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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7명의 국회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은 모두 부결됐다.
ⓒ 연합뉴스 양현택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2003년 마지막 국회 본회의가 열리던 30일 오후 체포동의안 대상자 가운데 한 명인 박명환 한나라당 의원의 신상 발언이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말을 인용해가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잠시 후 법무부가 제출한 7명의 비리 혐의 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완벽하게' 부결됐다. 이 가운데는 스스로 SK로부터 10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한 최돈웅 한나라당 의원도 포함돼 있었다.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국민들도 '뚜껑'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3년 마지막 국회 본회의는 전체 국회의원들이 '불우한' 동료 국회의원들에게 면죄부를 선물한, '자신들만의 자선 바자회장'으로 막을 내린 셈이다.

비리 혐의를 안고 있는 7명의 국회의원들에게 신속하게 면죄부를 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치개혁입법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또다시 표류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백억원대의 불법 대선자금이 불거질 때만해도 정치개혁을 다짐했던 정치권이, 불과 한두 달만에 그와 같은 다짐과 약속이 식언(食言)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정치 불신을 정치권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제도 정치권

올 한 해 정치권을 강타한 가장 강력한 회오리바람은 불법 정치자금 문제였다. 취임 1년도 안된 시점에서 불거진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비리 문제나, 원내 과반을 점하는 한나라당의 수백억원 차떼기도 대선 전후에 벌어진 불법 정치자금 문제였다. 이에 맞서 국민의 분노가 일으킨 태풍은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였다.

현재까지 검찰이 확인한, 한나라당에 건네졌다는 기업 돈 502억원은 쌓았을 때 63빌딩의 2배가 넘고, 펼쳐놓았을 때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고도 남는 규모라고 한다. 또한 이는 대졸 신입사원의 평균 초봉의 2055년치이며, 월 100만원씩 저축한다면 4183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이다.

이런 피 같은 돈이 손쉽게 차떼기로 전달되고, 다시금 사과상자나 쇼핑백으로 지구당에 내려져 상대방을 쏘는 '실탄'이 된 것이다. 그 돈은 기업주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사실상 회사의 공금이었고 상품 값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전가된 세금이나 다름없었다.

국민의 분노에 직면한 정치권이 떠밀리듯 정치개혁에 앞장서겠다느니, 지구당을 폐지하겠다니, 고효율 저비용 정치 제도를 만들겠다니 운운한 게 엊그제의 일이다. 불과 한두 달 전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호언장담했던 정치개혁에 대한 약속이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지난 8월 중앙선관위에서 국회에 제출한 선거법 개정에 관한 의견이나, 지난 12월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내놓은 정치자금법과 선거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보고,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는 게 보편적인 평가였다. 이들이 내놓은 안은 후보 간 기회균등,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자금, 선거법 위반에 대한 엄벌 등 그야말로 진작 이뤄졌어야 할 상식적인 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자신들의 '밥그릇'과 직접 관련된 선거구제와 선거구 획정 등을 놓고 '세월아 네월아'하며 시간 노름으로 허비했다. 이런 과정에서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리며 올해 안에 시정 조처하라고 한 결정조차 어기며 '위헌 국회'를 스스로 자초했다.

이는 선관위나 정개협 등이 제시한 안을 백안시하며, 자기 당에 유리한 '뉴-게리멘더링' 찾기에 혈안이 된 결과다. 이 때문에 야3당이 잠정 합의한 개정안이 '박아무개 선거법'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제도 정치권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와중에 정치신인들은 그들보다 먼저 '관'속에 묻힐 처지에 놓였다.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고, 맨몸으로 뛰던 정치신인들에게 정개협이 내놓은 '예비후보자에게 120일 전부터 사전선거운동을 허용한다'는 선거법 개정안은 가뭄의 단비였다. 정치권이 이를 90일로 줄이기로 내부 합의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도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구를 둘러싼 정치권의 이전투구 속에 이같은 안들도 폐기 직전의 위기에 놓였다. 이전처럼 국회의원 금배지와 한낱 정치신인과의 경선 구도가 될 수밖에 없는 현행 제도는 정치신인들에게는 절망 그 자체로 다가온다.

금배지 이전투구 속에 하나 둘씩 사라지는 정치신인들

한 시민단체의 논평처럼 정치개혁입법을 정치권에게 맡겨놓은 것 자체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셈'이었다. 정개특위 회의가 소집되면 맨 먼저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를 '씹고' 난 뒤 본론에 들어간다는 소리도 들린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한 정개특위 위원은 "정치신인들이 (현역 국회의원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서 선거를 치르는 건 당연하다"는 뉘앙스의 발언까지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렇게 아니꼬우면 너희들도 금배지를 달면 될 것 아니냐'는 것이다.

기자가 아는 한 30대 정치신인도 최근 자신의 꿈을 접으려 하고 있다. 당락을 떠나 같은 출발선에서 뛰며 유권자들에게 심판 받으려 했던 그가 이미 냉엄한 '돈 정치'에 의해 스스로 '컷오프'를 자청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일찍 지역구에 내려가 발로만 뛰는데도 그가 쓴 돈이 몇천만원에 이른다. '제도개선 없는 구태한 선거법 아래서 경선을 뛰면 얼마나 써야 하나, 설령 경선을 통과한다고 해도 본선은 무엇으로 치르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그는 막막해졌다고 한다. 이렇듯 새로운 기대를 걸었던 정치신인들이 금배지들의 이전투구 속에서 하나둘씩 이름 없이 고사하고 있다.

2003년 마지막 국회 본회의 이후 시민단체에서는 "이럴 바에 국회를 해산하라"고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대다수 국민들도 비슷한 심경일 것이다.

4·15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미친 개는 몽둥이로." 물에 빠진 걸 구해주니 오히려 주인을 물려고 달려드는 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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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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