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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학원에 다니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막내아들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퇴직하고 시골 고향집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던 부모님을 따라 방학이 되면 나도 고향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 날도 간신히 또 한 학기 보고서를 마무리짓고, 고향인 음성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었다.

평소에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노선이라 좌석번호를 따져가며 앉지는 않았지만, 그 날은 주말이었거나 금요일 저녁쯤 되었는지, 출발 직전에 올라탄 나에게 남겨진 공간은 통로 쪽 한 자리 뿐이었다. 창 쪽 자리에는 짧은 머리의 청년이 하나 앉아서 햄버거를 씹고 있었다.

넓지도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버스에서 햄버거 따위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옆에 앉기는 적잖이 곤혹스럽다. 그 청년도 그쯤은 의식을 했는지 애써 냄새 빠질 구멍도 없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복도 쪽으로 절반은 돌아앉았다.

막히지 않으면 한시간 이십 분이면 닿을 길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휴게실에 들르는 경우도 없었고, 푹 잠들기에도 부족했다. 책을 읽기에는 또 시간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다리는 한 쪽으로 꼰 채 건너편 창 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의 청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한 이십 분을 달렸을 무렵이었다. 햄버거는 진작 먹어치워졌고, 냄새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응, 난데, 여기 동서울터미널에서 지금 출발한다. …"

역시, 주변 사람들 단잠을 깨울까봐 한껏 감싸안은 휴대전화 속으로 조곤조곤 밀어넣고 있던 목소리에서 사투리가 아니면서도 약간 멈칫거리는 억양, 깡마른 음성. 가닥 없이 어딘가 알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는 사람일 것 같았다. 그 때부터 옆모습을 넘겨다보기 시작했고, 한 십여 분 뜯어보고서야 조심조심 말을 건넸다.

"저기…"
"예?"
"혹시, 불광동 쪽에서 중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사실은, 처음 돌아본 얼굴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불광동'이라는 구체적인 정보에 새삼 당황스런 얼굴을 비로소 누그러뜨리며 내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맞는데…요."
"너 병규지? 조병규. 나야, 김은식. ○○중학교 이 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김은식?"
"그래. 생각 안나니?"
"김은식…, 아 그래, 생각이… 날 것도 같고"

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구체적인 정보들이 나오는 걸로 보아 알 만한 사람일 게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너 17번이었잖아, 나는 14번이었고."
"그랬나? 내가… 17번이었나?"

처음부터 상세한 기억을 풀어놓는 내가 이상했을 것이다. 내 고향집 가는 버스에는 웬일인가 물었다. 그 친구는 서울 토박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규는 대학 졸업 후 학사장교로 임관했고, 근무하는 부대가 내 고향집 근처에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건강하시니?"
"아버지? 음, 건강하시지."
"요즘에도 목회를 하시나?"
"응? 목회?"

아버지 안부를 묻는 것을 그냥 의례적인 인사로 들었다가, '목회'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새삼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병규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그래, 너희 아버지 목사님이었잖아."
"그래, 어떻게 알았어?"
"왜, 니가 다 얘기했지. 그래서 너 점심시간마다 한 십분 씩 기도하고서야 도시락 먹고 그랬잖아."

중학교 2학년 때. 병규라는 친구는 외톨이었다. 왕따라면 왕따겠지만, 누가 따돌렸다기보다는 병규가 자청한 것이었다. 그 녀석은 종이 울리자마자 햄이며 맛살이며 계란말이 같은 맛난 반찬을 가로채기 위해 포크를 날리기도 빠듯한 점심시간에 십 분 가까이, 다시 말해 다른 친구들 식사에 보리차 입가심까지 다 마무리되는 시간까지도 눈 꼭 감고 두 손 불끈 맞쥐어 기도를 했던 목사님집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체육 시간에 윗몸 일으키기나 턱걸이를 하면, 다른 아이들은 허리를 까딱거려 점수를 올리는 이른바 '배치기' 연습에 여념이 없었지만, 병규만큼은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며 완전한 동작을 취했다. 턱걸이 시험 때면 나 같은 약골도 허리를 튕겨 열댓 개를 해냈지만, 병규는 철봉 위로 가슴께까지 올라갈 만큼 힘찬 동작을 대여섯 번 한 다음 장렬하게 추락하곤 했다.

만약에 교실 뒷문을 열고 갑자기 나타난 담임선생님이, "쓰레기 소각장 정리해야 되는데 세 사람만 나와"라고 소리를 지르셨다면,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치를 보는 사이 불끈 일어서는 것도 병규 뿐이었다.

