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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숙주 생가터를 알리는 금안동 마을 입구 돌안내판
ⓒ 유길수
‘책읽은 바보가 가장 큰 바보’라면서 우리의 지혜로운 선조들은 책 속 잘못됨을 심각하게 경계했다. 혹여라도 책 속의 진리를 한 치의 의심없이 받아들여 편견의 세상을 펼칠까 두려워서였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그 책이 다시 사람을 만든다’지만, 잘못 기술된 책의 내용 한 줄은 ‘사람 하나 병신 만들기’ 도구로 쓰일 경우 흉기보다 더 날카롭기 예사다. 상처의 후유증 또한 편견 가진 사람이나 편견의 대상인이나, 둘 다 죽고 나서도 치유되지 않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 그는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어학자, 외교가, 저술가, 번역가, 경륜가, 군사전문가, 명재상 등으로 공(功)이 다반사임에도 불구하고,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임금에 오른 ‘세조의 반정공신’이란 과(過)의 기록 한줄 때문에 지조와 의리의 세계에서 묻혀진 이름 석자였다. 묻혀지면서도 재상의 신분이 식물(숙주나물)로 폄하된 치욕의 여죄가 추가돼야 했다.

▲ 목사골 나주의 현주소, 화려했던 옛날도 그 많던 나주인들도 간데 없다.
ⓒ 유길수
사육신 생육신 용어는 중종 이후 사림파가 만들었다. 오랜 세월 뒤의 소설가 이광수나 박종화의 작품들은 한반도에서 지조와 의리가 강조되던 시대에 씌여졌다. 섬나라인 일본국에게 힘이 밀려 ‘독립정신’이 시대정신이고,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반공의 국가관’이 의심없는 진리일 때, 두 작가는 왕성하게 작품 활동했다.

‘단종애사’, ‘금삼의 피’, ‘목메이는 여자’ 등의 작품 속에는 소설은 ‘사관의 기록이 아니고 픽션’이란 허구성이 녹아 있었다. 픽션은 신숙주가 이미 죽은 부인 윤씨 앞에서 변절을 사죄하는 내용으로 기록됐다. 그 당시부터 ‘신숙주는 배신자’, ‘사육신과 생육신은 의리짱’이란 역사관의 한축은 더 더욱 힘을 받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란 테두리 안에서 사람들의 시대관은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식으로 변해가는 모양이다. 해방 이후 때려잡자 공산당은 가난 몰아내기로, 보릿고개 넘기기는 수출 제일주의로, 먹고 살만하니까 민주화 운동으로, 발언의 자유로움은 개인 느낌의 자유로움이라는 문화만족시대로 이어지면서 ‘시대기차’는 브레이크 없이 달리고 있다.

▲ 한글을 창제한 신숙주의 생가에 있는 농가, 신숙주는 이집 뒤란 과수원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 유길수
항일과 반공 그리고 가난시대 변절자였던 신숙주는 문화의 시대 속에서 재조명과 부활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시나리오 작가인 신봉승은 ‘조선왕조 500년’이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신숙주를 지난 세월 편견의 역사 속에서 건져 올리는 데 일조했다.

문화의 시대를 본관이 고령인 신씨들도 예외없이 살아내는 모양이다. 지조와 의리의 시대사속에서 목소리가 작았던 그들은 “보한재(保閑齋) 한애(할아버지)의 고향이 전라도 나주땅 금안동이고 문자없는 민족은 멸종하는 법인데 한글을 창제하신 보한재 한애가 민족의 영웅”이라면서 10여년 전부터 애족정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신씨들은 “조선시대 전라도 3대 명촌인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일명 오룡동)에서 출생 ‘훈민정음’ 창제의 주도적 역할을 하신 문충공(신숙주)의 생가를 복원하여 공원으로 가꾸고 한글창제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함”이란 집안 의견을 나주시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에 전달하고 있기도 하다.

▲ 신씨 집안에서 애족정신을 발휘해 지방 신문등에 선양사업을 했던 기록이 벽에 걸려있다
ⓒ 유길수
기 있으면 반드시 형이 있고 형 있으면 반드시 소리가 있네
음과 양이 서로 닿이고 부딪쳐 소리가 따로 생기는 구나
서와 북은 음이 중하여 소리가 목과 혀에서 나고
동과 남은 양의 위치라서 소리가 입술과 이에서 나온다네
소리는 본래 곳에 따라 옮기나니 말로서 중국과 오랑캐를 분간할 나위 없네
우리 왕이 언어의 의의를 중히 여겨 예악 문물을 열었어라(보한재 10권에서)


신숙주가 지은 ‘송의주역학훈도리(送義州譯學訓導李)’라는 시의 내용 일부이다. 그가 조선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점은 우리말 표기문자의 해설, 한국 한자음의 정리, 중국 한자음의 정리 등을 통해, ‘한글 창제’에 성삼문 등과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의 한글창제에 대한 노력의 일면은 중국의 한림학사 황찬이 요동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머나먼 길 요동으로 13차례나 말을 달려갔다는 의욕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일설에는 노력인의 엉덩이가 말안장에 녹아내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영산강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다는 용머리 모습의 금성산 전경
ⓒ 유길수
반만년 정착민족이자 농경민인 우리 민족에게 있어 말 그대로 이름난 고을인 명촌에서 살기 위해서는 기름진 들판과 풍부한 수량 그리고 따스한 날씨가 3대 필수조건이었을 법하다. 나주의 금안동은 같은 도내의 영암 구림땅과 전북의 태인골과 함께 ‘호남 3대 명촌’으로 오랜 세월 그 위상이 튼실했던 평야지대였다.

