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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우리 공군 최초로 F-51 전투기의 출격작전을 개시,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 기여를 한 故 이근석 장군의 53주기 추모행사가 7월 4일(금) 오후 2시에 공군 제11전투비행단에서 열렸다.

▲ 공군 제11전투비행단에서 7월 4일 열린 故 이근석 장군의 53주기 추모행사에서 공군 참전 군인회 부회장 김현천(예비역 소장)씨가 헌화,분향하고 있다.
ⓒ 손경수
이날 행사에는 공군 참전 군인회 부회장 김현천(김鉉千, 예비역 소장, 76세)씨를 비롯, 6·25전쟁 당시 출격 조종사, 전우와 유가족 등 70여 명의 초청인사도 참석해, 공군장병들과 더불어 장군의 군인정신을 기렸다. 이밖에도 부대는 행사를 통해 선배전우들의 업적과 노고에 대한 감사도 표시했다.

추모식은 개식사, 국민의례, 헌화 및 분향, 추도사, 조총발사, 故 이근석 장군께 대한 경례, 폐식사로 진행되었으며, 초청인사들과 공군장병들은 '조국을 위하여 무명의 초석이 되리라'던 故 이근석 장군의 호국정신을 되새기면서 행사내내 숙연한 분위기를 보였다.

6·25전쟁 발발 당시 공군비행단장이었던 이 장군(당시 대령)은 50년 7월 2일 미 극동군사령부로부터 지원받은 F-51 무스탕 10대를 일본의 미군기지에서 대구기지로 인수해 왔다.

이 장군은 이틀 뒤인 4일 곧바로 편대장을 맡아 수원·안양 상공으로 처녀출격에 나서 2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운 5000여 명 규모의 북한군이 남하하는 것을 발견, 저공비행을 하면서 로켓탄을 발사해 적탱크를 괴멸시켰다.

그러나 애기(愛機)가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화염에 휩싸이게 되자 기수를 내려 전방에 보이는 적의 5번째 탱크를 향해 돌진, 탱크를 폭파시키고 장렬히 산화했다. 이때가 '50년 7월 4일이었다.

이 장군에게는 준장 진급과 함께 51년 9월 공군 최초의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고, 53년 10월 2일 대구기지에 장군 흉상이 건립됐다. 최근에는 전쟁기념관 및 공군사관학교에도 장군 흉상이 실내에 모셔져 있으며, 공군 제11전투비행단은 2002년 9월 17일 신축한 종합교육장을 이근석관으로 명명하여 고인(故人)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하늘의 軍神 이근석 장군

故 이근석 장군은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 청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하늘을 동경하여 17살이 되던 1933년 일본 '소년비행학교'에 입교,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비행기의 천재'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타고난 공군인이었다. 故 이근석 장군은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공군을 위해 정열을 불태웠으며, 공군창설 7인간부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故 이근석 장군은 49년 10월 공군이 독립되면서 공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6·25전쟁발발 당시에는 공군비행단장으로 재직하였다. 당시 한국 공군력이라고는 T-6, L-4 등 훈련기용 경비행기 몇 대와 국산수제폭탄이 고작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행단장이면서도 편대장이 되어 훈련기를 타고 남하하는 적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다. 조종사는 조종을 하고 폭탄을 껴안은 관측사가 손으로 폭탄을 던지는 원시적인 공중전이었다.

애국심과 용기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당시 공군 수뇌부는 美공군당국과 전투기 지원을 위한 담판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 美극동군사령부로부터 10대의 F-51(무스탕)을 지원받게 되었다. 이 때 李장군은 다른 9명의 조종사와 함께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로부터 전투기를 인수, 현해탄을 건너 대구비행장에 도착했다.

이때가 '50년 7월 2일.

적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 남방까지 침공하고 있었다. 그는 하루쯤의 휴식을 권유하는 주위의 배려를 물리치고 곧바로 비행훈련에 돌입, 7월 4일엔 편대장으로 처녀 출격에 나섰다.

수원-안양 상공에 이르자 최선두에 선 그는 저공으로 비행하며 적 탱크를 공격하였고, 편대원들은 그를 따라 기총세례를 퍼부었다. 예기치 않은 공습으로 당황한 적에게 용맹스럽게 근접 공격을 가하던 그의 편대는 수원을 지나 안양, 시흥 상공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때 가도에는 20여대의 탱크를 앞세운 5천여명 규모의 적군이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불과 750피트의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로켓탄을 발사, 적탱크를 괴멸시켜 나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애기(愛機)가 북한군의 총탄을 맞고 화염에 휩싸이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고 마지막 상승을 시도한 그는 탈출보다 죽음을 결심하고 기수를 내려 앞에 보이는 적 5번 탱크를 향해 돌진, 탱크를 폭파시키고 장렬히 산화했다. '조국을 위하여 무명의 초석이 되리라'...평소 부하들에게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그 말을 몸소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34세 되던 1950년 7월 4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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