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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랫동안 고민하며 참고 견디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세상 사람들이 내 심정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글로써 세상에 남긴다.

나는 1936년 4월 20일(음)에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내 나이 13세 때인 1949년 12월 24일에 청천벽력 같은 대참상을 당했다.

이날 정오 경에 느닷없이 국군들이 우리 마을에 들이닥쳐 다짜고짜로 마을 집들 전체(24호)에 불을 지르고 마을 주민 전체를 마을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놓고 '이 빨갱이 새끼들' 운운하면서 산사람들을 타켓 삼아서 마치 사격연습을 하듯이 마구 총탄을 난사하여 마을 주민들 대부분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불과 한두 시간 동안에 마을 전체가 불바다를 이루면서 잿더미로 변했고 착하디 착한 마을 주민 86명이 잔학한 국군들이 난사한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참살자들 중에는 돌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유아 5명을 포함해서 12세 미만의 어린이가 26명이었으며, 65세 이상의 노인이 10명이었고, 여자가 절반인 42명이었다. 그리고 전 가족이 몰상 당한 집도 6세대나 되었다.

▲ 본인이 생존한 2차 학살 현장에서 방문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채의진
학살 동기는 너무도 황당했다. 우리 마을 뒤쪽에 위치한 해발 813m의 주월산 정산 부근에 수명의 빨치산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국군들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주월산을 수색하러 가던 중 도중에 위치한 우리 마을(석달동)에 잠시 들렸다.

그때 마을 주민들이 국군들을 환영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국군이 왔는데도 반겨주지 않는 석달마을은 빨갱이 동네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당시 주월산에 수명의 빨치산이 숨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이웃 동네에 두세 명이 빨치산에 가담하고 있다는 소문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이웃 동네의 빨치산 가담자들과 내통한 혐의가 있었던 3명이 1년 전에 경찰에 잡혀 가서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마을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감시도 철저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 석달마을 학살사건에 대하여 보고된 당시의 주한미군사고문단 정보일지와 미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일지에도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군들은 정확히 확인도 하지 않고 단순히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이 아니 티끌만한 잘못도 없이 두메산골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는 것을 천업으로 삼고 오직 관련에만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가던 순박한 민초들을 자신들에게 대접이 소홀했다는 극히 단순한 그 이유 하나를 트집잡아서 마을 주민 모두를 남녀노유 가림없이 모두 빨갱이로 몰아서 그렇게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는 전시도 아닌 평시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이었으니 분명히 전시가 아닌 평시였다. 전시에도 그런 끔찍한 만행이 있어서는 안될텐데 전시도 아닌 평시에 더구나 적군도 아닌 아군이 소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우리 국군이 티끌만한 잘못도 없는 자국의 국민들을 그처럼 잔학하게 학살을 자행했다.

국군에 의한 석달마을 주민 대학살이 자행된 지 3주 후(1950. 1. 17)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학살 현지를 방문하여 생존자들을 접견하고 위로금까지 전달하고 다녀갔다. 그리고 그 후 정부는 석달마을 주민들 학살사건 책임을 물어 문경 경찰서장과 산북지서장을 해임하고 학살군 상급부대 지휘관들을 직위해제와 전보 정도로 문책을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모든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었을 뿐만 아니라 피학살자들의 호적부에는 '석달마을 주민들 집단학살'을 공비들의 소행이었다고 아예 왜곡해서 기록하는 어처구니 없는 범죄를 또 저질렀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54년이 지나도록 역대 정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엄청난 범죄 행위를 은폐해왔으며 지금도 은폐하고 있다.

▲ 2003년 12월 24일 54주기 추모위령제에서
ⓒ 채의진
나는 그때 13세의 어린 나이에 잔학한 국군들에게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 마을 주민들 86명이 학살당하는 아비규환의 그 학살 현장에서 불구이신 82세의 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머니, 형님, 형수, 누나, 숙모, 사촌누나, 사촌여동생, 사촌남동생 등 9명의 가족이 원통하게 참살 당하는 그 와중에서 형님과 사촌동생의 시신 밑에 깔려서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그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이 병사를 하거나 불의의 사고사를 당하거나 심지어 고령으로 천수를 다하고 죽어도 그 애통함을 평생 동안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인데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매 등 9명의 가족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국군들에게 한꺼번에 학살당한 내 심정과 내 몰골이 과연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후 국가로부터 피해 배상은커녕 진상규명이나 호적정정이나 위령사업 등 해원조치도 받지 못한 채 54년간을 목숨을 부지해온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괴로웠다.