풍수지리로 세상사 이치를 논하길 즐기는 자들은 금안동의 뒷산인 금성산의 형상이 용머리상인데, 그 용이 영산강 최대 수량이 흐르는 나주땅에다 머리를 처박고 물을 마시는 모습을 금안동 12개 마을에서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용은 상상의 동물인지 실제 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풍요와 영광의 상징이었음은 분명하다.

금안동과 신숙주의 인연은 아버지대에서 태생된다. 신숙주의 외가 집안인 나주 정씨중에서 정가신이란 ‘삼별초 토벌 장수’가 정착했다는 기록이 ‘확인 가능한 문자기록’의 최초이기 때문이다. 정씨들의 씨족사는 설재서원 등에 남아있다.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은 나주 정씨의 사위가 되어 금안동에서 살면서 3남 숙주 포함 5형제를 낳았다. 신숙주는 최소한 이곳에서 외갓집밥을 먹은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확실해 보인다. 물론 그의 사람됨됨에도 금성산의 용의 정기가 서려있음이 분명하기까지 하다.

▲ 소경, 즉 작은 서울로까지 번성했던 옛고을 나주의 인구 현황, 국회의원 지역구 유지조차 힘들 정도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 유길수
신씨들을 비롯한 나주 지역에서 ‘5룡동’이라 명성이 자자했던 옥토 금안동에도 산업화 바람과 ‘엑소더스’의 태풍강타는 걷잡을 수 없었다. 산업화 바람은 해방 이후 ‘서울로 수도권으로’ 중점적으로 몰려간 나주인들의 ‘직장찾기 이별가’로 대변된다. 농사 지어봐야 먹고 살기 '팍팍했던‘ 탓이다.

엑소더스의 애환사는 소위 ‘라도시계’만 차면 대한민국 안에서 출세가 불가능했던 ‘인재등용 차별의 개발독재시대’속에도 내포돼 있다. 호남 인재 큰 창고였던 목사골 나주인들은 해방 이후 신숙주 만한 재상 벼슬아치 자리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농사지역이어서 그런지 군사독재 시절에는 ‘날씨 장관’인 농사 농(農)자 들어가는 장관 자리 겨우 턱걸이 했을까 말까 했을 정도였다.

한때 30만명을 바라봤던 나주에 살았던 나주인들은 호남선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남행하지 않고 주로 서울로 북행했다. 출향인의 직장이, 자식을 출세시킬 학교가 서울에 집중돼 있어서였다. 나주시는 2004년 2월 현재 인구 10만명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될 형편이다. 목사골 위상이 단일 국회의원 선거구조차 지탱이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해 인접한 화순과 ‘지역구 통합’이 거론될 정도이다.

▲ 신숙주의 아버지와 외가집의 글공부 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설재서원의 큰 나무,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다.
ⓒ 유길수
한글학회에서는 30여년 전인 1971년도 한글의 날에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한 신숙주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다. 충북 청원군에서는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 등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해 신숙주와의 핏줄 인연을 강조했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 선생을 선정했다. 나주에서 태어나 충북으로 옮겨 살고 경기도에 묻힌 ‘신숙주의 생과 삶 그리고 사의 3구분 일생'이 충북과 경기에서는 나름대로 칭송되고 ’생가인 나주‘에서만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다는데 대해 반대 의견을 개진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고령 신씨인 나주의 한 인사는 “지역 신문 등을 통한 ‘조상 재조명 작업’이 마치 지역 집안의 선양사업으로만 비쳐질까 조바심이 난다”면서 “나주시청과 전남도청 나아가 정부차원의 한글공원화 사업을 고대한다”고 강조한다.

나주시청 관계자 또한 “이제 문화라는 사업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해도 불편함이 없을 만한 인터넷과 고속철 여행시대가 앞날”이라고 전제한 뒤 “공원 매입 비용 저렴 등의 차원에서 볼 때 신숙주 한글 공원은 나주가 적지”라고 덧붙인다.

옛조상들이 2품 벼슬 이상을 한 사람들의 신도비를 무덤에까지 세웠던 이유가 이리저리 생각키는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 신숙주 생가 터 여행길이었다. 조상들의 문화지수가 풍요시대 현대인들보다 낮을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요상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금안동 찾아가는 길은 나주시 동신대학교를 먼저 찾으면 편리하다.
동신대학교에서 금성산을 왼쪽에 둔 채 승용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도로가에 설재서원과 신숙주 생가를 알리는 돌표지판 등이 설치돼 있다.

동신대학교는 광주광역시에서 목포로 가는 4차선 도로를 달리다가 나주경찰서를 지나 4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금성산 동남쪽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송정리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벨로드롬 경기장에서 우회전하면 동신대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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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신문 코리아 헤럴드를 시작으로 30여년간 언론계에 종사. 5세부터 한문 서당 수학. 족보 연구와 역사 연구로 1994년 소설가 등단 남도 지역 고을사, 인물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