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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세월이 지난 때의 얘기지만 지난 1996년엔가 환경부에서 스위스 제네바의 CITES 즉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사무국에 "남한에는 더 이상 호랑이가 없다"고 보고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온 적이 있었다. 구태여 이러한 종류의 '확인사살'이 아닐지라도 이미 호랑이의 실존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여느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멀어진 지는 한참도 더 된 것처럼 여겨진다.

이 땅에 단 한 마리의 호랑이라도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섭섭한 얘기일 테지만 지금에 와서야 사람들의 관념을 뒤집어 놓기란 참으로 버거운 것이 사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설령 호랑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네 주위에 그러한 맹수가 어슬렁거린다는 것 자체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수도 또 일상의 생활에서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에 하는 얘기이다.

▲ 1920년 무렵에 등장했던 '미국제 순강철 포수기(捕獸器)'의 신문광고. 그 가운데 호랑이를 잡기 위한 최신형 '덫'이 팔려나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포획물의 형태로 호랑이의 실체를 구경한 지는 반세기도 훨씬 넘긴 아득한 날의 일이 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이라는 것이 어쩌다 보니 정말 허튼 소리는 아닌 것처럼 되어 버렸지 않았던가 말이다. 해방 이후에 간간이 표범이 출몰한 적은 있었고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진자료도 심심찮게 신문지상에 공개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범이었을 뿐 호랑이는 분명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인왕산 호랑이가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이 백 년 안쪽의 일이었고, 실제로 1901년에는 경복궁에까지 호랑이가 뛰어든 적이 있었을 정도로 한때는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것이 호랑이였다. 그러했던 것이 어쩌다가 절멸의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히 식민통치 기간에 벌어졌던 호랑이에 대한 남획이라는 것이 있었다.

거개는 맹수구제(猛獸驅除)라는 그럴싸한 명분이 주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건 틀림없는 남획이었다. 거기에 적절한 개체수의 조절이라는 호사를 누릴 형편은 전혀 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역시 호환(虎患)이 무서웠고, 게다가 이에 대한 원성도 높았던 시절이었으니까 애당초 이 호랑이 저 호랑이 가려가면서 포획하기를 기대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 <매일신보> 1917년 6월 16일자에 수록된 '헌상품 세목'. 그 당시 일본 동경을 방문했던 이왕(李王) 즉 순종(純宗)의 행차에 동행했던 하세가와 총독이 진상했던 것으로 그네들의 천황에게 함경북도에서 포획한 호랑이의 '호피' 한 장이 바쳐진 대목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해치는 짐승을 없애겠다는 데에야 고마워했으면 고마워해야지 이를 고깝게 여길 일은 아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꼭 그렇게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호랑이는 이 땅에서 절멸되어 마땅할 정도로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또 그러한 죄목으로 도대체 얼마만큼의 호랑이들이 포획되었던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불완전하나마 일제시대 때 경찰조직 즉 경무국(警務局)에서 꾸준히 산출한 몇 가지 통계자료들이 남아 있어 대강의 형편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여기에 기재된 수치들이 경찰 스스로 포획한 것들만 포함한 것인지 아니면 전국적으로 벌어진 모든 사례들을 일괄적으로 취합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단 '최소한'의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합당하리라 여겨진다.

