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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 반민특위 표석은 골목 안에 있어 지나치기 십상이다.
ⓒ 권기봉
드디어 5억을 돌파했단다. 지난 해 말 언필칭 ‘사회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들이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 5억원을 전액 삭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후, 이에 분노한 네티즌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금한 결과 19일 아침 목표액 5억원을 넘겼다는 소식이다.

일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IMF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나라가 어렵거나 사회발전을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에 지극히 상식적으로 나서는 이들은 대부분 ‘사회지도층’이 아닌 우리 주변의 일반인들이었다. 그 진리는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모금 시작 열 하루만에 목표액을 돌파한 이번 모금운동에 참여한 네티즌은 그 수만 해도 2만2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회가 나서 나치 치하에서 강제 노동을 했던 이들을 위한 지원법을 만든 독일과 달리 총선을 앞둔 우리 국회의원들은 각종 선심성 예산을 늘려 8000억원의 적자 예산을 편성해 놓고도,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필요한 5억원의 예산은 부분삭감도 아닌, 전액삭감을 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난 8일에는 친일진상규명특별법안을 본회의에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은 채 무산시켜버린 것이 우리 국회, 우리 국회의원들이었다.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인천 부평 미군기지 터를 차지하기 위해 소송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똘레랑스’를 보이는 우리나라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까?

▲ 반민특위가 들어 있던 현 국민은행 명동영업부(롯데백화점 명동점 바로 건너편) 건물.
국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따른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한 기관인 행정자치부 김주현 차관은 국회 법사위 제2법안심사소위에 참석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들이 반발해 국민적 갈등이 일어날 수 있고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분들이 대부분 사망했거나 연로해 증인과 참고인의 일방적인 진술을 막을 장치가 없다”며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제2의 반민특위’라는 이름의 지극히 소극적인 친일 청산 시도조차 각종 태클을 받고 있는 지금, 그래도 반세기 전과 비교하면 희망의 빛이 조금이나마 보여 다행스럽기는 하다.

@ADTOP@
친일인명사전 이전에 반민특위가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도, 날씨가 쌀쌀해도 명동은 활기를 띤다. 일제시대 이후 번화가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명동. 해방 정국에서도 명동은 주요 중심가 중 하나였다. 지난 18일 명동을 찾았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종각역쪽으로 걷다 보면 국민은행을 만나게 된다. 국민은행 명동영업부. 이곳은 친일인명사전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 무엇’이 있던 곳이다.

▲ 한 겨울의 명동
ⓒ 권기봉
그 무엇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인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애초 중앙청 205호에 사무실을 차렸다가, 당시 상공부 특허청이 쓰고 있던 지금의 국민은행 명동영업부 자리로 사무실을 옮겼던 것이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통과되면서 설립된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업무를 시작, 사흘만인 8일에 화신백화점(지금의 종각역 밀레니엄타워 자리에 있었음) 사장 박흥식을 체포하는 등 친일 청산을 위해 마련됐던 기구다. 반민특위는 이어 친일 경찰 노덕술을 검거하고 이광수와 최남선 등 총 682명을 조사하고 221명을 기소하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해방 후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현실에서, 친일 청산은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기소된 221명 중 재판 판결건수는 40건에 불과했고 체형을 받은 자는 14명, 실제 사형 집행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리고 체형을 받은 자들도 곧바로 풀려났다고 전해진다. 이는 반민특위의 무능이 빚어낸 결과가 아니라 ‘저 위’로부터의 조직적인 방해에 의한 와해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친일파들을 필요로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되고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키면 안 된다’며 담화를 통해 반민특위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뒤인 2월 24일에 이르러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는 등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 1948년 10월 광주, 반민특위 전남 조사부에 설치한 투서함에 투서하는 모습.
ⓒ 이경모
뿐만 아니라 수도청 수사과장 최란수와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 등이 테러리스트 백태민을 사주, 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인 김병로 대법원장과 권승렬 검찰총장, 신익희 국회의장 등 반민특위 위원 중 강경파에 속하는 15명에 대한 테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백태민의 자수로 무위에 그치기는 했지만, 반민특위에 대한 방해공작이 얼마나 집요하고 폭력적이었는지는 충분히 알 만하다.

