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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날개를 펼친 듯 산세가 부드럽다는 화학산(華鶴山, 613.8m)
수많은 능선이 새의 깃털 같아 마치 황금 새가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해서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부른다.

화학산 봉우리들은 밋밋하기 때문에 정상인 상봉에 올라 특별한 볼거리를 기대하면 실망하기 쉽다. 하지만 산 기슭에는 문바위와 두개의 폭포, 각수바위가 버티고 있어 사람들은 화학산을 명산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화학산은 장흥, 나주, 화순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잇점 때문에 6,25전란때 빨치산의 거점으로 이용되면서 무고한 양민들이 숨져간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화학산 기슭에 있는 문바위. 소나무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 최연종
화학산은 청풍면과 도암면 일대에 걸쳐 있다. 희끗희끗 내민 바위 봉우리 3개가 눈길을 끈다. 화학산 자락인 도암면 우치리 뒷산에 있는 문바위다. 소나무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바위 틈새에는 진달래가 뿌리를 내리고 봄이오면 붉게 수놓아 문바위의 절경이 한층 돋보인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문바위 아래에서 생활한 지 6년이 됐다는 이기섭(69)씨가 반갑게 맞는다. “문바위 아래에는 폭포가 2개나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줄기가 마르지 않습니다. 주변 경관이 빼어나 이 곳을 아는 사람들은 여름이면 가족과 함께 찾아와 쉬어가곤 합니다.” 이씨의 문바위와 폭포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 문바위 아래에 있는 폭포.
ⓒ 최연종
이씨 집앞으로 난 길을 타고 대나무 숲을 향해 가면 아담한 폭포를 만난다. 문바위에서 흘러드는 물줄기가 겨울인데도 쉴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비록 규모도 작고 물줄기도 약해 역동감은 덜하지만 문바위를 휘감고 도는 물줄기가 한결 맑고 깨끗하다.

폭포를 지나 산 기슭을 향해 가다보면 대나무 숲길이 나온다. 꽤 넓은 대나무 숲이 있는 걸로 봐서 이 곳이 민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6,25때까지만 해도 10여가구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외지인 두세명이 오두막을 지어놓고 폭포를 벗삼아 함께 살고 있다. 민가를 지나 계곡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비교적 큰 폭포가 다가온다. 높이만도 20여미터에 달해 비만 오면 하얀 포말이 장관을 이룬다.

▲ 각수바위(角首巖). 바위 생김새가 쇠머리 뿔을 닮았다.
ⓒ 최연종
발길을 돌려 우치마을 뒷산에 있는 각수바위로 향했다. 바위 생김새가 쇠머리 뿔을 닮았다는 각수바위(角首巖). 각수바위는 문바위와 함께 화학산의 유일한 바위군으로 화학산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화학산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소의 두 뿔을 닮은 바위 사이로 난 작은 골짜기를 따라 호랑이가 다녔다고 전해온다.

화학산은 이양면의 말봉산, 북면의 백아산과 더불어 빨치산 유격대가 은신했던 곳으로 동학혁명때는 동학군이 주둔했고 여순사건, 6,25 전쟁 등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민중의 넋이 화학산 곳곳에 떠돌고 있다.

더욱이 우치리 인근 장흥 유치에 유격부대 주력부대가 주둔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희생이 컸다. 낮에는 군인과 경찰이, 밤에는 반군이 마을을 지배하면서 생긴 까닭이다.

우치리 이장 양화승(63)씨는 6,25전쟁 당시 마을 어른들이 숨져간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0살 무렵인 가을이었습니다. 반란군들이 마을 건너편에 주민 27명을 모아 놓고 손을 뒤로 새끼로 묶은 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강진 해남 등지에서 피난온 피난민들도 반란군 토벌 와중에 수천명이 희생됐습니다.”

우치리 마을은 소가 드러누워 있는 형국인데 옛날에는 80호가 넘는 큰 동네였다. 언젠가 마을 앞길을 닦으면서부터 신작로를 따라 소가 뛰쳐나가듯 객지로 이사가고 지금은 10여 가구만 남았다고 한다.

수많은 능선의 유연함과 각수바위, 문바위의 위용을 안고 있는 화학산. 화학산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군민신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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