나는 식사를 하다가도 독서를 하다가도 누구와 대화를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심지어 학교 교실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그때의 그 참상이 떠오르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은 아픔과 슬픔과 분노와 증오에 몸부림쳐야 했고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그 엄청난 아픔과 슬픔과 분노와 증오를 한숨과 눈물로 삭이며 그래도 그때 그 참혹했던 아비규환의 학살현장에서 생존한 한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분들의 통한을 꼭 풀어드리겠다는 그 일념으로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해왔다. 하지만 이날 이때까지 도대체 이게 뭐냐?

돌이켜보면 학살의 원흉인 이승만 독재정권시기와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때는 그들의 억압에 짓눌려 입도 뻥끗 못한 채 죽은 듯 움추렸지만 악독했던 군사독재정권이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고 이 땅에 소위 민주주의라는 정권이 출범하자 이제 때가 왔구나 하는 큰 기대 속에 드디어 입을 열고 우리의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고 정부와 국회와 세상을 향해 소리 높이 외치며 생업도 팽개친 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런 지 어언 14년 그동안 두 차례나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립문서보관소와 맥아더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경석달마을사건에 관한 비밀문건(1980년 해제) 7건을 입수하여 우리 석달마을사건(soktal massacre)은 육군 제3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예하 그 소대와 3소대 장병들 69명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드디어 밝혀내었다. 이들 문건(미극동군사령부 정보일지, 주한미군사고문단 정보일지)에는 학살부대, 참살내용, 정부의 사후처리 등이 아주 정확하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증빙문서를 증거로 탄원서에 첨부하여 청와대와 국회와 헌법재판소와 국방부 등에 제출하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동안 문민정부라고 자처했던 김영삼 정권은 경남의 거창산청함양사건에 한해서만, 그리고 국민의 정부라고 자처했던 김대중 정권은 제주4.3사건에 한해서만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그쳤다.

따지고 보면 이들 네 지역사건보다 훨씬 상괴하는 우리 석달마을 사건을 비롯하여 함평사건과 여순사건 등 수많은 유사한 사건들을 제외하고 거창 산청 함양과 제주4.3에 한해서만 특별법을 제정한 김영삼 김대중 양정권은 민주주의의 원칙인 평등과 형평의 원칙조차 무시한 엉터리 정권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이런 부조리한 작태를 지켜보다 못한 몇몇 양심 있는 학자들과 법조인 종교인 언론인 사회단체 활동가들과 유족들이 합심하여 2000년 9월 7일 드디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때 나도 합류하여 범국민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범국민위원회 활동은 아주 활발했다. 2001년 9월 6일에는 현역 국회의원 48명의 서명을 받아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안'도 마련하여 국회에 제출했다.

덕분에 2003년 12월 16일에 국회 과거사청산특위에서 '6.25전쟁휴전이전민간인희생자진상규명및민간인희생자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안'으로 수정되어 특위를 통과하고 금년 2월 2일 드디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까지 통과했다. 50여년 동안 쌓이고 쌓인 한이 이제는 어느 정도 풀리는구나 싶어 우리는 완전히 축제분위기였다.

하지만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한나라당의 방해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아서 법률안 통과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아니 어떻게 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생긴단 말인가.

▲ 2002년 11월 7일 국회 앞에서 통합특별법 촉구 결의대회
ⓒ 학살규명범국민위
국회 제1당이라고 하는 한나라당이여, 그리고 우리 법안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수수방관하거나 반대하는 의원들이여, 그대들은 50년 넘게 오직 해원의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슬픔과 분노를 참고 또 참으며 견디어 온 우리 유족들의 한을 정말 외면할 것인가.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학살당하고도 그 통한을 풀지 못해 아직도 구천을 떠돌며 해원을 울부짖는 수십만 원혼들의 절규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의 보복이 두렵지 않은가. 국회 제1당인 한나라당이여, 국회의원들이여, 제발 이번 임시국회 회기 내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까지 통과한 '6.25전쟁휴전이전민간인희생자진상규명 및 민간인희생자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안'을 꼭 통과시켜주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내 그대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죽음으로 그대들에게 항의하리라.

그때 13세이던 어린 내가 지금은 69세의 노인이 되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국군들에게 학살당한 9명의 우리 가족들과 우리 친척들 우리 이웃들의 그 억울한 한을 꼭 풀어드리고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여생이나마 좋은 일도 하면서 마음 좀 편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에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나는 살고 싶다. 정말로 더 살고 싶다. 살아서 우리 원혼들이 해원하는 것을 꼭 보고 싶다. 세상사람들이여, 억울한 내 삶과 내 염원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문경석달마을양민집단학살피학살자유족회
대표 채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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