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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떠나는 여행은 어깨가 무겁다. 그것은 기원전 구비 전설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현실의 지도 위에 풀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비경에 얽힌 숨겨진 전설이 너무 많다. 전설의 고향이라 일컬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라산 뒤에 숨어 있는 서귀포 70경이 내게는 모두 전설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 서복전시관 정경
ⓒ 김강임
정방폭포 석벽에 새겨진 '서불과차(徐市過此)' 앞에서 그 뜻과 글자를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정방폭포를 스쳐 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 어리석음의 누를 범하게 될 것이다.

서귀포 70리 길을 다 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너무 이곳에서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서둘러 배낭을 메고 다시 떠난 곳은 지난 9월 26일 개관한 '서복전시관'이다.

▲ 누각에서 보는 서불의 벽화
ⓒ 김강임
정방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흠뻑 옷을 적신 나는 마치 가을날 이른 아침 숲 속에 사는 풀벌레처럼 젖어 있었다. 이슬에 흠뻑 젖은 풀벌레가 가을 햇빛에 몸을 말리듯 서복전시관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폭포에 젖은 옷을 말릴 수 있었다. 정방폭포 바로 서쪽 위에는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에 새겨진 벽화와 '서불'의 조각상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에서는 지척에 그 웅장한 폭포가 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폭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 중국식 우진각 지붕
ⓒ 김강임
'서복전시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중국식 우진각 지붕이다. 전시관의 건물 지붕으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국과 역사의 가교를 잇기 위한 관광 차원의 배려로 생각하면 빨리 이해할 수 있다. 널찍한 잔디밭을 끝에는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수평선뿐이다.

▲ 서복전시관의 측면
ⓒ 김강임
서복전시관에 들어서자 새 집으로 이사온 분위기를 느낀다. 새것에 대한 호기심은 모든 사람들의 본능인데, 이곳에서는 그 호기심이 더욱 크다. 그것은 석벽에 새겨진 전설의 보따리를 풀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과 수수께끼 같은 '서불과차(徐市過此)'의 전설을 이 전시관에서 다 풀어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니 불로장생을 꿈꿔 온 진시황 탐욕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진시황은 굳이 '세계사' 교과서를 빌리지 않더라도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로초에 대한 궁금증은 진시황뿐만 아니라 현대인이 더욱 크지 않을까?

서귀포에 전해오는 서불에 대한 전설은 서불(서복)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을 찾아 항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서귀포에 가거든 꼭 이 서복전시관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은 서귀포의 역사와 정방폭포의 전설을 알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 전설 속에는 바로 '내'가 서 있기 때문이다.

▲ 전시관 입구에서 만난 서복과 동남동녀
ⓒ 김강임
서복전시관에 가면 '서불과차(徐市過此)'에 대한 문헌 기록 <해동제국기>와 <파한록>의 기록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진시황이 서복으로 하여금 바다로 들어가 신약을 구하게 하니, 서복은 그곳에서 살면서 76년동안 왕위에 이어왔으며 수명이 115세였다는 이야기다. 어떤 이들은 서복이 불로초를 캐서 배에 실어 중국으로 다 보냈다고 추측하지만, 여행지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 불로초는 서복이 모두 삼켜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우유를 받아먹는 사모님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욱 건강하다'고 떠날 때 동남 동녀 삼천명을 거느리고 온 서복이 설령 그 불로초를 다 진시황에게 보냈겠느냐는 넌센스에 대한 추측이다. 죽어서 신이 되고 그 나라의 백성들이 지금도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앞에서는 비록 전설이지만 고개를 숙여졌다.

더구나 백낙연 제주목사가 서불의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밧줄을 내려 글자를 그려오게 하였는데, 그 글자가 과두문자였다는 이야기도 전설과 현실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 같다. 나 또한 얼마전 행정기관에서 석벽에 새긴 글자 앞에서 그 뜻을 찾아 미로 속으로 빠졌던 생각을 하면 같은 맥락은 아닐런지.

▲ 이동경로
ⓒ 김강임
특히 전시관에 마련된 '서복의 동로 추정항로' 앞에 서면 궁금증은 극에 달한다. 13개 항로를 추정해 지도로 표기해 놓은 '서복의 동로 추정항로'를 보면 춘추시대 전후- 산둥시 반도- 발해만 요동반도- 서해하구- 제주도로 표기되어 있다. 또 대동강 하구- 서해 연근해- 제주도, 경기만 하구- 사해 근해- 제주도 등 13개 항로가 표기 돼 있다.

그러나 서복과 동남동녀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의구심 또 하나의 전설 속으로 묻혀 버린다. 서불이 제주도뿐만 아니라 부산과 남해의 해금강. 강원도 금강산 등 경치가 수려한 비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을 남겨 놓았다는 전설 때문인지도 모른다.

▲ 금당포터 조천포구와 바다
ⓒ 김강임
한편 서복전시관에서 만나는 '금당포터'인 조천 포구는 서복이 당시 동남동녀을 데리고 배를 타고 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해 놓아 더욱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고대 전설에 나오는 금당포터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러 맨 처음 도착한 포구이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서불은 이곳에서 천기를 보고 조천(朝天)이라는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바위는 고려시대 조천관 건립공사 때 매몰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 불로초도 구경 해 보세요
ⓒ 김강임
방사였던 서복에게 진시황은 배두척과 수천명의 동남동녀. 금은 보화까지 주었다고 하니 그 당시 불로장생은 지금의 권력만큼이나 최고의 파라다이스가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복전시관 불로초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 전시관 내부
ⓒ 김강임
전시관 내부에는 진시황이 영주산에 있다는 불로초를 구하러 출항하는 서불을 격려하는 장문과 서불의 생애. 진시황의 모습과 문헌기록. 서씨 가문과 서불의 가계도 등도 전시돼 있다. 또한 '서복 전시관'을 돌아보며 1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면 '서불과차'에 대한 영상물을 보고들을 수 있어 그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전시관을 나와 잔디밭에 서니 현실 속 의문은 다시 꼬리를 물고 미로 속을 빠져든다. 대규모로 조직된 방사 서불. 그리고 순결한 동남동녀. 그들은 어디로 돌아갔을까? 전설 속에서 만나는 미스테리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미스테리보다 그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서복전시관이 중국과 일본을 관광 자원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전설 문화유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 서귀포(西歸浦) 정방폭포에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귀가 남아 있어, 서귀포라는 지명은 바로 '서불이 도착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 폭포의 진원지는 다시 전설 속으로
ⓒ 김강임
그러나 전설의 진원지인 정방폭포 위에는 유유히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바로 밑에는 23m의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사진 속 강물은 바다와 맛 닿은 것처럼 보인다. 이 전설의 신비를 범섬과 섶섬은 알고 있을까? 그저 말없이 바다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전설은 전설일 뿐인데, 전설에 토를 다는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여행은 전설처럼 돌아온 길을 다시 떠나게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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