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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그런지 광릉수목원의 풀 냄새는 더욱 향긋하였다. 쭉쭉 뻗은 전나무는 하늘을 덮어 한 낮인데도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런 곳에 세조의 능 광릉이 있고 수목원 길이 끝나는 곳에 봉선사가 있다.

▲ 봉선사에는 어린이집,유치원,합창단 등 우리의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조직이 여럿있다.
ⓒ 김정봉
수목원 길은 포천-산정호수 길과 퇴계원-일동 길을 잇는 아름다운 길이다. 양옆에는 전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너머로 조그만 냇물이 흐른다. '산과 산들이 얘기하고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다. 큰산을 넘는 지름길도 있고 최근에 새로 난 길도 있지만 의정부 쪽에서 일동 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이 길을 택하곤 한다.

수목원 길 끄트머리, 상가가 밀집한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봉선사 길도 이런 길의 연장이다. 지금은 절 입구에 대형 주차장이 생겨 걷는 길이 짧아지긴 했어도 주차장에서 절 입구까지 걷는 길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거기에 비라도 내려 주면 '향긋한 풀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나는 길이요, 군데군데 손바닥만한 논과 연꽃 실은 연못이 있어 풍치가 있는 길이다.

▲ 설법전/신도들의 '조약돌모으기 운동으로 1985년에 건립되었다
ⓒ 김정봉
길옆에는 여기에 있을 법하지 않은 유치원이 있는데 이름이 '연꽃유치원'으로 봉선사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해준다. 유치원과 더불어 설법전 옆에 예쁘게 걸린 '봉선사어머니합창단' 현판은 봉선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입구에 닿으면 500년 된 느티나무와 설법전 누각이 점잖게 서있어 제법 운치가 있다. 설법전은 누각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상층은 누마루형 마루방으로 당사는 물론 각계의 대형법회에 쓰인다. 언뜻 보기에는 지리산 화엄사의 각황전 2층만 잘라서 보는 것 같다.

▲ 방적당/발걸음을 좀 자유롭게 놓아 둔다는 뜻으로 더 나은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다
ⓒ 김정봉
설법전을 빠져 나와 몇 단의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방적당이 있다. 방적이라, 이름도 참 생소하다. 방적이라 함은 발걸음을 좀 자유롭게 놓아둔다는 뜻이다. 방적당은 스님들이 첫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다듬는 곳이다. 이 건물 마루에서 한담을 나누는 분들은 방적의 단계를 지난 분들처럼 자유롭고 평화롭게 보인다.

▲ 큰법당 현판/운허스님의 불교 대중화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 김정봉
이 절의 하이라이트는 대웅전 현판이다. '대웅전' 대신 '큰법당'이라니‥. 나와 함께 간 큰아이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저 간판이 왜 저래요?" 하면서 놀란다. 책에서만 보고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 아찔한 심정. 파격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넘쳐 난다.

큰 법당은 1970년 운허스님이 복원하고 편액은 스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하였는데 편액을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법당'이란 한 것은 스님의 불교대중화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 큰법당/큰법당은 대웅전을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표기한 절은 여기가 유일하다
ⓒ 김정봉
큰 법당 뒤로 돌아가면 예쁜 돌계단으로 이어진 언덕에 삼성각과 조사전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각은 1926년 주지 월초(月初) 화상이 처음 지은 것인데 6·25사변에 타지 않고 남은 유일한 법당이다. 좌우에 산신정, 독성정이, 중앙에는 북두정이 있다.

조사전은 1977년 삼성각과 꼭 같은 규모로 지어서 계민선사와 월초스님을 비롯한 근대의 봉선사 조사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당우이다. 맞배지붕을 하여 간결하면서 옹골져 보인다.

▲ 삼성각/큰법당 뒤 언덕에 예쁘게 자리하고 있다
ⓒ 김정봉
방적당을 왼쪽으로 보고 밑으로 내려가면 봉선사가 자랑하는 범종이 있다. 조선 예종 1년(1469)에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선왕실에서 주조한 것으로 현재 사용하는 것으로는 제일 오래된 것이다. 6.25로 사찰 전체가 전소될 때 삼성각과 함께 남은 유일한 문화재이다.

애초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해 운악사라 불리었는데 조선 예종 1년(1469),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웠다.

▲ 조사전/맞배지붕에 간결하면서 옹골지다
ⓒ 김정봉
절의 이름도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라 하여 봉선사라 하고 예종은 봉선사 친필 현판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거듭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평생 마음 편히 살지 못했을 것이고 게다가 피부병을 얻고 고생할 때는 자신의 업보라 자학했을 게다. 이를 지켜본 정희왕후는 영혼이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봉선사에 정성을 다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봉선사를 서둘러 보고픈 맘에 그냥 지나친 부도 밭에는 특이하게도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춘원과 봉선사라. 무슨 연유가 있어 여기에 기념비를 세웠을까?

봉선사를 말할 때 운허스님을 빼놓을 수 없는데 운허스님은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항일투사요, 종교인으로서는 불경의 번역가로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 범종/현재 사용하는 종중에 가장 오래된 종이다
ⓒ 김정봉
이런 운허스님은 춘원과는 6촌간이고 춘원이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의 죽음으로 괴로워할 때 춘원을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고 따뜻이 위로해 주었다.

해방 후, 운허스님은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반면 춘원은 변절자의 신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만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춘원의 입산을 위해 방 하나를 내주었고 춘원은 여기에서 죄인의 심경으로 기거하게 된다.

그 방 이름을 '다경향실'이라 했는데 지금은 이 방은 헐리고 새로 지은 '다경향실'이 방적당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몇몇 지인들이 기념비를 세워 춘원과 봉선사와의 연을 기리고 있다.

나란히 서 있는 춘원의 기념비와 운허스님의 부도를 보면서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세조의 능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역사적인 삶인가 생각해 본다. 찰나 같은 인생의 물결은 억겁 속으로 흘러 살아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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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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