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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 땅끝 전망대에서 본 남쪽 바다
ⓒ 이종원
천리를 달려온 국토의 숨결이 마지막 자맥질 한 곳이 달마산이며, 마지막 한숨 소리를 내며 땅끝 사자봉을 통해 바다로 들어갔을 것이다. 남도 땅에 와서 땅끝을 보지 않으면 왠지 개운치 않다. 땅끝에 올라 남도땅을 밟았다고 신고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아 변함없이 땅끝을 밟는다.

시인 김지하는 온갖 시름을 등에 지고 해남으로 내려와 이곳 사자봉에 서서 애절한 시를 남겼다. 그 유명한 '애린'이다.

애린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김지하>


느낌을 표현할 재주가 없는 나는 이렇게 김지하님의 시를 달랑 들고 땅끝에 올라선다. 그리고 남해바다를 향해 마음껏 외쳐 본다. 그것만으로도 감동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아쉽게도 근래 생겨진 신식 전망대가 땅끝의 소박함을 해친다. 남산타워처럼 생긴 9층의 전망대를 엘리베이터로 올라갈려니 오랜만에 잡은 감동이 운무와 함께 흩어진다.

"정수야. 이곳이 우리나라 제일 남쪽이야. 땅끝이지."
"남쪽이 뭐야. 땅끝이 뭐야?" 이거 설명이 안되네."
"우리나라가 사람 몸이라면 땅끝이 바로 엄지발가락이야."

그제서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 대한민국 최남단 땅끝이다.
ⓒ 이종원
토말비에는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발생하였으며 한겨레가 국토를 그어 국가를 세웠으니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봉인라"라고 적혀있다. 백두산과 사자봉을 모두 올랐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일 게다.

전망대 옆에는 봉화대가 있다. 이곳에서 한양까지 봉화로 전달되는 시간이 6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단 1초만에 전달되는 문명의 이기인 핸드폰을 만지작 거려본다.

* 땅끝 여행정보

자가용은 사자봉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버스는 출입을 막고 있다. 전망대 입장료 성인 1천원(전망대에 오르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주차비 없음. 갈두항에서는 보길도 가는 배가 있다.

송호해수욕장

땅끝에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드넓은 송호해수욕장이 나온다.' 松湖' 라는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백사장 뒤로 100-200년된 울창한 소나무 숲과 호수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가 일품이다.
정수와 나는 백사장을 거닐며 마음껏 뛰어 놀았다. 저 넒은 바다를 보며 정수는 무슨 생각을 할까? 모래에 아빠 얼굴을 그렸고, 손톱 만한 게와 작은 물고기를 만져보고 그렇게 신기해 할 수 없다.
자식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행복임을 왜 이제 알았을까? 나도 부모님 앞에서 웃음을 잃지 말아야지.

▲ 송호해수욕장..잔잔한 바다에 송림이 일품이다.
ⓒ 이종원
백사장은 길이가 2km, 폭이 200m로 면적이 넓으며 질 좋은 모래로 덮여 있다. 백사장 앞으로 펼쳐지는 바다도 수심이 완만하고 온도가 적당해 해수욕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소나무 숲에서는 야영뿐만 아니라 취사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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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잡이 관광체험어장

▲ 갯벌체험을 할수 있는 조개채취장
ⓒ 이종원
송호에서 해남쪽으로 5분만 차를 타고 가면 '조개잡이 관광 체험어장'이 나온다. 피서객들이 자연산 조개류를 재미 삼아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지난해부터 아예 체험 관광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1달을 위해 1년 동안 이곳에서 조개를 잡지 않았기에 개펄에는 조개가 무진장 많다고 한다.

실제 갯벌을 조그만 파보니 수십개의 바지락이 손에 잡힌다. 정수도 참으로 신기한가보다. 이런 체험이 아이들에게는 산 교육이 될 것이다. 송지면 대죽마을이며 개벌 3만평이 체험어장이다.

입장료 : 대인 3천원/ 소인 2천원 (호미, 바구니를 빌려준다.)
주 차 : 무료
체험어장 관리사무소 061-534-2647

내가 미황사를 사랑하는 이유

▲ 부도까지 가는 산책로가 일품이다.
ⓒ 이종원
남도에서 가장 멋진 절집을 꼽으라면 난 단연코 미황사를 손꼽는다. 송나라 사신이 금강산보다 낫다고 하는 달마산이 하늘을 뒤덮고 있으며, 그 바위산이 포근히 감사 안은 곳에 미황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부도밭을 향하는 오솔길은 남도의 나무 박물관이며, 걷는 자체만으로 머리가 맑아진다. 부도밭을 보았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다.

오죽했으면 미황사의 미혹에 허우적거려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다산초당, 백련사를 놓치고 말았겠는가? 그러나 후회는 없다. 산새 지저귀는 부도밭을 거닐면서 마음껏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 오밀조밀한 부도들은 한결같이 내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해준다.

미황사는 해남에서도, 한참을 산 속으로 들어가는 오지다. 분명 달마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그 깊은 절집을 찾아내기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저수지를 거쳐 달마산 중턱까지 산길로 올라야만 미황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관은 물론 가게방 하나 없을 정도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피안의 절집이다.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 그래서 내가 미황사를 사랑하는 이유다.