다만 아쉽게도 일제시대를 통틀어 전 기간을 일목요연하게 취합한 집계표는 보이지 않고, <조선휘보>다 <조선>이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다 하여 서너 군데에 흩어져 있어 미흡하나마 이를 짜깁기하는 형태로 그 결과를 들여다보는 도리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것도 전 기간을 다 파악하지는 못했고, 여기에다 단발성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한 관련수치들을 보완하더라도 호랑이 포획에 관한 것으로는 전부 23개년(個年) 정도의 통계자료만 찾아냈을 뿐이다.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수록된 '해수구제' 집계표이다. 소화 8년 즉 1933년 이후 호랑이는 벌써 절멸 상태에 들어가 있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표범 역시 그 이전에 비해 개체수가 현저하게 감소한 상태였다.
여하튼 여기에 나타난 결과를 본다면, 이 기간에 포살(捕殺)된 조선의 호랑이는 전부 141마리였다. 그리고 표범의 경우는 그 수치가 훨씬 더 높아져 모두 1092마리가 박멸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이는 일제의 경찰이 '공식적으로' 집계한 최소한의 수치라는 사실 정도는 기억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정작 문제의 '호환'은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였던 것일까? 이 역시 자료의 미비로 전체 시기를 다 파악할 수는 없으나 1915년에서 1942년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취합이 가능한 19개년의 수치만을 놓고 본다면,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사람은 모두 36명(부상자는 제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얼추 1년에 두 명 꼴인 셈이다. 그리고 표범에 이르러서는 피해규모가 39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수록된 '해수피해' 집계표이다. 이때 호랑이와 표범에 의한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이리와 늑대에 의한 피해는 여전히 그 수치가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인명피해의 주범은 호랑이가 아니라 늑대였다. 그러기에 호랑이는 더욱 억울했다.
물론 일제시대 후반기로 갈수록 호랑이 개체수의 급격한 감소로 호환이 거의 중단 상태에 들어갔던 탓에 이로 인한 평균수치가 크게 떨어졌다는 대목은 당연히 지적이 되어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착시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단일연도별로 따져봤더니 이 경우에도 가장 피해가 컸던 해일지라도 그 수치는 8명선을 넘지는 못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물론 경찰에서 파악한 것만 그러하다는 얘기니까, 실제로는 그 숫자가 훨씬 더 많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 죽은 일이고, 그렇다면 경찰 몰래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점에서 실제사례와 집계수치 사이에는 그다지 현저한 편차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요컨대 '호환'이라고 하는 것은 기실 다소의 과장이 섞여 있지 않았었나 싶다. 단 한사람이라도 그 생명의 존귀함이야 가벼이 볼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그만한 수치는 일상적인 사고사(事故死)의 가능성에 비한다면 매우 미미한 정도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므로 '범죄용의자'였던 호랑이는 식민통치자들이 그렇게 기를 쓰면서까지 박멸해야 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호랑이는 억울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다소 의외인 듯한 사실 하나를 만나게 된다.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들이 맹수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면 그 주범은 호랑이가 아니라 기실 '늑대'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곰에 의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경우도 심심찮았다. 호랑이가 거의 절멸상태에 이른 이후에는 물론이고 호랑이가 쌔고 쌨던 시절에도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해수(害獸)는 바로 늑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호랑이는 더욱 억울했다.

