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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 8면에 실린 전태일의 분신 관련 기사. 오른쪽은 같은 날 <중앙일보>에 난 기사.
ⓒ 전태일의 집
“13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6가17 평화시장 앞길에서 시장 종업원 전태일(全泰一·23·성북구 쌍문동 23-8)군이 “노동청이 근로조건개선을 적극 협조해주지 않고 있다”고 분신자살을 기도, 중화상을 입고 성모병원에 입원 중 14일 새벽 숨졌다. (후략)” (주: 전태일의 한자 이름은 ‘全泰一’이 아니라 ‘全泰壹’이 맞으며, 주소도 ‘23-8’번지가 아니라 ‘208’번지다.)

지난 1970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 8면에 ‘시장 종업원 분신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실렸던 기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ADTOP1@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화되던 1970년 9월, 전태일은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이후 줄곧 서울시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 방송국, 신문사 등을 찾아가 여느 때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노동력 착취와 열악한 노동 환경 등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노력은 번번이 무시당하거나 당국자들의 그럴듯한 말로 물거품이 되기 일쑤였고, 전태일 등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도 열어서 여론을 환기시키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었다.

▲ 1968년경 중부시장에서 시다로 일할 때의 전태일(가운데). 20살이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맨 왼쪽은 어린 시다.
ⓒ 전태일의 집
평화시장에서 집회를 하기로 한 1970년 11월 13일, 이날 평화시장과 통일시장 등에서 일하는 5백여 명은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데모를 벌인다. 그러나 여느 노동자 집회가 그러했듯 역시 집회 시작 전부터 평화시장을 에워싼 경찰과 시장경비원들의 방해로 제대로 된 농성을 하기가 애초부터 힘들었다.

많은 이들이 구타를 당했고 준비해온 플래카드마저 경찰에 빼앗겼다. 이런 와중에 가지고 온 휘발유를 조용히 몸에 붓는 이가 있었으니 전태일. 그는 친구에게서 성냥을 빌려 불을 댕긴 후 이런 말을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내달린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결국 전태일은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바로 다음날 새벽 성모병원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23세.

신문도 팔고 삼발이도 팔았지만, 늘어가는 것은 빚 뿐

▲ 오는 5월 1일은 113주년을 맞는 노동절. 우리에게 있어 ‘노동절’은 무엇이고 ‘평화시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권기봉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한 마수를 차차 드러내기 시작하던 1960년대 말 노동자들의 처지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재벌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데는 열심이었던 반면 노동자들의 최저 생활 보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중소 자본가들 역시 대다수는 그와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원래부터 살기 힘들기도 했지만 가면 갈수록 빚만 늘어가는 등 점점 더 생활환경이 열악해져만 가는 도시 빈민층이나 농촌 젊은이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서울로, 서울로' 몰려갔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 대우가 변변치 않은 것들이 전부였다. 전태일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 하다.

1948년 8월 26일 대구 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전태일도 여느 전쟁둥이가 그러하듯 어릴 때부터 풍족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한국전쟁 당시 그의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했지만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던 아버지가 빚더미에 나앉는 바람에 결국 살기 힘든 사람이 몰리던 서울로, 그의 가족 역시 이주를 결정한다. 그러나 연고가 없는 사람이 대도시 서울에서 기반을 잡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전태일의 아버지는 평화시장이나 중부시장 등에서 일거리가 있을 때나 잠깐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기를 당해 갚을 수 없는 원금과 그 때문에 늘어만 가는 빚으로 가정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4시간 노동의 대가 = 다방 차 한 잔 값 ?

<전태일>
고은


그의 죽음은
너의 시작이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어
희뿌옇게
아침바다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밤중에도 우리들의 시작이었다
/ 권기봉
17세의 전태일은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나 보다. 1965년 전태일은 결국 아버지에게서 배운 재봉틀 기술을 밑천으로 자리를 잡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일은 학생복 맞춤집인 평화시장‘삼일사’의‘시다(‘보조’ 혹은 ‘조수’라는 뜻으로 일본 말)’ 일로, 하루 일당이 50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다방 차 한 값이 50원이었다고 하니 14시간 노동의 대가가 다방 차 한 잔 값이었던 셈이다.

이어 월급 3000원을 받는 미싱보조로 승진한 전태일은 1966년 가을 ‘통일사’에 미싱사로 직급을 높여 이직한다. 그러나 받는 돈은 많아졌을지언정 그의 눈과 가슴은 자기 자신보다는 주변으로 향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공들은 낮은 연령과 여성, 가난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생활환경이 극히 열악했는데, 월급 7000원을 받던 미싱사 전태일의 눈에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일하는 열두세 살 여공들이 가시처럼 박혔다. 전태일은 비록 마르크스나 유물론 등을 배운 적은 없어도 이 같은 사회적 모순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 봄 햇살 가득한 청계천은 그 어둔 역사를 알까 모를까. 빵빵대는 자동차 소리와 가격 흥정하는 소리 너머엔 전태일이 있었다.
ⓒ 권기봉
전태일은 월급이 3000원으로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재단사가 되기 위해 1966년 ‘한미사’에 재단보조로 재취업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재단사는 미싱사보다 많은 이들을 거느릴 수 있기에….

