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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우, 변절과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친일파

이은우(李恩雨, 하동출신)는 일본 유학생으로 최린과 함께 대한학생회를 조직하여 참여하였다가, 1930년대 귀향하여 자본가로 성장하게 된다. 1935년 하동 수리조합장, 하동 산업조합장, 하동 금융조합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내 토호로 급부상하게 된다.

▲ 최린과 함께 변절한 친일파, 중추원 참의로 선출된 이은우.
ⓒ 전갑생
1938년 10월 그는 하동읍 승격에 일조하면서 '읍승격 봉곡제'에 참석했다. 이날 봉곡제는 10월 1일 시정 기념일을 맞아 하동신사 대전에서 관민 각 단체, 학생 등 천여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당시 주요 행사는 읍장의 황국신민 제창, 출정장병 무운장구 기원, 전사장병묵념 순서로 이어졌다. 또한 이은우는 "하동민의 숙원이었던 읍제실시 발표를 볼 때 축하할 일이다"며, "앞으로 당국의 지도에 따라 협력 일치 일층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하동읍 승격에 공헌한 이은우
ⓒ 전갑생
1938년 이은우는 중추원 참의(주임, 종 7)로 임명되면서 "사회교화시설 중 조선현황에 대해 특히 강조 실시를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과 이것을 일반 민중에게 철저히 시키는 데 있어 적절 유효한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추원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의 회의에 제출한 사항을 심의하야 그 결의한 것을 총독에 아뢰울 뿐이요 중추원자신이 의안을 제출할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결의는 단지 의견을 개진하야 총독의 참고재로밖에는 되지 않음으로... 그러나 중추원은 총독의 최고자문기관인만큼 그 결의는 정치상 중요한 한 개의 요소가 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또한 1941년 임전보국단(흥아보국단 경남위원) 발기인 및 경남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탁동조, 두 번이나 창씨한 친일파

탁동조(卓同朝, 창씨명 光山文吉·光山卓一, 1893년생)는 통영출신으로 수산자본가로 승승장구한 친일파였다. 1933년 만주국승인 1주년을 맞아 기념광고를 낼 정도로 열열한 친일 광분자였다. 당시 통영어업조합장을 맡으면서 일본인 자본가와 협력하고, 1935년 5월 경남관광협회 통영지부 실행위원, 1936년 3월 통영산업조합 평의원, 경남도의원 등을 역임했다.

▲ 두 번이나 창씨개명에 앞장 선 탁동조.
ⓒ 전갑생
1939년 4월 14일 통영군 육군지원병 후원회를 결성하여 '총후(銃後)의 협력'하자고 강조했다. 지원병 후원회 부회장을 맡은 탁동조는 "통영청년훈련소를 지원하고 입소생들을 지원하고자 적극 노력하고 지지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1939년 6월 통영읍회 의원, 같은 해, 8월 13일 통영 경방단(警防團) 부단장, 11월 2일 통영미곡통제조합(統營米穀統制組合) 총대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3월 그는 창씨개명에 앞장서면서 '영광스럽게' 신문에 보도되었다. 부산일보(1940. 3. 2일자)에는 "내선일체를 위해 애쓰고 설정의 세기에 헌신하기 위해 통영 명문회 회원, 읍회의원으로 활동하는 탁동조씨는 '光山文吉'로 창씨하고 같은 가족인 탁응조도 '광산'으로 모두 개명하도록 하였다"라고 보도했다.

▲ 육군지원병후원회 부회장 탁동조.
ⓒ 전갑생
1941년 5월 탁씨는 경남도회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로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경남도의원 후보로 출마하면서 칭씨명을 '光山文吉'에서 '光山卓一'로 다시 개명했다. 1941년 5월 통영군에서 열린 경남도의원 당선자 축하연에 참석한 그는 "모든 의지를 모아 충성하겠다"라고 다짐했다.

박진평, '황도(皇道)의 정신에 입각해 국가 영웅이 되자'라고 외친 친일파

박진평(朴晋平, 남해 출신)은 국방의회 자문, 1935년 7월 남해면협의회 의원, 1936년 3월 5일 남해신사(南海神祠)는 '신사(神社)'로 승격하기 위해 '남해신사 봉찬회(奉讚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았다. 1939년 9월 10일 남해군 경방단 단장, 1940년 3월 19일 남해 유림회 고문 등을 맡았다.

