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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덕수궁(德壽宮)이라고 하면 시청 앞의 대한문 쪽으로 들어가는 궁궐을 떠올리게 되지만 한때 덕수궁의 권역은 언덕 너머 서대문 방향의 경희궁(慶熙宮)으로 죽 이어지는 곳까지 미치고 있었다.

현재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덕수궁의 지정면적이 미처 2만 평을 넘기지 못하지만, 원래 덕수궁 권역이었던 '정동 1번지' 일대를 몽땅 합친다면 그 면적은 4만 평을 훌쩍 넘긴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 <경성일필매지형명세도>에 표시된 정동 일대의 현황이다. 붉은 표시는 선원전과 사성당이 있던 '정동 1-24번지'(즉 지금의 미국부대사관저)이고, 파란 표시는 흥덕전과 흥복전이 있던 '정동 1-8번지 일대'(즉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이며, 검은 표시는 의효전이 자리하던 '정동 1-6번지'(즉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이다. 그리고 위쪽의 분홍표시는 영성문이다.
그러했던 것이 어쩌다가 덕수궁은 이토록 쪼그라든 몰골로만 남은 것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복잡할 것도 없어 보인다. 덕수궁의 영역을 한껏 확장한 것이 고종임금의 뜻이었다면, 그러한 궁궐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 역시 고종의 죽음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인을 잃어버린 궁궐의 운명이란 것은 이미 거기에서 절반쯤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식민통치자들의 속내가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라면 궁궐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매일신보> 1920년 1월 19일자에는 '덕수궁의 처분문제'에 대해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이왕직차관(李王職次官)이 그 입장을 표명한 내용이 하나 수록되어 있다.

▲ 신문로1가 세안빌딩 쪽에서 덕수궁 안길로 들어서는 곳에 영성문(永成門)이 있었다. 진입금지 표지판이 서있는 곳이 영성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 너머에 보이는 4층건물이 '덕수초등학교'이고, 그 오른쪽으로 담장만 살짝 보이는 곳이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이다.
ⓒ 이순우
"덕수궁은 현재대로 영구히 보존하는 외에 달리 처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일년제가 마치시면 차차로 세상에 문제가 되겠는데 장래 총독부가 경복궁 안으로 옮기게 되면 태평통은 경성전시의 중심점이 되어 덕수궁도 물론 그 요지가 되겠는데, 어떻든지 경성시중 뛰어난 곳의 토지를 일만 팔천 평이나 되는대로 놀려두기는 경성번영상에도 심히 유감천만인 듯하오. 건물 정원 등의 보존비도 연연히 막대한 숫자를 나타내는 바 결국 장래는 궁안의 한쪽 필요한 건물 있는 지역을 젖혀놓고 다른 것은 떼어내어 민가를 세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궁안에 있는 이조역대의 초상을 모신 선원전은 당연히 창덕궁에 옮기려고 불원에 이전할 차로 창덕궁 안에 그 기지를 선정하는 중이오 또 이왕전하의 웃대를 제사지내는 의효전도 창덕궁에 옮기기로 되었는데, 이 건물을 이왕가에는 필요한 건물로서 기타 이, 삼은 반드시 둘 건물이 있고 석조전 같은 굉장웅대한 건물은 이것을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그대로 무엇에든지 쓰겠지요.

또 이같이 필요치 않은 부분은 떼어내어 장사하는 집이 세워지게 되면 경성의 번영상 진실로 기꺼운 일인즉 좋기는 좋으나 아직 이런 의논을 전혀 없고 혹 한, 두 사람의 조선인이 거짓말을 전파한 덕수궁 불하문제가 아주 성가시게 되었는데 전혀 형적도 없는 일이나 어떻든지 일주년제가 마치면 무슨 의론이 있겠지요."


이때가 바로 고종임금이 승하한 지 겨우 1년을 넘기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덕수궁의 선원전에 모셔진 역대국왕의 어진들은 1920년 2월 16일에 창덕궁의 선원전으로 모두 옮겨졌고, 그 직후 영성문(永成門) 안쪽의 선원전 일대를 두루 헐어내는 공사가 진행된 바 있었다. 이른바 '영성문 대궐'이라고 부르던 선원전 권역은 그 무렵부터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들어갔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윤치호일기> 1919년 11월 22일자에는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과 (이왕직찬시를 지낸) 윤덕영이 덕수궁 즉 고종황제의 궁궐과 영성문 안쪽의 인근 부지를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고 하여,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거다"라고 적어놓은 대목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 덕수궁의 해체작업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착착 진행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 운동장이 보이는 곳이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이고, 그 너머로 언덕진 곳이 미국대사관 부대사관저 지역이다.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직원아파트를 짓는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선원전 옆에 있던 흥덕전(興德殿)의 전각은 창덕궁의 외전 행각을 보충하는데 쓰겠다고 1919년 겨울에 벌써 그곳으로 헐어내 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렇게 진작에 덕수궁, 특히 선원전 권역은 해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동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개수(改修)된 것도 바로 1920년 여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에는 아주 특이한 기록이 하나 보인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된 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운운."

