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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으러 미국 가지 않겠다"

▲ <한겨레> 14일자 장봉군 화백의 만평. ⓒ 뉴스툰
전통적으로 '맹방'을 강조해온 미국에 대해 한국의 대통령 후보가 이같은 말을 대선 기간에 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혹자는 한국의 상황에서 저러고도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 한 마디에 보수진영에선 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김정일에게 나라를 들어 바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우방' 미국에 대해 배은망덕한 처사라고 비판해댔다.

반면 진보진영과 젊은층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여태 한국 대통령 후보나 대통령 입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얘기를 듣고는 이제야 미국에 대해 굽실거리지 않는 대통령을 구경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다들 들떴다.

당시 노 후보의 이같은 폭탄성명과 같은 발언은 찬반을 떠나 평소 그가 보인 자세에서 이해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평소 미국에 대해서도 대등한 자세의 외교노선을 강조해 왔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에 대해서도 할말은 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13일) 태평양 건너 멀리 미국에서 전해온 그의 말 한 마디는 이같은 인식을 일거에 불식시키고도 남을만 하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12일 저녁(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피에르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최 만찬에서 노 대통령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과 북한의 핵보유 불용 의지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두 가지 사안은 이번 정상회담의 현안인 만큼 이를 강조한 것을 두고 토를 달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발언 내용이다.

노 대통령은 "제가 여러 차례 같은 약속을 반복해도 아직 저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다시 이 자리에서 아주 간단하게 표현해 보겠다"며 "만약 53년전 미국이 우리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발언은 원고에 없던 내용이라고 한다.

간단하게 풀이하자면 1950년 6.25전쟁 때 미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남한은 적화됐고, 그렇게 됐다면 노 대통령 자신은 공산정권에 맞서 싸우다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됐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전쟁 때 미군이 도와 남한의 적화를 막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뒷 부분은 분명한 '가정'이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이면 다 알만한 역사적 사실을 새삼 언급한 것도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다분히 지나친 '아부성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발언 뒷부분이다. 미국인들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평소 미국에 대해 '당당한 자세'를 주장해온 그가 가정법을 써가면서까지 이렇게 궁색한 설명을 해댄 것은 참으로 보기가 안쓰럽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자리에 참석한 미국인들조차 이같은 발언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지 않을까 싶다.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얼떨결에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먹고 한 발언이라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방미에 앞서 지난 9일 국회 통외통위 소속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가진 만찬에서 이미 그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결국 노 대통령은 어느 시점부터 '변화된 대미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그가 '촛불시위 자제'를 외칠 때부터 그런 기미가 보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진짜 문제는 노 대통령의 이같은 돌출발언 '이후'다.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해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간 그가 또 하나의 상대랄 수 있는 북한을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한 것은 결코 슬기로운 처사였다고 보기 어렵다. '햇볕정책'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힌 그가 미국에 가서 마치 북한체제 비방을 통해 미국에 대해 '나 이뻐?'식으로 나온 것은 마치 북한과는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북핵 문제를 놓고 미국과 북한간의 갈등을 말리고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마치 기름에 불을 붓는 발언을 쏟아냈으니 대체 문제를 풀러 간건지 아니면 취임 인사차 미국에 잘보이러 간건지 도무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어느 때부턴가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극단적, 정파적 반대파들의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국가원수로서 해야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빈말이 아닌 듯 싶다. 이제 노 대통령의 발언은 '화법'이 아니라 '내용과 자세'에 새삼 논란의 초점이 모아질 것 같다.

<오마이뉴스>에 그의 발언 내용이 보도된 후 한 네티즌은 댓글에서 "내 손가락을 짤라버리고 싶다"고 적었다. 최근 들어 본격화된 노 대통령 지지층의 이탈현상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처음의 기대가 점차 실망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국민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대통령을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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