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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40년 6월 10일자 광고. 고희준은 국민협회 상의원장을 맡으면서 창씨개명에 앞장섰다.
ⓒ 전갑생
1940년 6월 10일(3면)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創氏, 期限 僅 2月 殘餘(창씨 개명 앞으로 2개월 남았다)"라고 게재되었다. 또한 눈에 띄는 부제로 "創氏. 改名 選作...一柳誠男先生...子孫 繁榮ノ爲(창씨 개명 자손번영을 위하여)"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 광고주는 조선중앙창씨명상담소(朝鮮中央創氏名相談所)로 1940년 창씨개명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고희준 거제군수'가 창씨개명에 앞장서다!

이 광고에 '일유성남선생'에는 일본인 3명과 유일하게 조선인 1명이다. 그 사람은 바로 대한제국시대에 거제군수를 지낸 고희준(高羲駿, 창씨명 高島基)이다. 그때 신문광고에 나온 그의 직책은 국민협회상무의원장, 신도연구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고희준은 대한제국시대부터 정부관리로 있다가 1907년 거제군수, 1909년 진남군(鎭南郡) 군수, 1911년 6월 8일 충남 신창군(新昌郡) 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1907년 2월 10일, 거제군수 고희준가 주창하여 김경식, 유공환 등이 협력하여 모은 기금으로 사립 거제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 4월에 교사(敎舍)를 수리하고 운동장을 넓히는 작업과 동시에 같은 해 7월 20일 보조 지정학교로 승격하였다. 1911년 4월 8일 공립학교로 인가되어 공립거제보통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지금 거제초등학교는 거제 최초의 근대식 학교이자 사립학교로 알려져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이 학교는 양명, 신용기, 김응수 등 항일운동가 등을 배출한 곳이다.

고희준은 교육에 남달리 애정을 가졌던 모습과 달리, 일제식민지 초기부터 일진회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친일의 길로 가게 되었다.

일진회에서 국민협회까지

일진회는(一進會, 존립기간 1904. 08. 18∼1910. 09. 12)는 이용구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부역단체다. 고희준은 1909년 5월 24일 일진회 총무국 교섭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당시 일진회의 성격은 친일적 민의수렴을 통해 일본의 시정개선(施政改善)을 적극 수용하여 보호통치를 옹호하고, 나아가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일본과의 일체를 달성하고자 조직한 대표적인 친일단체이다.

고희준은 일진회 해산 이후 정우회(政友會)에 참여하게 된다. 정우회(존립기간 1910. 03. 02.∼09. 13)는 국시유세단이 정치적인 목적을 적극 추진·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친일단체이다. 1910년 3월 29일 그는 정달영(鄭達永,?) 강중원(姜重遠)을 비롯한 100명과 함께 발기인이자 상의원(相議員)으로 참여했다.

우정회는 "1. 황실존영(皇室尊榮), 2. 정치무실(政治務實), 3. 교육진흥, 4. 실업발달, 5. 사회개량, 6. 빈황구제(貧荒救濟(備)), 7. 한일친선"을 강령으로 삼았다. 이 단체의 성격은 고희준 등을 앞세워 이완용·조중응 등이 조종한 합방찬성을 추진하는 친일단체라고 하겠다. 다음은 취지문의 내용이다.

"…… 蓋時代의 變遷과 國運의 盛衰를 際하야 四圍의 事情을 鑑하고 自國의 現狀을 察하야  能히 其利害得失을 深量하야 國民의 所向을 指示함이 實로 有志者의 自任 바로다. …… 吾가 猛然蹶起하야 國論을 確立하고 國情을 穩健히 하야 皇室의 尊榮을 宣揚하고 國交를 親密히 하야 時局의 平和를 維持하고 風敎를 矯正하야 社會의 積를 掃蕩하고 敎育과 實業을 振興하야 人民의 生活을 饒足케 하야 써 目下의 濱死한 民族을 濟拯코져 함.……."(취지서). (개시대의 변천과 국운의 성쇠를 제하야 사위의 사정을 감하고 자국의 현상을 찰하야 능히 기리해득실을 심량하야 국민의 소향을 지시함이 실로 유지자의 자임 바로다. …… 오가 맹연궐기하야 국론을 확립하고 국정을 온건히 하야 황실의 존영을 선양하고 국교를 친밀히 하야 시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풍교를 교정하야 사회의 적을 소탕하고 교육과 실업을 진흥하야 인민의 생활을 요족케 하야 써 목하의 빈사한 민족을 제증코져 함. …….").

