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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종로구 평동 108-1번지의 경교장 전경. 김구는 2층 왼쪽 방에서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졌다.
ⓒ 권기봉
주먹이 먼저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학급 친구와 별 것 아닌 문제로 실랑이를 벌일 때가 있었다.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다느니 하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주먹다짐으로까지 상황이 확대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둘 중 하나는 코피를 흘려 우열을 판가름하든지 담임 선생에게 들켜 며칠은 벌을 섰어야 했다. 그러다가 채 코피가 마르기도 전에 혹은 선생님이 내린 벌칙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무슨 일로 싸웠는지 잊어버리기가 다반사. 이렇게 말하면 맨날 싸움이나 하고 다녔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저 지나간 추억일 뿐 인간적인 배반감이나 모멸감 같은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악감정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맞을지도 모르면서 왜 맨날 이리저리 주먹을 날려댔던 것일까?

아마도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시기에 이성적인 대화로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던 나머지, 아니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던 어린 마음에 일단 '욱'하는 심정으로 주먹질 발길질이 먼저 나가지 않았나 싶다. 누가 뭐래도, 말로 안 되면 주먹이 먼저 나가던 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코흘리개의 주먹 날리기가 비단 어린 청춘들의 경우만은 아닌가 보다. 우리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치적 상대와의 열띤 토론이나 이성을 전제로 한 대화보다는 이른바 정치 깡패를 동원한 원천 봉쇄와 파괴, 머릿수를 무기로 한 날치기 등이 더 많이 보이니 말이다.

선진국 시민은 어떻다느니 하며 사이 좋게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은 그들이지만 막상 후진국의 본때를 어김없이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총을 쏘아 정치적 상대자를 제거하는 일도 있었으니 한 예로 1949년의 서울.

성인도 때론 코흘리개식 주먹질을 한다?

탕! 탕! 탕! 탕!
지금으로부터 꼭 54년 전인 1949년 6월 26일 정오를 조금 넘긴 12시 45분, 초여름 햇살이 강한 일요일, 네 발의 총성이 종로구 평동 경교장(京橋莊) 2층 침실의 정적을 깼다. 기나긴 타국 생활을 끝내고 1945년 11월 23일 환국한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머리를 책상 위에 얹고 손은 탁자 모퉁이를 쥔 채 쓰러진 것이다. 향년 74세.

▲ 현재 강북삼성병원에 있는 경교장은 외벽만 이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을 뿐 내부는 상당 부분 변했다.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일각에서는 국보 추진 운동도 벌이고 있다.
ⓒ 권기봉
김구가 중국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이미 국내 정정(政情)은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일제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으로 두 손 들고 항복했다지만 한반도에서는 그 어떤 실질적인 해방의 기운을 느낄 겨를도 없이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 군정을 실시하는 한편 자기 세력 심기에 골몰했다.

이는 해방 전인 1943년 11월 연합국 대표들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한반도의 독립을 약속한 것에 배치되는 행위였다. 심지어 1945년 12월 17일 모스크바에서 날아든 미국과 영국, 소련 3국의 외상(外相) 회의 소식은 국내 여론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당사자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된 것이다. 이를 두고 국내 여론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결과적으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편에, 박헌영(朴憲永) 등의 공산 계열은 신탁에 찬성하는 쪽에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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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프로그램 참가 접수 중

‘경교장복원범국민추진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는 오는 8월 1일부터 12일까지 <회상!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유적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총 5410km를 답사하는 이 프로그램은 상하이는 물론 항저우와 난징, 충칭 등을 돌아보는 것으로 상하이 임정 유적을 출발, 중국 내에서의 임정 이동 경로를 따라 이동할 예정이다.

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 참가 비용은 1인당 95만원이며, 오는 7월 5일까지 참가 신청을 받는다. 신청은 위원회 인터넷 사이트(www.kyungkyojang.or.kr)으로 가능하며, 문의는 02) 2268-6114로 하면 된다.

한편 위원회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하면 경교장에 대한 각종 자료는 물론, 김구에 대한 사진과 동영상 자료를 볼 수 있다. / 권기봉
환국한 지 채 한 달도 안되어 날아든 신탁통치 소식에 잠시라도 쉴 겨를이 없었을 김구. 오늘은 그의 자취를 찾아 길을 나선다.

