었으나 신직부터는 정식 관리로 임명돼 판임관 대우를 받았다. 신직은 신사에서 행하는 각종 제사(祭祀)를 주관하였는데, 일제당국으로부터 물자배급과 신분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신직 가운데 궁사(宮司)는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이나 남산 중턱(현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었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같은 대형 신사에 근무한 신직의 장(長)으로, 일황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급이었다.
이산연(李山衍. 1917∼?). 친일파로선 생소한 이름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 시절 잠시 그의 이름이 거론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친일파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없다. 이유는 그가 특수한 분야에서 활동한 '숨은' 친일파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하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신직(神職)을 지낸 사람이다. 신직이란 일본인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神社)에 근무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사찰로 치면 스님에 해당하는, 일종의 종교인인 셈이다.

반민특위가 한창 활동을 벌이고 있던 1949년 5월 22일 오전 10시40분. 반민특위 충청북도 조사부 소속 김상철(金相喆) 조사관은 청주부(현 청주시) 석교동 50번지 자택에서 이산연을 체포, 당일로 청주형무소에 구속시켰다. 죄명은 반민법 제4조 11항 위반(종교·사회·문화·경제 부문의 친일행위자).

6월 1일 반민특위 충북 조사부에서 첫 신문이 시작된 이래 두 차례의 구속기간 연장 끝에 7월 8일 그는 최종 불기소로 풀려났다. 죄상은 인정되나 '악질성'은 없다는 것이 특별검찰부의 석방이유였다.

이로써 그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은 끝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은 아직 그에 대한 심판을 내린 적이 없다. 반민특위와 특별검찰부가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밝혀낸 사실을 토대로 그의 죄상을 살펴보자.

특수분야에서 활동한 '숨은 친일파'

이산연은 1917년 서울 사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원우(李洹雨. 70년 사망)는 법전(法專) 졸업후 경부(警部)로 특채돼 충북 경찰부를 비롯해 청주, 충주 등지의 경찰서에서 20여년간 사법주임을 역임한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그가 신직이 된 배경에는 이같은 집안의 친일적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주위 사람들은 증언한 바 있다.

1937년 청주고보를 졸업한 이산연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몇 군데 시험을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집에서 놀고 있던 그는 당시 신문에서 조선황전강습소(朝鮮皇典講習所. 신직 양성기관)에서 강습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서울로 올라가 조선신궁(朝鮮神宮) 부설, 조선황전강습소에 지원하였다.

당시 조선황전강습소는 관할 도지사의 추천이 있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부친을 통해 당시 충북 도지사 김동훈(金東勳)의 소개장을 가지고 이듬해 5월 입소하였다. 입소생은 그를 포함해 조선인이 3명, 일본인 4명 등 총 7명이었다.

입소해서는 일본 역사를 비롯해 제관(祭官)으로서의 기본교육에 해당하는 축문(祝文), 제차(祭次. 제사 관련 절차) 등을 교육받고 그 이듬해(1939년) 3월 졸업하였다. 당장 자리가 나지 않아 잠시 청주군 사회계 고원(雇員)으로 있다가 2개월 후 그는 청주신사(淸州神社) 출사(出仕)로 첫 발령을 받았다. 한국인인 그가 일본인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의 제관(祭官)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산연이 신직을 자원한 동기중의 하나는 당시 일제가 신직에 한해 ▲봉급 외 6할 가봉(加俸) 지급 ▲일본인과 동등대우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당시 일제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꺼리는 신직에 조선인을 채용하기 위해 이 같은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것으로 보인다.

▲ 반민특위가 이산연을 반민법 위반죄로 구속수감한 후 특별검찰부에 기소를 요청하면서 제출한 '사건송치서' 사본

조선인 최초 신직으로 해방때까지 5년간 일본신 모셔

이 무렵 일제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대륙침략을 본격 추진하면서 조선 전역에서 황민화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제는 황민화 정책의 슬로건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동근(同祖同根) 등을 내걸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뿌리라고 선전하며 조선인의 일본인화(化)를 강요했다.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 내선통혼(內鮮通婚), 신사참배 등이 이때 추진된 황민화 정책의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이 가운데 신사참배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인의 혼을 빼려는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산연은 바로 이 대열의 선봉에서 활동한 친일파였다.