고희준은 정부 각 관청을 방문하여 "同會(동회)는 親日主義(친일주의)를 표방하야 조직한 바"라고 언명.

이처럼 고희준은 '합일합방'(경술국치(庚戌國恥))에 앞장선 인물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또한 그는 1910년 4월, 정우회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이 고희준에게 정부의 예산을 받아야 확장·진보할 수 있음을 조언하였고, 1910년 4월 11일 오전 10시, 중부경찰서장 나가타니(永谷)가 고희준을 불러 정우회의 목적과 사무를 조사하기에 이른다.

1910년 4월 15일, 고희준은 정우회가 친일주의를 표방하여 조직된 단체임을 밝히고, 같은 달 1일 고희준·민원식이 정운복을 방문하여 정우회 참여를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한편, 1910년 6월 1일 오전 9시, 통감 처임(遞任)과 관련하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의 계획 하에 고희준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경부열차 편으로 출발하였고, 여비로 2500원을 이완용, 조중응 등이 마련해 주었다.

1910년 7월 12일, 고희준이 통감부에 장서(長書)를 제정(提呈)하고 2개 조건을 진술(陳述)하였다. "日憲兵 一師團(일헌병 일사단)의 渡韓(도한)하 經費(경비)로 각 지방 인민의 실업자본을 수립하야 생활의 곤란을 구제케 하고 下議院(하의원)을 설립하고 관리 300명을 選置(선치)하되 한인으로 150명, 日人(일인)으로 150명을 敍任(서임)하야 邦國事(방국사)를 협의"하도록 했는데, 모처에서 사실여부를 탐지중이라고 했다.

고희준, 친일단체 국시유세단 사무간사

▲ 1909년 8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 고희준은 국시유세단 상무간사직을 맡으면서 강연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 전갑생
1909년 12월 창립된 국민연설회(國民演說會, 일명 臨時國民大演說會·國民大演說會·國民會·國民大會)에 고희준은 연설원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의 성격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대한상무조합소(大韓商務組合所)·신궁봉교회(神宮奉敎會) 등을 중심으로 일진회의 이른바 '합방'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명의로 '합방'을 추진함으로써 "한국을 영구히 일본에 부속하기로 특별운동을 시"하고 이를 통해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한 기구였다.

고희준은 1909년 12월 3일 임시국민대연서회 발기인대회에서 "일진회에 問" 이란 연설을 했으며, 같은 해, 3월 15일 조선 인민을 유세하기 위해 서로지방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다음으로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 일명 遊說團·國是團)에 참여한 고희준은 발기인, 규칙제정위원, 사무간사(1910. 8. 2~) 등을 맡았다.

이 단체의 성격은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 자존자립할 능력이 없으며, 나아가 동양평화를 보지(保持)하기 위해서도 보호통치는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한국의 국시는 '韓日兩國(한일양국) 交際(교류)에 基因(기인)하야 利害共通主義(이해공통주의) 採(채)하야 全國人民(전국인민)으로 하여금 貫徹(관철)'시키는 것임을 관철시키기 위해 조직된 단체(고희준의 연설 내용 일부)이다. 고희준·정응설 등은 유세단의 경비가 "통감부와 정부에서 지급"되고 있음을 공언했다.