장마 전선이 북상한다더니 이른 새벽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김구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서울 하늘은 이랬으리라. 지하철 5호선 광화문 역에서 내려 서대문 쪽으로 걸어가는 길은 그런 대로 한산한 편이다. 신촌에서 넘어오는 자동차들이 매캐한 매연을 연신 내뿜고는 있지만 보도는 한산하기만 하다. 지난 해 6월 이곳을 메웠던 군중들이 물론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서 있는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망치질 하는 사람>이 오늘따라 왜 저렇게 애처로운 걸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자리에 서서 계속 망치질을 해대야 하는 운명.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항상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해야 하는 운명. 오늘 찾아가는 이의 운명이 <망치질하는 사람>의 그것과 얼마나 달랐을까?

광화문역과 서대문역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정동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가 나오면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여기 서서 정동길이 시작되는 곳 반대편을 보면 언덕 위로 강북삼성병원이 보인다.

바로 여기다. 한때 시대의 부름을 받아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듯했으나 인간이란 존재의 편협함으로 인해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던 이, 김구. 그가 27년만에 머나먼 타국 생활을 끝내고 김포 비행장에 도착, 조국의 산하조차 제대로 내다보기 힘든 갑갑한 장갑 차량을 타고 도착한 곳이 이곳이었고 예정에도 없던 총탄에 쓰러진 곳도 바로 이곳이다.

병원으로 바뀐 경교장

경교장의 원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이곳이 다케조에마치, 이른바 죽첨정(竹添町)이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하는데, 김구가 이 양옥에 오면서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경교장으로 고쳤다고 한다. 근처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개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이 집은 김구와는 코드가 전혀 다른, 이른바 친일파의 집이었다. 금광 갑부로 더 잘 알려진 최창학(崔昌學)이 1938년(착공은 1936년) 1584평의 대지에 연건평 264평 규모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 양옥으로, 경성제대 본관 건물을 설계한 김세연(해방 후 대한건축학회 초대 회장을 지냄)이 설계한 건물이다.

해방이 되자 최창학이 자신의 친일 행각을 각색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뉘우친 것인지 모르나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 이 건물을 넘기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김구 일행이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좌우 완전 대치 모양을 한 이 건물은 2층의 아치 5개를 중심으로, 양쪽에 돌출된 창을 내 깔끔하면서도 다감한 맛을 풍긴다. 그런데 지금이야 외벽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지만 과연 김구가 생활할 당시의 경교장 내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김구의 수행 비서로 함께 환국한 장준하(張俊河)의 말을 들어보자.

“경교장 이층의 구조는 동서로 긴 복도가 한가운데 있고 그 복도 양 옆에 방이 있었다. 남향한 방의 첫 방이 백범 선생의 거실이었고 왼쪽 맨 끝 방이 응접실이었으며, 그 사이에는 일본식 다다미방이 둘이나 있었다.”(장준하, 돌베개, 세계사, 2001, p. 377)

한때 이승만(李承晩)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돈암장(敦岩莊), 그리고 김규식(金奎植)이 지내던 삼청장(三淸莊)과 더불어 우익 인사들의 행동 근거지였던 경교장. 지금이야 알아주는 이 하나 없다지만 1945년 12월 29일 오후 2시에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각 정당 및 단체 대표들이 모여 반탁 운동 방안에 대해 논의, 신탁 반대 운동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반탁 운동 진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장소가 경교장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2003년 장마를 앞둔 경교장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김구가 떠나간 이후 대만 대사 관저로 쓰이다가 한국 전쟁 당시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휴전 이후에는 베트남 대사 관저로 사용되다가 1967년 고려병원과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차츰 김구 생존 당시의 모습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금의 경교장 1층은 병원 원무과와 약국 등으로 쓰이고 있고, 건물 자체가 9층짜리 병원 빌딩과 내부가 뚫려 연결된 상태이다. 뿐만 아니라 김구가 현역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 당한 2층 침실 역시 원래의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공동대표 정대철, 이부영 외)’ 등의 노력으로 지난 2001년 4월 6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긴 했지만, 그저 ‘이 곳이 김구 선생이 지냈던 곳’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한 정도이지 더 이상의 그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김구는 가고 없다. 그러나…

김구는 가고 없다. 그러나 다시금 역사책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끄집어내는 일이 그와 같은 정치인을 지키지 못했던 우리의 업보일는지 모른다.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는 것은 일제의 유산을 정리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신탁을 실시한 미군정은 남한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제한다는 미명하에 관료와 경찰, 군인 등 일제의 앞잡이로 활동했던 이를 대거 재기용했고 나아가 문화와 교육, 언론 등 사회 각 분야에 남아 있는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화려한 재기를 가능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까지 나서서 친일 세력을 중용,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에 위기를 몰고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일 평생 반일·항일의 뜻을 견지해온 그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이런 비상식적이고 어이없는 일이 어디 가능이나 했을까?