그렇지만 병규는 그렇게 인기 있는 학생은 못되었다. 어떤 아이들은 '그리 잘나지도 못한 것이 잘난 척 한다'고 이죽거렸고, 또 어떤 아이들은 '바보 같은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도 저도 아닌 아이들은 병규를 자신과는 그저 다른 세상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이용해먹기 좋은 호구로 계산하고 있었다.

"전에 나랑 팔씨름 자주 했었는데, 기억 나니?"
"그랬나?"
"그래. 너랑 나랑 팔씨름이 비슷했거든. 한 다섯 번했는데, 3승 2팬지 2승 3팬지 그랬어."

같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은 내가 한 판을 더 이겼었다. 그래서 더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 친구 앞에서, 그 얘기를 꺼냈던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학교에서는 뭐 전공했니?"
"응, 국문학"
"국문학이라고?"
"응."
"야, 너는 수학을 잘 했었잖아. 다른 과목들보다 수학을 제일 잘했었는데."
"뭐? 어떻게 그런 것까지 기억을 하냐?"

또다시 눈이 똥그래졌다. 병규는 수학을 잘했다. 항상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아무 편법 없이 연습장을 새까맣게 채워나가는 것은 오로지 수학공식과 풀이들이었다. 그 녀석은 문제를 얼마나 열심히 풀어댔는지 웬만한 문제들은 눈에 익어버려 단 몇 초만에 답을 기억해낼 정도였다. 그런 병규가 문과를 택해 국문학을 했다니.

병규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부터 또 많이 변했다고 했다. 딱히 수학점수가 어떻고 국어점수가 어떻고를 따질만한 성적이 못되었고, 또 국문학에 딱히 취미가 있어 그런 것도 아니게, 그냥 이러저러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병규는 기가 죽고 있었다. 내가 꼬치꼬치 기억하고 연관지어 묻는 기간들을 돌아보아봤자 그리 반짝이는 시간들도 없었거니와, 그보다는 생각지도 않게 일방적으로 무장해제 된 채 더듬어야 하는 추억담이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군인이 되어서 그런지, 병규는 많이 활달해져있었다. 자기도 장기지원해서 국비로 대학원공부를 해볼까 싶다며 대학원 공부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나는 장교로 군복무를 하는 것에 대해 또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아직 군입대 전이었다.

왜 병규에 관한 기억이 내 안에 그렇게 생생했던 것일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음성에 도착했고, 서둘러 각기 전화번호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리고 뒤돌아 발걸음을 떼는 내내 그게 궁금했다. 병규 스스로 당혹했을 만큼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남다른 친분이나 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는데.

그 여름, 문득문득 생각이 몇 번 밟히고서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병규를 빼고서는 우리 반에 '왕따'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해마다 기억에 남는 왕따들이 있었는데. 꼭 그런 아이들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인데. 왜 그 해는 왕따가 없었을까?

어쩌면 따돌림이란, 당할 만한 놈을 꼭 필요로 하는 역할은 아닐 지도 몰랐다. 이왕에 제 발로 한 발 겉도는 놈이 있고 보면, 다들 그 녀석이 별나다고 흘겨보면서 뭉쳐다닐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병규같이 구미를 당기지 못하는 깨끗한 대조물 덕분에 체육시간의 '배치기'라든가, 쪽지시험 때의 사소한 부정행위들. 혹은 숙제장 베끼기 따위 사소한 위반행위들이 애매한 죄의식 대신 폭넓은 공감대의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정이란, 아니 그렇게 말하기도 낯간지러운 패거리의식이란 '도덕적 우월감'보다는 이러저러한 '위반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더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해, 어차피 잘난 것 없기는 마찬가지인데다 이것저것 유난히 서먹해하던, 그래서 아마도 왕따의 위치에 제일 가까이 서있었을 나를 한 발 건너에서 구원해준 병규에 대한 기억이 이리 생각지 않게 생생했던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사람 사는 모양은 어디 가든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데, 그 녀석 요즘은 어찌 사는지. 군인으로서, 혹은 다른 무엇으로서 요즘에는 고스톱도 치고, 술 주정도 같이 부리면서 묻어 사는지. 아니면 가는 곳마다 '바른생활맨' 소리 듣고 사는지.

또, 그래도 어른들이 중학생보다는 좀 나아서, 그 녀석 가는 곳마다 스스로에게 철저해지려는 사람을 곱게 안아주려는 사람들 만나서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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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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