전태일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작업 환경을 개선하면 데리고 있는 이들만이라도 조금이나마 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으리라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재단보조로 취업한지 1년도 채 안돼 재단사로 승진한 전태일,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재단사라 할지라도 적당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잠시 전태일의 일기장을 들여다보자.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우리들은 바보였네…

▲ 평화시장에서 동화시장과 통일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다.
ⓒ 권기봉
이 무렵 전태일은 놀라운 광경을 하나 목격하게 된다. 미싱사로 일하던 여성 두 명이 피를 토했던 것. 이들을 병원으로 데려간 전태일은 폐병3기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은 주지도 못할망정 해고시켜버린 사업주에게 분노한 전태일, 그러나 그 자신마저도 해고의 칼날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저 인간이 인간답게 생각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하면 오히려 해를 당하던 시대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유라시아 대륙 저편에서는 인간된 권리를 찾기 위해 두 손 높이 치켜들었던 1968년, 전태일은 20살의 나이에 이전에는 모르고 있던 새로운 사실, 즉 노동법이라는 존재를 접하게 된다. 한국에도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고, 노동자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어 ‘바보회’라는 평화시장 최초의 자생적인 노동자 모임을 만들게 된다. 뜨겁기만 했던 열정이 처음으로 조직화되는 순간이다.

전태일은 바보회 회원과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 등에 대한 교육과 함께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 조사에 착수하면서 현재의 평화시장 노동조건이 얼마나 부당한지에 대해 일깨워나간다. 그러나 어디나 그렇듯 ‘할말 하는 인간’은 윗사람들에게 밉보이게 마련인지 평화시장에서 차분히 일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전태일은 동대문과 남대문, 구로동 등지를 전전하게 된다.

▲ 왼쪽에 보이는 신호등 부근이 바로 전태일이 온몸을 불사른 자리.
ⓒ 권기봉
몇 차례에 걸쳐 마련한 설문지를 가지고 서울시 근로감독관실이나 노동청 등을 찾아가지만 전태일 일행이 받은 것은 무시와 냉대뿐이었다. 그들의 처지에 귀기울여주는 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밉보여 더 이상 일할 공간을 찾지 못해 1970년 4월부터 건설 현장을 전전했던 전태일은 결국 또다시 평화시장에 나타나는데, 1970년 9월의 일이다.

재단사로 일을 다시 시작한 전태일은 바보회에 이어 ‘삼동친목회’라는 모임을 만든다. 또다시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 조사에 착수한 삼동친목회는 노동자들의 서명을 받아 이를 근거로 1970년 10월 6일 노동청에 진정서를 냈는데 <경향신문>이 이를 기사화하기도 한다.

이에 힘을 얻는 전태일 등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0월 8일 (주)평화시장 사무실로 찾아가 노동시간이나 임금, 노동환경, 노동조합 결성 등의 안건을 가지고 사업주 대표들과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결국 유야무야되고 앞서 말한 분신자살이라는 극한의 방법을 통한 외마디 비명이 청계천을 뒤흔들게 된 것이다.

차디찬 시장 바닥에서 만난 전태일

조만간 청계천을 마치 지붕처럼 덮고 있는 청계고가를 헐어 자연하천으로 복원한단다. 아무리 흉물스럽다지만 이제 지금과 같은 풍경도 몇 년 후면 영영 볼 수 없어질 지도 모를 것이기에 겸사겸사 청계천을 찾았다.

지하철4호선 동대문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서자 이내 ‘두타’와 ‘밀리오레’가 눈에 확 들어온다. 남대문시장과는 달리 재래식(?) 시장이 발붙이기 힘든 곳이 동대문이라니 맞는 말이긴 한가 보다.

▲ 신호등 아래 부분에 동판이 하나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2000년 11월 4일 오전 11시 설치한 것인데 일부러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 주변 상인들의 말이다.
ⓒ 권기봉
육교를 하나 건너면 전태일이 분신을 했다던 평화시장이다. 물론 이 역시 빌딩화가 되어 제법 말끔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너른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온몸을 불살라 저항했던 곳은 어디일까? 물론 꼭 그 자리만이 전태일의 정신과 그 당시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겠는가마는, 그래도 그곳에 서면 이 부족한 길손이 깨달을 것이 있을 것 같기에 처량한 발걸음을 옮긴다.

육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내려가 광교 쪽으로 걷자. 왼쪽으로 각종 중고 책들을 파는 상점들이 있으니 상가에 들어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곳이 어디요?”하고 묻는 것도 좋겠지만 찾기 그리 힘들지 않으니 시장의 왁자지껄한 광경에 묻힌 채 여유를 갖고 걷자.