가령 가장 호환의 피해가 컸던 1915년의 경우에도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사람은 8명이었던 반면 늑대가 물어 죽인 사람은 그 숫자가 무려 113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늑대는 주로 인가 주변에 어슬렁거리다가 갓난아기나 어린아이를 냉큼 물어가는 일이 잦았던 만큼 그 죄질 역시 호랑이에 비해 훨씬 더 나빴던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 <한국일보> 1980년 1월 26일자에 보도된 '경주 대덕산 호랑이'의 모습이다. 여기에서는 1922년에 포획된 것을 1921년의 것이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었고, 게다가 그것이 '마지막' 호랑이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워낙 호환의 원죄(原罪)가 컸던 탓인지 끝내 박멸해야 할 '해수'의 누명을 벗어 던지지 못했다. 이렇듯이 호랑이는 인간들에게 전적으로 적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땅에서 '억울하게도' 사라져야 했던 것일까?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솎아내야 할 맹수였던 것은 틀림이 없지만, 호랑이가 이토록 절멸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는 해수박멸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호랑이를 치부의 수단으로 여겼던 무리들이 적지 않았을 테고, 게다가 호랑이 사냥을 여흥(餘興)의 하나로 생각했던 이들이 우글우글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른바 '제국청년'의 사기를 고취하겠다고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했던 야마모토정호군(山本征虎軍)이 있었는가 하면 또 호랑이 표본을 채집하겠다고 이 땅의 산하를 뒤지고 다녔던 미국원정대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식민통치자들의 방관이 있었으니 애당초 호랑이가 살아남을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멸종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사냥은 좀처럼 멈춰지질 않았다. 개체수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남아 있는 호랑이의 값어치는 그만큼 더 치솟아 올랐을 테니까 말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호랑이는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말고할 만한 여유나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고 곧장 절멸의 상태로 빠져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간혹 '대호(大虎)가 나타났다'고 야단법석을 떨 때도 없지는 않았으나 기껏해야 표범이 출몰한 것으로 드러났을 뿐이었지 그때마다 명백하게 호랑이라고 밝혀진 적은 별로 없었다. 결국에 조선의 호랑이는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를 통해 1940년에 '함경북도'에서 한 마리가 포획되었다고 표시되어 있는 단 한 줄의 기록을 남기고 더 이상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매일신보> 1922년 10월 6일자에 수록된 '경주 대덕산 호랑이' 관련기사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겼으되, 그 가죽은 결국 일본 황족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
그나마 못내 아쉽게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자료 같은 것조차 변변하게 남아있지 못한 상태이다. 벌써 20년도 더 된 시절의 얘기지만 이른바 '가짜 호랑이 사진사건'이 불거졌을 때 <한국일보> 1980년 1월 26일자 지면을 통해 경주 대덕산(大德山)에서 포획된 호랑이 사진이 '마지막' 호랑이의 것이라고 보도된 적이 있고 그 바람에 지금도 그렇게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나 사실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그 시절의 기사에는 "이위우(李渭雨)라는 포수가 1921년 9월에 잡았던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 역시 사실과는 좀 다르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나 포획과정에 대한 설명에 비추어보건대, 그건 그 이듬해 10월2일에 구정주재소(九政駐在所)의 미야케 요조(三宅與三)라는 순사가 사살했다는 호랑이가 확실하므로 우선은 그 시기부터 '1922년'의 일로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이 호랑이의 얄궂은 운명은 거기에서 그치질 않았고, 결국 죽어서까지 그 가죽이 일본황족인 캉인노미야코토히토친왕(閑院宮載仁親王)에게 헌상되어야 했다는 데서 또 다른 슬픔이 있었다. 여하튼 경주 대덕산의 호랑이는 마지막 호랑이라고 하기에는 그 시기가 터무니없이 빠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마지막' 사진은 더 더욱 아니었다.

▲ <매일신보> 1924년 2월 1일자에 게재된 '강원도 횡성 호랑이'의 포획관련기사이다. 분명히 이보다 더 늦은 시기의 호랑이 사진이 어딘가에 있긴 있을 텐데, 그나마 이것이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는 '잠정적으로' 마지막 호랑이의 모습이라고 치부할 도리밖에 없는 셈이다.
이보다 시기가 늦은 것으로는 <매일신보> 1924년 2월 1일자에 수록된 호랑이 사진 하나가 더 남아 있다. 강원도 횡성에서 잡았다는 이 호랑이의 모습이 분명 마지막 호랑이의 것은 아닐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것을 제외하고는 호랑이를 포획한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가 여간해서 잘 눈에 띄질 않는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이보다 뒤늦은 시기의 사진이 남아 있긴 남아 있을 텐데도 말이다.

1940년에 이르기까지 호랑이가 남아 있었다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기록이 명백하게 남아 있으니까 굳이 마음먹고 덤벼든다면 그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사진자료를 못 찾을 것도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당장에 아니 보이는 사진을 어쩔 것인가? 그러니까 또 다른 것이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 이것을 '아쉬운 대로' 호랑이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사진이라고 치부할 도리밖에 없을 듯싶다.

그렇게 호랑이는 마지막까지 변변한 사진 한 장조차도 남겨두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사라져갔다. '호환'의 멍에를 고스란히 뒤집어 선 채로 말이다. 호랑이는 정말 절멸되어 마땅할 정도로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기는 끼친 것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억울한' 호랑이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정말 무지막지한 호환(虎患)이 하나 있긴 있었다. 그건 호열랄(虎列剌, 콜레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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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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