여기에는 선원전이 있던 쪽에 난데없이 '절'이 들어섰다고 적혀 있다. 이에 관한 소상한 기록이 없으니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불과 1년 전까지 궁궐이었던 곳에 어찌 절이 들어설 수 있는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절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또 언제까지 존속한 것인지 정말 궁금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를 확인할 만한 단서는 잘 보이질 않으니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 <대경성사진첩>에 수록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왼쪽)와 '덕수공립보통학교'(오른쪽) 시절의 전경이다. 덕수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기 이전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였다. 이들 학교가 정동지역에 이전한 것은 1922년이었다.
그런데 선원전 권역의 해체를 촉진했던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이곳이 학교부지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원래 흥덕전(興德殿)과 흥복전(興福殿)이 있던 지역에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들어섰고, 신작로 건너편의 의효전(懿孝殿)이 있던 곳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1922년 봄이었다.

원래 남산동 2가 2번지 즉 지금의 남산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공립고등여학교'가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라는 이름으로 고쳐 정동으로 이전해 온 것이 1922년 5월 13일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 1922년 11월호에 간략한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여기에는 "1921년 9월에 기공하여 이듬해 3월에 전부 준성(竣成)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부지는 1921년에 매수면적 2418평 7합 이외에 총독부가 양여한 것으로 15평이 있었고, 1922년에는 다시 인접지 1063평 2합을 매수하여 합계 3496평 9합에 달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말하자면 1921년과 1922년에 매수한 부지는 '정동 1-8, 1-13, 1-14, 1-15번지'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자리는 해방 이후에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일이었을 뿐이지 그 이전에는 두 학교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를테면 정동 1-8번지에는 일제시대를 통틀어 줄곧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 <매일신보> 1926년 5월 23일자에 보도된 덕수궁의 은행나무. 1926년 12월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의 뒤편 언덕에 '경성방송국'(정동 2번지)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 자리에 큰 은행나무가 걸리적거리자 이를 '베어버리자, 돈이 들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기자'하는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은행나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와는 달리 길 건너편의 덕수초등학교 쪽은 그 연혁이 좀 더 복잡하다. 원래 서대문 밖 충정로1가 34번지에 있던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정동 1-6번지'로 옮겨온 것이 1922년 4월 12일이었다. 그러니까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동 지역으로 진입한 것이라고 보면 될 듯싶다.

그런데 이 학교는 1935년 봄부터 남녀공학으로 변경되는 동시에 '덕수공립보통학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학교 이름에 '덕수'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에 앞서 인근의 서소문로 76번지에 있던 '정동공립보통학교'와 합병이 시도된 흔적이 여러 군데 보이긴 한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40년 4월 26일에는 화재발생으로 학교가 전소(全燒)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여하튼 지금의 덕수초등학교는 그러한 내력을 지녔다.

그렇다면 선원전과 사성당이 있던 '정동 1-24번지'는 어떻게 변했던 것일까? 1921년 무렵 그곳에 절이 들어섰다는 <동아일보> 보도기사가 있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내기가 좀체 쉽지 않다. 다만 약간 세월이 흐른 다음 1934년 12월 24일에 이르러 조선저축은행이 이 터를 인수하여 중역사택을 짓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이 지금의 미국대사관 부대사관저가 있는 곳이다.

<조선과 건축> 1938년 7월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정동 1-39번지 1333평의 대지"에 이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적혀 있다. 원래 선원전 구역은 '정동 1-24번지'인데다 그 면적도 4348평이나 되었던 것인데, 살펴 보건대 나중에 지번분할이 이루어졌고 그 일부에다 조선저축은행의 사택이 건축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런데 이 구역은 어쩌다가 미국대사관의 구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일까?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미군정 시절의 힘이 있었다. <서울신문> 1948년 9월 19일자에는 '한미행정이양협정에 의해 미국이 취득한 토지건물의 명세' 제하의 기사가 하나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정동지역과 관련된 사항만 추려보면 대충 이러했다.