▲ 이산연이 신직으로 근무한 청주신사의 1940년대 당시 모습
청주신사 출사로 근무한지 2년 만에 조선인 최초로 정식 신직으로 승진한 이산연은 해방 때까지 5년간 일본신(神)을 모시는 일에 종사했다. 매일 평균 1∼2회씩 신사내의 대소 제사를 집행하였으며 틈틈이 일본 가정을 순회하며 집안의 제사를 지내주었다.

또 전쟁기간 중에는 황군(皇軍.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주관하였으며, 충북지역내 각 군(郡)의 신사 낙성식 때마다 진좌제(鎭座祭)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신사거출비를 징수하면서 "신사거출비는 다른 세금과 달라서 제일 먼저 내지 않으면 비(非)국민이 될 것"이라며 체납자들을 혹독하게 다뤄 조선인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1943년 겨울 그는 조선총독부 주최 소위 '미소기연성(鍊成) 대회'에 신직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미소기'란 겨울에 얼음을 깨고 찬물에 들어가 축문(祝文)을 외면 신(神)과 통할 수 있다는 일본의 전통적인 신도식(神道式) 수양법이다.

물자배급 등 도지사급 특별대우 받으며 일본인 행세

이같은 행사는 종교차원을 넘어 일반인들의 생활속으로까지 파고들어 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촉진시켰다. 친일파 가운데 더러는 '미소기'를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일본인화를 공공연히 과시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주위의 조선인들과는 교류를 끊은 채 언어·의복은 물론 모든 생활양식을 일본식화하고는 가족에게도 이를 강요했다. 주위에서는 그를 두고 '일본인 이상의 조선인'이라는 말이 자자할 정도로 그는 완전한 '황국신민'으로 지내고 있었다.

일제 당국은 황민화 정책의 최일선에서 혼신을 다한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통해 보상해주었다. 그는 일제 말기 일본인과 동등한 '앵급(櫻級)'의 배급을 받으며 조선인이라는 호칭을 면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물자배급의 등급을 앵(櫻)·송(松)·죽(竹)·매(梅)의 4단계로 나눠놓고 이중 일본인에게는 앵급을, 조선인은 사회적 지위와 생활정도에 따라 송·죽·매 3단계로 차등 지급하였다. 조선인으로서 앵급 배급을 받은 자는 도지사급에 드는 몇 명에 불과했다. 당시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대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일제의 협박이나 고문에 못이겨 친일로 전향한 인사들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친일가문에서 태어나 일제통치의 특혜를 온몸으로 누린 사람이 바로 그다. 특별검찰부는 그가 악질적인 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키 어렵다며 '면죄부'를 주었지만 '역사의 법정'은 그의 죄상을 기억하고 있다.

일제하 조선인으로 태어나 항일운동은 커녕 일본조상을 제 조상인 양 떠받들면서 일신의 안위를 영위한 그는 해방 후 청주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며 생계를 꾸리다가 1950년대 중반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호적에 나와 있다. 1968년 청주지법은 그에 대해 최종 실종선고를 내렸다. 비참한 말로는 '역사의 업보'인가?

[덧붙이는 글] 어제(3월 2일) 국회에서 곡절끝에 친일진상규명법이 통과됐다. 이 법은 반민특위가 좌절된 이후 55년만에 다시 국가차원에서 친일청산에 나설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나름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여야 협상을 통해 법안이 수정되면서 조사대상자를 대폭 촉소, 제한함에 따라 '누더기 법'이 됐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실지로 위 이산연의 경우도 그렇다. 반민특위는 이산연을 반민법 제4조 11항 위반(종교·사회·문화·경제 부문의 친일행위자)으로 구속, 조사를 벌였으나 이번에 통과된 특별법에서는 아예 조사대상자도 아니다. 사법적 처벌은 물론 조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안타까운 노릇이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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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