그 정도의 정치적인 신망을 가진 이가 혼탁했던 해방 정국에서 사라지지 않고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속절없는 상상을 해본다.

나아가 김구가 한 시대를 풍미하다 혼연히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누가 나서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타개할 만한 세력이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제1차 대북 접촉이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지도자간 회담이라는 것이 단 한 차례로 결실을 맺기 힘든 것이 사실이고, 이미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당시 수많은 이념적 갈등을 경험했던 그였기에 추후 생산적인 방향으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김구를 두고 그저 황소같이 고집만 센 우익이라든가 분단 현실을 지나치게 순진하게 파악한 나머지 현실적인 접근에 실패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나만 있고 너는 없는 정치’ 나아가 ‘나의 승진과 연봉 인상’이 최고 화제가 되는 현실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추진해 나갔던 이가 있었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새벽부터 망치질을 해대던 거대한 조각상은 해가 중천인데도 망치질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과연 그는 무엇을 위해 망치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 망치질을 끝낼 때쯤 이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중충한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망치질을 하고 있는 검은 조각상에 그의 모습을 투영해 본다.

총으로 흥한 자, 방망이로 망한다
김구를 죽인 안두희, 그 후 어떻게 되었나?

▲ 김구 선생 묘소를 찾은 안두희. 그러나 진상은 밝히지 않았다. 1992년

김구가 세상을 떠난 직접적인 동기는 안두희에 의한 총격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거물 정치인을 암살한 안두희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안두희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거쳐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일한 바 있는 우익 인물로, 이때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트게 되었다. 이후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 장교의 길을 걷게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함으로써 김구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즉 그가 김구를 암살할 당시 서로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던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5분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가 살해한 안두희는, 그러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현역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장 특무대에 연행, 같은 해 8월 6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석 달 후 15년형으로 감형된 데 이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특명4호로 남은 형기에 대한 집행 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 소위로 복귀한다.

게다가 1951년 들어 잔형을 아예 면제받고 대위로 예편되고 1953년 2월 15일 완전 복권되는 등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엿보인다. 당대 내노라 하는 거물급 정치인을 대낮에 살해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육군 장교로 복귀한 데 이어 복권까지 되었으니 뭔가 음모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신문기자와 역사학자,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 국회 등의 노력으로 안두희의 배후에 김지웅과 홍종만 등이 있고 이어 김창룡 등의 일제 군부가 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일각에서는 대통령 이승만과 미국을 배후로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두희가 명확한 이야기를 남기고 죽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의혹에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안두희는 어떻게 죽었을까?

1953년 완전 복권된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운영하다가 4.19 이후 여론의 압박에 밀려 잠적한다. 그러나 1961년 서울 종로에서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의 추적 끝에 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불구속 수사 끝에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백범독서회장 곽태영의 칼에 목을 찔리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하려던 계획도 성사되지 못하고 안영준이라는 가명을 이용해가며 은신했으나, 1992년 2월 28일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들켜 몽둥이질을 당하면서 다시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 3월의 일이다.

이후 1991년과 1993년 등 권중희에 의해 여러 차례 응징을 당했는데, 이 때 암살 배후에 대한 일부 자백과 함께 김구 묘소를 강제 참배했다.

1994년 국회 법사위 백범김구선생암살진상조사소위원회에 증인으로 나와 조사를 받았으나 배후를 밝히지는 않았던 그이지만, 그의 생은 여기까지였다. 2년 뒤인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역사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권중희 作)를 읽고 ‘정의봉’이라고 쓰여진 방망이를 갖고 찾아온 박기서에게 맞아 죽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일이다.

김구는 현재 효창 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어 있고, 지난 1962년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 권기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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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