"(가) 미군가족 주택 제20호 급 대지(138평) 정동 1의 39
(나) 러시아인 가옥 제1호(720평) 정동 1의 39
(다) 현재 미국영사관 서편 공지(1414평) 정동 1의 9
(라) 현재 미국영사관 남편 공지, 서울구락부에 이르기까지 현재 미국영사관 곁으로 통한 도로의 일부, 정동 8의 1, 8의 3, 8의 4, 8의 5, 8의 6, 8의 7, 8의 8, 8의 9, 8의 10 및 8의 17
(마) 미군가족 주택 제10호 급 러시아인 가옥 제1호 정동편에 있는 삼각지형 대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창고 1동, 가옥 3동 급 기타 건물(1675평) 정동 1의 39
(바) 전군정청 제2지구 전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약 43동의 가옥 급 기타 건물. 차는 차지역에 있는 식산은행 소유재산 전체를 포함한 정동 9의 1 전부, 사간동 96, 97의 2, 98, 99, 102, 103의 1, 104의 1, 급 104의 2 급 그 대지상의 기타 건물 약 9915평
(사) 반도호텔 급 그 동편에 연접한 주차장 1944평 을지로 18의 2."


이렇게 본다면 결국 선원전 자리가 있던 곳은 물론 미국공사관을 둘러싼 인근지역에 있던 예전의 덕수궁 자리가 광범위하게 통째로 미국대사관의 구역 안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그치질 않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가 재산교환의 형태로 미국대사관 측에 넘겨졌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지난 1986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또 이번에는 이 자리에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직원용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여 말썽이다. 그러고 보니 고종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해체된 덕수궁 즉 선원전 권역의 태반이 유독 미국대사관 측으로 몽땅 다 넘겨진 셈이다. 그것도 불과 6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말이다. 결국 덕수궁의 해체는 일제의 식민통치자들을 위한 것도 서울시민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미국대사관을 위한 일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 아닐까?

아, 영성문대궐(永成門大闕)의 운명(運命)이여!

<매일신보> 1920년 5월 11일자에는 '전대무주야초반(殿臺無主野草班)!! 영성문대궐(永成門大闕)의 운명(運命), 모래 한 알갱이도 주인을 생각하는 듯한 이 대궐! 이를 차마 어찌하나?'라는 제목이 나붙은 기사가 하나 들어 있다. 여기에는 선원전 일대가 헐어지는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전각과 출입문의 배치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다음은 그 기사의 전문이다.

이 대궐(大闕)은 십대왕(十大王)과 민비(閔妃)를 모시는 존엄한 대궐

영성문(永成門)대궐! 이 대궐은 어떠한 대궐인지를 우리가 생각하는가? 이 대궐 안에는 우리이조 역대제왕 가운데 칠대왕(七大王)과 영희전에 뫼시었던 삼대왕(三大王)과 창덕전하의 민비전하(閔妃殿下)의 높으신 사당을 뫼시고 친히 봉사하옵시던 존엄무비의 대궐이었다.

그러나 일한합병이 된 뒤로는 무슨 까닭으로 역대선왕께 봉사하는 전차까지도 폐하게 되었었는지? 십년 동안을 두고 오늘까지 이르도록 춘추봉사를 폐지하고 다만 해마다 새절기에 생기는 과실(果實)과 새곡식이 나면 그때마다 천신 차례나 행하여왔었다.

그러나 원래 소중한 대궐인고로 형식상으로 전사(典祀)와 수북 등의 직원은 두었었다. 그러나 이태왕 전하께옵서 승하하옵신 후로 일주년이 못되어 영성문대궐과 덕수궁(德壽宮) 일부를 민간에 불하하리라는 문제가 세상에 전하여 졌었다.

그러나 덕수궁의 일부를 불하한다는 말은 전혀 풍설이요. 다만 영성문대궐만 식산은행(殖産銀行) 사택지로 불하하였으나 이것도 필경은 양방이 해약함에 이르렀음으로 소위 양궁불하문제는 아주 없어지고 말았는데 이와 같이 사회의 일대문제거리가 되던 영성문대궐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되었는가?

무령(無靈)한 부월(斧鉞)이 피금전옥루(彼金殿玉樓)를 함부로 헐고 마나?

우리 민간의 사사집이라도 화려한 건물을 훼철하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좋지 못하여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인정인데 하물며 이와 같은 역사 있는 궁궐이리요. 영성문이라는 뚜렷한 액자가 걸린 숭엄한 삼문은 보기 싫은 널판조각으로 둘러막고 그 정문까지도 헐어 없애버리게 되었는데 요사이 수십명의 역부가 들어덤비여 영성문 안에 크나큰 전각을 날마다 훼철하여 모든 재목과 기와를 마차에 실어서 내이는 중이다.