미황사 창건설화

숙종때 병조판서 민암이 지은 <미황사 사적기> 에 흥미로운 창건설화가 담겨 있다.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에 왔으나 사람들이 가까이 가면 멀어지지를 반복했다. 결국 의조스님이 기도하자 비로소 배가 육지에 닿았는데 안에는 금으로 된 뱃사공과 금함, 60나한, 탱화등이 가득차 있다. 또 검은 소 한마리가 나와 순식간에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나타난 사람이 이르기를 자신이 인도 사람이며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절을 세우라고 해서 들어선 것이 바로 '미황사'라는 전설이다.

이 창건 설화는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4세기 말 중국을 통해서 전파되었다는 통설을 뒤엎는 것이다. 구체적인 고증자료는 없지만 가야라는 국명이 인도의 지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과 허 왕후와 수로왕의 전설, 지난번 갔던 칠불암 설화 등이 그 개연성을 말해준다. 지난번 답사했던 선운사 전설도 사람만 달랐지 미황사 전설과 비슷하다. 사실을 반증하듯 미황사 아래마을 이름이 '牛墳洞' (소를 묻은 마을)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밭

▲ 부도밭에서 딸 정수와 데이트를 즐겼다.
ⓒ 이종원
차를 세워놓고 말로만 듣던 부도밭으로 달려갔다. 정수와 두 손을 꼭 잡고 흙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잠자리도 잡아주고, 호랑나비도 만져보고, 버섯도 따주었다. 그저 소풍간 기분이다. 10여분을 거닐었나? 저 멀리 나즈막하게 자리잡은 부도밭을 발견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밭이다. 산 너머 대흥사의 부도밭도 크지만 승용차까지 지나다녀 도무지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곳은 적막함에 아늑함까지 겸하고 있어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게 된다.

▲ 용궁이라고 표현될만큼 다양한 바다 생물이 부도에 새겨져 있다.
ⓒ 이종원
연담당, 벽하당, 설봉당, 완해당, 창암당, 송암당, 송월당 등등 이렇게 쟁쟁한 선사의 역사를 가진 부도밭이 또 있을까? 이 부도가 또 아름다운 이유는 각 부도마다 용, 두꺼비, 거북, 물고기, 게, 도룡용, 학, 등등 소박하고 재미있는 문양들이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푸른 이끼를 가득 머금고 있어 용궁이나 밀림에 와 있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정수는 동물들을 하나하나 집어가며 이름 맞추기를 한다. 나는 돌 속에 숨어있는 선승들과 대화를 나눈다. 하늘을 본다. 산자락에 걸쳐진 검은 구름이 지나가고 달마산이 그 위대한 자태를 보여준다.
" 와…."

대웅보전 (보물 947호)

▲ 바위산을 배경으로 대웅전이 절묘하게 앉아 있다.
ⓒ 이종원
달마산 장삼을 두르고 살포시 앉아있다. 정면 3칸 , 측면 3칸 팔작다포식 건물이다. 단청의 색이 바래 원목 색이 그대로 드러나 고색 창연함을 보여준다. 변산의 내소사나 울금바위의 개암사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기둥에 기대어 쪽빛 바다를 바라본다. 이 추억을 잊지말자.

▲ 대웅전 석축..게가 새겨져 있다.
ⓒ 이종원
이 건물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것이 바로 주추돌이다. 자연석도 있고 둥글게 깍은 것도 있다 게나 거북문양이 새겨져 있어 이곳이 바닷가임을 말해준다. 혹시 용궁을 만들려는 의도는 아닌지. 부드러운 처마선, 화려한 포작들 그리고 내부 단청도 놓치면 후회한다.

비를 내리게 하는 괘불

대웅전 뒤편에 괘불을 걸어두는 목괘가 있다. 이곳 괘불로 기우제를 지내면 즉각 효험이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2년 30년만의 가뭄에도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도중에 비가 내려 괘불이 젖는 수난까지 당했다고 한다.

미황사의 패망

그 큰 규모의 절이 지금처럼 작아진 것은 언제, 무엇 때문일까? 이것 역시 창건설화만큼 애잔한 이야기가 있다. 150년전 쯤 미황사는 40여명의 스님이 있고, 재산도 많았다고 한다. 스님들이 농악대를 꾸려 해안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고 시주를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설쇠를 맡은 스님의 꿈에 어여쁜 여인에게 유혹을 받은 꿈을 꾸었는데. 불길하여 그날 공연을 쉬자고 했는데 주지는 강행하고 만 것이다. 애석하게도 청산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마나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미황사가 망했다고 한다.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곳이 청산도라고 하는데 그 애잔한 소리 가락이 혹시 스님들을 향한 향한 곡소리가 아닐까?

미황사의 매혹에서 벗어나 아쉬운 작별을 해야한다. 산을 내려오면서 몇 번을 뒤돌아 봤는지 모른다. 지금은 떠나지만 가슴 속에는 미황사를 고이 간직한 채 떠나고 있다.

김남주 시인 생가

▲ 김남주 생가
ⓒ 이종원
미황사에서 해남을 향해 가는데 김남주시인 생가 푯말이 보인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펜으로 총칼에 대항했던 그의 시에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를 흠모를 했을 것이다.

민중을 위해 죽어간 시인의 마을답지 않게 초입엔 모기장처럼 생긴 실외 골프장이 자리잡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오밀조밀한 마을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가를 보며 '참 가난하게 살았구나'란 느낌을 갖게 된다. 강진의 '영랑생가'와 이렇게 차이가 날까? 이런 척박한 환경이 강철같은 시어를 만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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