걷다보면 ‘새마을금고’와 ‘송월타올’간판이 보이는데, 그 사이로 난 골목이 동화시장과 통일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가 바로 이 곳이다.

이 골목 초입에 서서 청계고가를 바라보면 왼쪽으로 횡단보도가 하나 보이는데, 바로 그 앞에 신호등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호등 아래를 잘 살펴보자. 동판이 하나 박혀 있을 것이다.

▲ 전태일이 분신한 곳에 설치된 동판.
ⓒ 권기봉
“이곳은 영원한 노동자의 벗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 항거한 곳입니다.”

이 동판은 지난 2000년 11월 4일 오전 11시 설치한 것으로 비록 일부러 찾아오는 이 없지만 차디찬 바닥에 누워 “이곳이 전태일이 분신한 장소입네”하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전태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

전태일이 분신자살 할 당시는 박정희의 절대 권력이 세상을 주름잡던 시기, 그 어떤 힘있는 자라 할지라도 앞에 나서서 인권이나 노동조건 등 ‘불온한’ 말을 입 밖에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산업역군’이나 ‘개발’, ‘건설’, ‘전진’만이 세상을 호령했을 뿐. 정치권력이나 경제 권력은 그렇다 치자. 어차피 정통성이라고는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정권이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을 그 당시의 재벌이니 말이다. 그런데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세상에 대해 바른 말, 그리고 쓴 소리를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은 언론이 정권·재벌 등과 결탁해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된 모습이라니. 그들에게 사회적 약자나 입바른 말 등은 관심사가 아니었던 게다.

▲ '자전거길‘은 보았어도 ’손수레길‘은 처음이다. 평화시장 인근에는 이처럼 ‘손수레길’이 차도를 따라 죽 그어져 있다.
ⓒ 권기봉
그러면 전태일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세상을 떠난 지 33년, 지금은 우리네 삶이 좀 나아졌나? 행복해졌나? 당시를 살아본 적이 없어 정확한 답을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여러 자료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판단하건대 물질의 양은 풍족해 졌어도 도시빈민이나 농촌의 상대적 빈곤은 여전하다. 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언론권력의 행태 역시 3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듯 하다.

113번째 맞는 노동절(5월 1일)을 앞둔 지금, 청계천은 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빵빵대는 자동차와 가격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하기만 하다.

▲ 청계고가도 이제 헐릴 운명이다. 그러나 하천으로 복원하는 것도 좋지만 중소 상인들의 생계는 어찌해야 할까.
ⓒ 권기봉
▲ 서울 도심에 자연하천을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 사업으로 당장 생계 위협을 받는 이들도 적잖다. 이들을 위한 적절한 대책 마련에 소홀하다면, 결국 “무엇을 위한 청계천 복원인가?”하는 자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966년 ‘한미사’ 공장 안에서 동료들과(맨 오른쪽) 함께 찍은 사진. 전태일은 월급이 3천원으로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재단사가 되기 위해 재취업한다.
ⓒ 전태일의 집
▲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이 서울시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처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 전태일의 집
▲ 전태일은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로 요구한 것은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10시간에서 12시간으로, 정확한 건강진단, 시다 임금의 인상 등. 그는 말한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라고. 물론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 전태일의 집
▲ 전태일이 보낸 진정서로 12세부터 21세까지 여자 시다가 하루에 14시간을 일하고 70원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건강진단 시 의사들이 “X-ray 촬영 시 필름을 사용하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라고 우려하는 대목을 볼 수 있다.
ⓒ 전태일의 집
▲ 전태일과 바보회는 몇 차례에 걸쳐 마련한 설문지를 가지고 서울시 근로감독관실이나 노동청 등을 찾아가지만 전태일 일행이 받은 것은 무시와 냉대뿐이었다.
ⓒ 전태일의 집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 찾아가는 방법
- ‘두타’와 ‘밀리오레’, 그 옆의 평화시장으로 !

▲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 찾아가는 길
ⓒ전태일의 집

전태일이 분신한 장소는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다. 지하철을 타고 가려면 지하철4호선 동대문역에서 내리자. 8번 출구로 나오면 정면에 육교가 하나 보이는데, 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내려가자.

중고 서점을 따라 걷다 보면 ‘새마을금고’와 ‘송월타올’ 간판이 있는 사이에 ‘동화시장’과 ‘통일시장’ 입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청계고가를 바라보고 서면 왼쪽에 신호등이 보이는데, 바로 그 자리가 전태일이 지난 1970년 11월 13일 온몸에 불을 붙여 산화한 장소다.

한편 전태일의 묘는 마석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 내에 있으며, 인터넷에도 <전태일의 집>이 있어 각종 자료를 볼 수 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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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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