그리하여 어소문(於昭門) 안에 태조(太祖)대왕, 숙종(肅宗)대왕, 영종(英宗)대왕, 정종(正宗)대왕, 순조(純祖)대왕, 익종(翼宗)대왕 일곱 분의 사당 뫼시었던 선원전(璿源殿)의 장엄한 전각도 모두 훼철하며 좌우 행각까지도 장차 훼철하겠으며 정안문(靜安門)을 들어서서 유정문(惟靖門) 안에 창덕궁 민비전하의 사당을 뫼신 의효전(懿孝殿)의 숭엄한 전각과 동행각과 재실까지 모두 훼철하였고 또는 홍대비(洪大妃) 전하와 민비 엄비 전하의 삼년상을 받들은 역사가 소여한 회안전(會安殿) 같은 곳까지도 순서대로 불일 훼철하겠으며 소안문(昭安門) 안에 흥덕전(興德殿)은 홍대비국상이 계시옵셨을 때에 빈전(殯殿)으로 불일 성지를 하여 지었던 전각으로 민비의 빈전으로도 지냈으며 또는 엄비 빈전도 되었던 역사 있는 전각인데 이 전각은 창덕궁에 조하는 외전(外殿) 행각을 건축하는데 보충하여 쓰려고 작년 겨울에 훼철하여 창덕궁으로 옮겨간 고로 흥덕전 자취는 벌써 쓸쓸한 바람에 잡초만 발이 빠지게 되었다.

창덕궁 북일영(昌德宮 北一營)에 신조(新造)되는 선원전(璿源殿) 십이실로 만든다

그러면 이와 같은 존엄한 궁궐은 왜? 그와 같이 훼철하여 화려하고 장엄하던 영성문대궐도 황량한 벌판이 되게 하는가? 본래 이 대궐에 뫼시었던 선원전과 의효전을 창덕궁 뒤편에 있는 북일영(北一營)에다가 옮기여 지으려고 그와 같이 모든 전각을 헐어서 창덕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북일영에 새로이 건축하는 선원전으로 말하면 본래 일곱 대왕의 존령을 뫼셨던 터임으로 칠실(七室)의 선원전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오실(五室)을 늘이여 십이실의 큰 전각을 건조하실 것인 고로 그와 같이 제일 큰 전각만 모조리 헐어가며 심어지 돌 한 개까지라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북일영으로 옮기여 가는 터이로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짓는 선원전 어찌하여 십이실로 변경을 하는가? 영희전대궐에서 영성문대궐 사성당(思誠堂)으로 이안하옵셨는 삼실은 북일영에 새로 짓는 선원전에 뫼실 터이며 나머지 이실은 당분간 비워 두었다가 승하하옵신 이태왕 전하의 존영을 뫼실 터이요 또 일실은 장차 앞날에 어찌 될는지? 혹시 창덕궁 전하께옵서 승하하옵시면 나머지 일실 듭시게 될는지? 이것은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바이다.

두견성 두견성(杜鵑聲 杜鵑聲)! 무량(荒凉)한 궁전(宮殿)의 적(跡), 뜰 아래 풀도 한을 머금어

아! 영성문대궐의 운명! 이후로부터는 우리가 날마다 배관하던 영성문이랑 숭엄한 궁궐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도다. 벌써 지금부터 그 대궐 안에는 처량스러운 봄풀만 푸르렀고 화려하던 궁궐은 모든 경색이 처참하게 되었도다.

전일 이태왕전하께옵서 생존하옵셔 완전한 다례를 하옵실 때에 친히 궁중을 납시여 덕수궁 후원을 넘으사 유녕문(由寧門) 어로를 통과하옵셔 며느님의 영존이 계신 의효전을 가끔 살피시고 백화가 난만한 화원과 그 외에 모든 화초를 기르는 온실과 기타 양어지(養魚池)를 친히 어람하시며 존엄하신 옥체를 머루르시던 곳은 몸이 파묻히는 망초가 슬픔에 매치인 듯하며 울울창창한 모든 녹음은 사랑하던 주인을 잃고 풀이 없이 늘어진 듯하도다.

그 중에도 전일 왕세자전하께옵서 수학하시던 수학원(修學院)의 건물은 반을 떼리여 어떤 서양인의 소유가 되어 시꺼먼 판장으로 막았으며 나머지 일부도 불일간 헐어 없앨 터인데 그 한편에는 테니스의 운동장을 닦느나고 법석을 하는 모양도 과연 한심하게 보이는데 유녕문 앞에 푸르러있는 은행나무(銀杏木)는 때마다 이태왕 전하의 용안을 지영하던 역사를 말하는 듯 하였다. 아, 영성문대궐의 무르녹은 녹음은 장차 누구를 위하여 길이 푸르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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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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