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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28일 국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이라크 파병을 하면 안 되는 16가지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8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 10미터 전방 도로변. 도로에 빽빽히 늘어서 있는 경찰버스가 '반전 시위대'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경찰버스에는 오색 물감으로 색칠된 'NO WAR'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현수막 가운데는 이들 '문화·예술·인간을 죽이는 전쟁반대 파병반대'라고 적힌 것도 눈에 띄었다.

파병동의안 처리를 놓고 논란을 빚어온 국회는 28일 오후 2시 본회의를 열고 파병안에 대한 표결을 다음 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쟁반대·파병반대' 시위는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가열된 분위기다. 시민단체 회원 및 시민, 학생 등 600여 명은 이날도 국회 앞에서 반전 집회를 시작했다.

이날 반전 및 파병반대 시위현장에서는 '아주 특별한 거리강연'이 마련됐다. 이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리영희(74) 전 한양대 교수가 참석한 것. 연전 뇌출혈 수술 이후 아직 완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 리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시위현장을 찾았다. 리 선생은 지난 25일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반전행진'에도 참석, '반전·반파병' 연설을 한 바 있다.

강연 내내 리 선생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쉼 없이 청중을 직시했다. 말소리는 작고 느렸지만 힘이 넘쳤다. 리 선생은 한 손은 지인의 손에 맡긴 채, 다른 한 손은 메모지와 지팡이를 쥔 채 강연을 이끌어 갔다. 그 와중에도 강한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한 손을 치켜들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30여분간의 강연이 끝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은 "리영희 선생님 건강하세요"라고 외쳤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어디에도 '무력 공격 원조의 의무'는 없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날 리 선생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조항들을 조목조목 들어 치밀한 '파병반대' 논리를 폈다. 파병론자들은 흔히 이라크 파병 이유로 '한미동맹' 관계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체를 알고 보면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것.

리 선생은 미리 준비해온 한미동맹조약으로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내용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에는 한국과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공격이 있을 경우에 한해 원조를 한다고 돼있다. 둘째 이 원조도 태평양 지역에 한정돼 있다. 그러므로 외부에 의해 도발되지 않은 전쟁에 가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리 선생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양해사항에는 '무력공격에 대해 미 합중국은 대한민국에 원조를 해야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공격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를 져야할 필요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군사동맹의 이유를 들어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허황된 논리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시민들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리 교수는 베트남전 파병 때도 한미 동맹관계를 근거로 파병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당시 리 교수는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파병에 비판적인 지면을 만들었던 일로 유명하다.

"여러분은 젊어서 베트남전 파병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그 사정은 이렇다. 베트남전에 한국군대가 원조를 하기 위해 갈 때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한미동맹관계를 근거로 간 것이 아니다. 이 조약으로는 베트남전 파병을 요청할 수 없어 당시 미국은 이런 방법을 썼다. 바로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독자적으로 군사를 요청하도록 하는 궁색한 방법이다. 아주 교활하고 못된 방법이었다."

한미동맹관계가 결코 이라크 파병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증명하는 논거였다.

"동맹국가의 전쟁에는 무조건 참전해야 하나?"

리 선생은 또 '동맹국가의 전쟁이라고 해서 무조건 참전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리 교수는 "현재 미국과 함께 이라크를 공격하고 있는 영국은 베트남전 당시 군대는커녕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다"며 "단지 의장대 6명만을 보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리 선생은 시민과 학생 600여 명 앞에서 '이라크 파병을 해선 안되는 16가지 이유'에 대해 약 30분에 걸쳐 열띤 강연을 펼쳤다.

다음은 이날 리영희 선생의 '거리강연' 요지.

▼ 대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 할만한 근거가 없다

"그간의 무기사찰에도 불구 이라크의 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침략전쟁이다."

▼ 유엔(UN) 안보리 동의 없는 전쟁에 파병하는 것은 유엔에 대한 도전이다

"유엔의 결의 없는 전쟁에 파병하는 것은 유엔에 대한 도전이다."

▼ 국익을 이유로 파병한다? 국익은 도덕적으로 획득해야 한다

"국가의 이익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 이익은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한다. 살인과 강도, 남의 나라의 주민을 살상하는 방법을 써서는 안된다. 돈을 벌어도 남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 방법으로 벌어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덕성을 갖춘 국민이 할 일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국익을 취한다 한들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 미국을 너무 믿지 말라

"노 대통령은 북한문제에 대해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파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전쟁행위를 막을 약속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면 오산이다.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전략적 결정이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동맹국의 이익은 부시 행정부의 고려사항이 아니다."

▼ 비전투병이 전쟁범죄의 면죄부는 아니다

"비전투병을 파병한다고 해서 전쟁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이 비전투병을 포로 수용소의 경비병으로 파견한다는 데 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이야 말로 후에 전쟁범죄 재판에 기소될 소지가 가장 많다. 비전투병이라 할지라도 '일급전범'이며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 미국의 말은 무조건 따라야 하나?

"미국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려는 일부 기독교 및 수구 세력에 융합해선 안 된다. 우리가 왜 이라크 인민을 적으로 만드나. 미국을 돕는다고 해서 국제적 활동이 얼마나 커질 수 있을 것인가."

▼ 노 대통령, 취임 전·후 주장에 책임을 져라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전과 후에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자주적인 태도를 갖겠다고 누누히 강조했다."

▼ 그런데도 이번에 이라크에 파병을 하게 된다면.

"파병을 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미국을 견제할 수가 있겠나. 한국의 대 한반도, 대 북한 정책에 대한 발언권은 모두 무시될 것이다. 또 이번 파병으로 한국은 미국에 예속됐다는 생각이 더욱 커질 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는다

"이런 (16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며 그 전쟁에 파병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비밀협약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전 정권 때 혹시라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외에 이(한미상호방위조약)를 무력화시키고 헌법을 무효화시키는 비밀 조약이 체결됐다면 국민 앞에 반드시 밝혀야 한다. 국민은 이를 알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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