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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도 보길도에 눈이 내렸습니다. 오늘은 눈이 왔어도 바람이 잠잠하니 그다지 춥지 않군요. 햇볕이 나면 곧 녹아 없어져버릴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부황리 온 들판이 환합니다. 모처럼 눈 쌓인 부황리 들판을 걷습니다. 염소들은 눈 속에 파묻힌 풀들을 찾아 부지런
히 입을 놀립니다. 염소들도 그다지 추워 보이지 않습니다.

눈 길 뚫고 들길 가도
어지러이 가지 못하네.
오늘 아침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될 것이니.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爲後人程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걸을 때면 이 시를 한번쯤은 떠올리거나 읊조리며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했을 것입니다. 나 또한 정초에 눈길을 가며 시를 떠올리니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즐겨 붓글씨로 썼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즐겨 인용하고 애송하면서 유명해진 이 시는 흔히 서산대사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실상 서산대사가 지은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시인 이양연의 시라고 합니다.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은 정조, 순조 연간의 문신으로 본관이 전주이고 광평대군의 후손이기도 하지요.

나 또한 이 시를 오랫동안 서산대사의 시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 이는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였습니다.

"옛날 김대중 대통령이 즐겨 인용하던 한시 중에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밟고 들길 걸어가노니,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못하네. 오늘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나니)란 시가 있다. 이 시도 김구 선생께서 붓글씨로 쓴 것이 있어, 김구 선생의 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서산대사의 시로 둔갑되어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서 조선 후기 시인 이양연의 시임이 밝혀졌다."


이 시가 서산대사의 시가 아니라는 논란은 진작부터 있어왔습니다. 서산대사가 지은 시라고 구전되어 오지만 정작 서산대사의 문집인《淸虛堂集》에는 이 시가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아직까지도 서산대사의 시가 확실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어느 일간 신문의 어떤 기자도 기사에 서산대사의 시로 인용했더군요. 이 시 말고도 지은이가 분명치 않은데 특정인의 작품으로 알려져 인구에 회자되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허물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정민 교수에 따르면 이 시 또한 흔히 고려말의 스님 나옹화상의 시로 구전되지만, 정작 나옹화상의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튼 "눈길 뚫고 들길 가도..."하는 시는 정민 교수의 말처럼 사산대사의 시가 아니라 이양연의 시가 분명한 듯 합니다.

1917년에 편찬된 《大東詩選》卷之八 張三十에도 이시는 이양연(李亮淵)의 시로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다만 '답(踏)'이 '천(穿)'으로, '일(日)이 '조(朝)'로 되어 있지만 뜻은 같습니다. 또 북한 문예출판사에서 1985년 발간한 《한시집》2권 328면에도 임연 이양연 선생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지요.

임연 이양연의 문집인 '임연당집'은 판본으로 전하는 것은 없고 모두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는데 규장각 본 '임연당집'에는 이 시가 실려 있지 않아 그 동안은 대동시선이나 북한 문예출판사의 '한시집' 기록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이양연의 시로 확신 할 수 없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최근 정민 교수가 확인 한 바에 따르면 규장각본 '임연당 별집' 5페이지에 '야설(野雪)'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가 실려 있다고 하는군요. '야설(野雪)'은 모두 두 수로 되어 있는데 첫 수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시이고 또 한 수는 운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고 합니다.

'야설(野雪)'의 지은이가 이양연 시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 이상 더 이상 이 시가 서산대사의 시로 잘못 알려지거나 인용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지은이가 누가 됐든 '야설(野雪)'이라는 좋은 시의 가치가 훼손될 까닭은 없겠지요. 다만 눈에 덮여 가려져 있던 이름이 눈 녹은 뒤에 드러났으면 그 이름을 바르게 기억해 주는 것도 옛 시인에 대한 후대인의 예의가 아닐까 생각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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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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