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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이 해체된 돈화문과 달리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건축물이 일본의 조선침략 승전 상징물이기 때문이었다는 한 일본인 학자의 최근 연구성과는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1호와 보물 제1호로서 대한민국 문화재의 대표격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팔만대장경 같은 역사적 미술사적 건축사적 의의가 더욱 큰 유적 유물도 많은데 왜 남대문과 동대문이 국보와 보물 제1호를 차지해야 하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이미 지난 96년에 엄청난 논란을 유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당시 문화재관리국과 학계 일부에서는 국보나 보물에 매기는 번호가 문화재의 가치를 매기는 우열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관리번호이며 번호 교체에 따른 행정력 낭비 등을 들어 기존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인 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일본 도후쿠(東北)대 특별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일제시대 성곽 건축물 관리정책에 대한 연구성과는 96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논쟁을 유발할 전망이다.

오타씨 연구에 따르면 1904-1905년 당시 대한제국을 좌지우지한 일본 제국주의가 추진한 경성 일대 도시계획에 의해 남대문과 동대문은 교통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 혹은 이전이 추진됐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두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600)가 각기 이들 문을 통해 왕성에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자랑스런 기념물이라 해서 보존된 것으로 오타씨 연구에 의해 드러났다.

반면 서대문(돈화문) 등 다른 성곽은 일본침략과 관련된 역사성을 갖추지 못해 완전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오타씨 연구에 의하면 일본과 관련한 역사성을 기준으로 한 유적. 유물의 해체및 이전 정책은 평양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즉, 평양의 경우 평양성 일대에 현존하는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은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승리한 것과 관련되는 유적이라 해서 고적(古跡)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

오타씨는 "이런 (평양성) 성문들은 문화재적 가치보다는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근대사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부여됐다"고 평가했다.

일제의 한국 문화재 정책이야 그렇다고 치고 더욱 큰 문제는 해방 뒤 남한과 북한의 문화재 정책이다.

과거 일본이 조선 혹은 청국을 상대로 전승한 기념물이라 해서 보존되고 고적으로까지 지정된 이들 일제시대 문화재가 해방 뒤 남한과 북한에서 나란히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각각 대표하는 문화재로 고스란히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이 일제가 지정한 고적 제1호라는 사실은 그냥 보아 넘기기가 힘들다.

북한 또한 청일전쟁에서 '대일본제국' 군대가 승리한 기념물이라고 해서 보존한 현무문과 칠성문, 보통문, 모란대, 을밀대, 만수대 등지가 고스란히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들 유적을 포괄하고 있는 평양성이 바로 북한의 국보 제1호이며 보통문은 2호이다.

물론 남대문이나 동대문, 을밀대 등이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각기 건축사적.미술사적.역사적 의미로 볼 때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일제가 왜 이런 유적들을 고적으로 지정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철저한 연구나 성찰이 없었다는 점은 큰 문제이다.

일제가 임진왜란의 자랑스런 승전물이라 해서 보존하고 이를 토대로 고적 제1호로 지정 고시한 남대문을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 명칭만 바꿔 문패를 바꿔 단 것은 그토록 친일잔재 청산을 외쳐온 대한민국의 오욕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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