▲ 남해신사의 승격운동에 앞장선 박진평.
ⓒ 전갑생
특히 박진평은 남해 군방의회 결성식 때 "오인(吾人)은 황도(皇道)의 정신(精神)에 입각하여 확인(確因) 국웅(國維, 국가 영웅)으로 극복(克服)하여 동양영원의 평화를 확보하고 동아세아(大亞細亞)의 국방봉임(國防奉任)을 위하여 일치 협력 국시(國是)를 관철하고자 한다"라고 다짐했다.

또한 그는 "1933년 9월은 만주사변 2주년을 맞아 국방의회 발회식을 거행하게 된 것과 국내외 정세를 판단하여 황운(皇運, 황국의 운명)의 힘을 빌려 앞으로 나아가자"라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 외 허기엽(許基燁, 통영 출신)은 경찰, 통영읍회 의원, 통영임항철도 기성회 회장, 경남광광 협회 통영지부 실행위원, 반민특위 때 체포되기도 했다. 김경진(金慶鎭, 金子慶鎭, 1892년생, 중추원 참의, 경남도회의원·부의장, 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북경협화대학중퇴, 농업, 경남도회 부의장, 경남 진영면 영리 274, 40. 3. 6), 이장희(李章喜, 창씨명 江川思鄕, 진주부회 의원, 진주부 본정, 1910∼12년 경남도 서기, 진주읍회 의원) 등이다.

▲ 경남 자본가 정상진, 국방헌금 내다.
ⓒ 전갑생

경남 대자본가들의 친일 행적

진주 대자본가 정상진(鄭相珍, 진주출신)은 1907년경부터 전남지역의 소금을 사들여 소금장사를 하였고, 1910년 벼 중간상을 하였고 이후 미곡, 소금, 명태 등의 물품으로 오지에까지 거래를 확대해나갔다. 진주합동운송주식회사, 영남약주제조주식회사, 진주정미소 등을 경영했다. 1921년 3월 무직자구제회(無職者救濟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또 초대 진주부회 의원, 경남도의원, 중추원 참의, 국방헌금(진주읍 서봉정 실업가 1백15원25전과 5천원) 헌납, 1936년 3월 26일 삼천포읍회 관사 건축비를 전액 지원하기도 했다.

▲ 김억근, 창녕출신의 경남도회의원
ⓒ 전갑생
김억근(金億根, 金城億根, 창녕출신, 1906년생)은 경남의회의원, 창녕금융조합장, 창녕읍협의회 의원, 국민총력 창녕군연맹 이사, 학교비평의원, 상공연맹 이사장 등을 지냈고, 김현국(金炫國, 金元炫國)은 1916년 6월 통영위생조합비 1000원과 은잔을 기부하고, 1926년 11월 통영면협의회 의원, 1928년 11월 16일 대례기념장, 통영, 1933년 6월 10일 통영군 소작위원, 1940년 4월 23일 통영산업조합장 등을 지냈다.

▲ 김경진, 진영출신의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친일파
ⓒ 전갑생

행정가 출신들의 친일행각

김의용(金義鎔)은 1928년 2월 14일 함양군수, 1928년 11월 16일 대례기념장, 1931년 12월 28일 밀양군수, 1935년 4월 17일 김해군수를, 김동준(金東準)은 1925년 9월 24일 경남도시학관, 27.3.31 내무부(경남)산업과장 겸 물산진열관장, 1927년 9월 3일 진주군수 1928년 4월 14일 동래군수, 1929년 3월 28일 전남구례군수, 1928년 11월 16일 대례기념장, 1938년 1월 18일 지원병제 환영담화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 외 친일 행정가는 조중환(曺重煥, 夏山重煥, 1904, 경남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 노준영(盧俊泳, 豊川一淸, 1892년생, 와세다대 상대 졸)은 경남도회 의원, 중추원 참의, 1920년 12월 20일 경남도평의원(민선), 1928년 11월 16일 대례기념장 등을 역임했으며, 김정희(金井喜, 金井喜一, 1896년생, 경성고보, 사천군수, 경남 사천읍), 김태석(金泰錫, 金林泰錫, 경남도 참여관 산업부장), 정인두(鄭寅斗, 小山寅一, 1901년생, 와세다대 졸업, 농업, 경남도회 의원, 양산 하북면 소십리 391), 황순주(黃順柱, 사천출신, 1903년생, 대구의전, 의사, 경남도회 의원, 사천면 정의동 234), 고원훈(高元勳, 1881년생, 명치대학, 중추원 참의, 동일은행 감사역, 동광생계 사장, 경성부), 강창인(姜昌寅, 神農豊助, 1940년 3월 17일 산청군수 재직시 전 가족을 창씨 개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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