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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을 고무판으로 덮은 결정지에서 증발시켜 염도가 23% 이상이 되면 비로소 '소금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이 결정들이 서로 뭉쳐서 소금이 된다.
ⓒ 오창석
흔히들 식량이 부족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해지지만 소금에 대한 걱정은 별로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소금은 우리들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식량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이다.

다만 그것이 시끄럽게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공기와 마찬가지로 희소가치를 상실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수입, 지출의 밸런스를 맞추려다 보면 항상 허덕이게 마련인 대다수의 샐러리맨들에겐 ‘짜게’사는 것이 생존의 비법이기 마련일 것인데, 이른바 그 '샐러리맨'의 어원이 '소금(salt)'이다 보니 남이야 비웃건 말 건 '짠돌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샐러리맨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로마의 병사들은 임금의 일부로 소금이나 살라리움(salarium 소금 배급 혹은 소금을 사기 위한 돈)을 받았고, 이것이 샐러리맨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소금은 단순히 음식의 간을 맞추는 조미료라기보다는 목숨 그 자체이고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기도 하였다.

▲ 소금꽃
ⓒ 오창석
사람의 몸 속에는 100그램의 소금이 있는데 하루 평균 12∼13g을 섭취해야 하고 이를 며칠이라도 거르게 되면 몸과 정신이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소금이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잇속에 밝은 장사들은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국가는 세금을 걷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수상도시로 유명한 베네치아는 염전 위에 세워진 도시로, 소금생산에 기반을 둔 무역을 통해 지중해를 지배했고,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바닷가에서 한줌의 소금을 주워든(소금은 우리 것이다!) 간디의 ‘소금행진’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도 소금이 귀한 존재임은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만주의 여진족은 우리의 장수와 병사들을 잡아다가 인질로 삼고 소금을 요구하였고, 조선후기 삼수갑산으로 복무하러 간 군사들은 소금을 가지고 들어가 군대생활의 비용으로 썼다.

바닷가에서 원시생활의 유적이 발견되는 것도 소금의 필요와 무관하지 않은데 내륙으로 이동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소금의 조달문제가 정착 여부를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다.

▲ 눈처럼 새하얀 소금이 쌓여 있는 창고
ⓒ 오창석
바닷가에서 떨어진 산중에서는 소금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 소금을 등에 진 소금장수들이 보급하였는데 몇 마을을 거치며 팔아버리고 나면 산골에는 차례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꾀를 내어 과부나 처녀를 소금장수와 혼인시켜 마을에 살림을 차려 주고 찾아오게 함으로써 소금 공급을 받을 수 있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생존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굳이 동네처녀나 과부를 바치지 않아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절이 되어 소금장수로 나서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소금산업은 정책적으로 염전을 줄여 나가는 사양산업이 되어버렸다.

천일염 이전의 소금 생산은 바닷물을 토기나 가마솥에 끓여 만든 화렴(火鹽)이었다. 이 땅에서 최초의 천일염 생산은 1907년 인천에서 비롯되었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이 적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모두 매립되어 도시가 형성됨으로서 옛모습을 찾기 어렵게 됐지만 당시 인천의 ‘주안염전’은 일본 학교 지리교과서와 세계지도에까지 표시되는 큰 염전이었다고 한다.

소금의 생산지를 찾아가는 길은 괭이를 맨 화전민이 산속을 찾아가는 것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염전은 대부분 후진 바닷가나 황량한 섬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최상질의 천일염 생산지로 꼽히는 신안군 임자도 염전.
ⓒ 오창석
우리 나라 서해안 지방에는 많은 천일염전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수많은 섬이 모여 이루어진 신안군은 최다, 최상질의 천일염 생산지역이다.

그 중 임자도는 해방 직후 염전이 들어선 곳인데 대개의 염전들이 그렇듯 농사짓는 것만 보았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비친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양파밭 사이로 난 좁은 길들은 소금기를 머금은 회색 빛이고 마치 개척시대의 미국의 서부에 온 것 같은 황량감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값싼 중국산에 밀려 일손을 놓아버린 염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풍경은 오뉴월 뙤약볕 아래서도 되려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천일염전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일정시간 불순물을 침전시키고 증발시켜 23%정도까지 염도를 올리는‘증발지'와 최종적으로 결정을 만들어 걷어들이는 '결정지'로 나뉜다.

천일염의 생산시기는 4월에서 10월까지인데 대개는 장마가 들기 전인 5∼6월까지 60% 정도가 생산된다. 바닷물을 끌어들인 시점으로부터 9~11일 정도가 지나면 최초의 소금결정이 생겨나는데 그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소금 떴다’라고 하며 써래처럼 생긴 '대패'로 그것을 밀어 소금을 걷어낸다.

▲ 결정지에서 고무래질로 소금을 걷고 있다.
ⓒ 오창석
임자도의 '면염전'이라 부르는 곳에서 박만연(66)씨를 만났다. "배운 것이라고는 이짓 밖에 없어" 도시계획으로 인천의 염전이 매립되자 이곳으로 옮겨 40년이 되었다는 절망에 찬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고 잦아 들어갔다.

그래도 "소금 안 묵으면 창새기(창자) 털난께, 많이 묵어! 신안소금이 전국 제일 아닌감?"하면서 자랑을 빠트리지 않는다.

고단한 삶의 내력이 꾸깃꾸깃한 얼굴의 주름이며 쪼그라진 몸에 소금기처럼 배어 있지만 소금을 퍼주는 인심 만큼은 후하기 그지없다.

한때 쌀, 면화와 함께 '삼백(三白)'으로 유명한 신안 지역의 소금이 면화처럼 자취를 감추게 되지나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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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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