한반도 남쪽에 ‘반공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미군정과 이미 사회 기득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친일파들이 있었기에, 반민특위는 그렇게 사라져 갔고 해방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지금까지 친일 역사는 청산되지 않고 있다. 청산은커녕 ‘친일’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기만 해도 빨갱이라는 둥 좌파라는 둥 공격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 근래의 우리 사회다.

이런 사실을 웅변이라도 하듯 반민특위가 자리하고 있던 국민은행 명동영업부 자리는 쓸쓸하기만 하다. 지난 99년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표석을 세워서 그렇지, 표석을 세우기 전에는 그곳에 반민특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물론 지금도 표석은 골목 안쪽에 세워져 있어, 일부러 골목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볼 수 없지만 말이다.

▲ 반민특위 기습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
ⓒ 정병준
‘제2의 반민특위’에 거는 기대

물방울이 모여 내를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 네티즌들의 십시일반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한 군자금이 모였다. 이미 사회 각계각층에 흩어져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친일 후예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이제 '제2의 반민특위'가 다시 꾸려지는 셈이다.

아직 그릇된 역사에 대한 심판은커녕 그 심판을 위한 진실조차 알지 못하고 지금, 친일인명사전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이완용은 그렇다 쳐도 서정주나 이광수 등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모르는 이들은, 그들의 문학적 업적이 결코 작지 않으니 과실은 묻어둘 필요가 있지 않느냐 반문하기도 한다. 또 다른 형태의 ‘조폭’으로까지 불리는 친일 언론들은 지금까지도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한국 사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있지만, 적잖은 이들은 이들을 민족 언론으로 생각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과실 못지 않게 업적도 있으므로 아예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은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려는 이유는 단순히 그 후손들에게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친일 역사 청산의 기틀을 잡겠다는 데 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영업부
ⓒ 권기봉


상공부 특허국이 쓰던 곳... 특위 해체뒤 국민은행 들어서
이원용 당시 반민특위 총무과장에게서 듣는 반민특위 사무실

- 당시 특위 사무실의 위치가 현재의 어디입니까?
“미도파(현 롯데백화점 명동점) 건너편, 지금 국민은행 자립니다. 당시는 2층 건물이었습니다.”

- 어떤 연유로 그 건물을 반민특위 청사로 쓰게 됐습니까?
“내가 이범석 총리를 찾아가서 반민특위 청사가 없어 일을 볼 수 없으니 하나 알선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대뜸 임영신 상공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이러한 용도로 사용할 목적이니 상공부 계통에 있는 건물을 하나 내줄 수 없느냐’고 하더군요. 그때 임 장관이 특허국 건물을 추천하자, 이범석 총리가 ‘그거 너무 작지 않느냐, 좀 큰 걸로 구해 달라’고 하여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범석 총리가 화가 나서 전화통을 내던져 전화통이 깨진 적이 있습니다.”

-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도리 없이 특허국 건물로 낙찰됐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김상돈 부위원장, 기용희 조사관 등 세 명이 상공부차관을 만나 ‘연락을 받고 왔는데 안내를 해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해서 그들 안내로 건물을 불러보고는 며칠날 우리가 이사를 올 테니 비워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입주 전에 사람을 시켜 사무실 내에 칸막이를 해서 사용했습니다.”

- 입주 전에 그 건물은 누가 쓰고 있었습니까?
“당시는 상공부 특허국이 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특위가 해산된 후에는 국민은행이 들어섰습니다.”

- 사무실 크기가 얼마나 됐으며, 배치는 어땠습니까?
“1층이 약 백 평 정도 됐고, 2층도 그 정도였습니다. 1층에는 원래 내 방만 칸막이가 있었는데, 아마 특허국장이 쓰던 방이었나 봅니다. 나머지 홀은 칸막이를 만들어 제 1, 2, 3조사부에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하였고,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습니다.”

- 특경대(반민피의자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한 단체)원들은 어디에 머물렀습니까?
“특경대원들의 방은 아래층 맨 구석에 칸막이를 해서 사용하였습니다. 특경대원은 총경에서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총 47명이었습니다.(이하 생략)”

출처 : 정운현, <증언 반민특위 -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삼인, 1999

덧붙이는 글 | www.finlan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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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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