그의 주요 활동을 보면, 1909년 7월 26일 일진회원 고희준이 서부 원각사에서 "我韓(아한) 今日(금일)에 國是如何(국시여하)를 論(논)"이란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또 7월 30일, 고희준이 정운복(鄭雲復, 제국신문사장)을 방문하여 함께 힘을 합쳐 국시유세단을 조직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해, 8월 1일, 장교 본부에서 고희준·예종석·정응설 등이 지방유세에 대한 헌병·순사의 보호 요구 건과 보부상 연락 건을 의논하고, 같은 달, 5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고희준을 불러 각 지방에 유세위원을 조속히 파견하여 인민들에게 국시의 취지를 설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10월 유세단에서 1000원을 지급하여 대동일보사(大同日報社)를 인수하여 기관지를 간행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11월 27일 오후 1시 원각사 내에서 "日本의 視察談(시찰담)"을 주제로 연설했다. 1910년 9월13일 유세단은 결사해산령에 따라 정우회와 함께 해산했다.

고희준이 진남군수를 사직한 후 일진회에 가입하고, 또 국시연설과 유세단을 조직한 것은 진해요한포병사령관(鎭海要塞砲兵司令官) 해군중좌 궁강의기와의 모종의 협의에 의한 것이며, 유세비용 수만원도 궁강의 주선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에 국민협회 실무조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여 각종 연설회 강연자자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총독부 당국의 주도로 부일협력단체의 대표자들이 각파유지연맹발기인회를 결성(국민협회, 조선소작인상조회, 유민회, 동광회, 노농회, 조선경제회 대표 참석)한 것이다.

▲ 1921년 11월 21일자 <매일신보> 기사. 고희준은 국민협회 상무의원장으로 강연회에도 참여했다.
ⓒ 전갑생
마지막으로, 그가 일제식민지 말기까지 활동한 단체인 국민협회(국민협회 國民協會)에 대해 살펴보자. 1920년 1월 18일 창립된 국민협회는 조선 총독부 경무국의 지도로 협성구락부를 확대 재조직한 단체이다. 그는 국민협회에서 상담역(1923년), 상무의원장 등을 지냈다.

국민협회는 자금 지원과 회원들에 대한 우대 면에서 총독부의 비호를 받았다. 1921년 민원식이 피살된 뒤 이루어진 중추원 개편에서 국민협회의 김명준, 김갑순, 한영원, 이병학, 김석영, 신석우, 박봉주 등이 포함되었고, 새로 임명된 지방대표 13명 가운데 5명을 국민협회원이 차지했다.

참정권 실현을 통한 '내선인 차별 철폐' 주장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일제측이 추진한 회유적인 동화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1945년 4월 11일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중의원 선거·피선거권을 부여한다는 정령을 발표했으나 결국 식민통치가 끝날 때까지 조선인들의 참정권은 실현되지 않았다.

▲ 1932년 5월 12일자 매일신보 기사. 그가 몸담고 있는 국민협회에서 '애국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 전갑생
1924년 5월 5일 고희준이 같은 일자 "매일신보"에 "독립이 실현되면 조선민족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논설을 실었다.

"일한합병은 일선양민족의 영원한 복리를 위해 합리적으로 행한 것인즉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이 서로 공동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조선이 독립국으로 되려면 20만톤의 군함과 24團의 군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용(?)을 다른 방면으로 조선민족의 발전을 도모함에 사용하였으면 도리혀 리익이 클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만 조선이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것을 시인할 뿐 아니라 한층 나아가 동양제국의 대동단결. 우리는 일본의 현정부를 시인함으로 우리는 국민의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주장한다. 만일 일본현정부가 우리에게 상당한 권리를 주지 않이하면 우리는 맛당히 힘을 다하여 현정부의 개혁에 노력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는 그 외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1925년 창립)에 집행위원으로, 조선대아세아협회(朝鮮大亞細亞協會, 1935년 창립) 상담역, 동민회(同民會) 평의원 및 이사(1940년)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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