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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묘지의 임정 묘역
ⓒ 박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사는데,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삼사 대가 구차하게 산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들을 만난 후,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다.

안동 유림 임청각의 주인 석주 선생 집안은 직계 삼대뿐 아니라, 아우와 조카까지 합치면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왕산 허위 가문, 우당 이회영 가문과 함께 우리나라 삼대 항일 명문이다.

하지만 해방 후, 그 후손들이 이승만 정권, 군사 정권 아래서는 애국자의 후손으로 대접받기는커녕 오히려 핍박을 받아 입에 풀칠하기 위해 석유통을 메고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기 위해 심지어 고아원에 갔다는 얘기는 해방의 의미를 다시 생각케 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석주 이상룡은 1858년 경북 안동군 법흥동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희, 호는 석주이며,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으로 개명하였다.

일찍이 서산 김흥락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다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책을 덮고 구국 의병활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자금을 마련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가 의병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일제의 신식 무기를 도저히 당할 수 없었다. 신돌석, 김상태 등 의병장이 일본군에 참패하자 “이는 시세에 어둡기 때문이다”라고 하고서 동서양의 새로 나온 책을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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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뜬 후, 먼저 당신의 노비 문서부터 불살라 버리고 종들도 모두 해방시켰다. 이상룡은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나머지 유인식, 김동삼과 함께 안동에다 협동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민족 자강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자 이상룡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매국 역적들의 목을 처라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빈 하늘에 쏜 화살이었다.

그 해 11월 신민회에서 밀사를 보내와 서간도에 조국 광복운동 국외 기지 건설에 참여를 타진해 왔다. 이에 석주 선생은 선뜻 찬동하여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였다. 가까운 일족과 동지에게 은밀히 동행을 권유하자 50여 가구가 따라 나섰다.

▲ 석주 선생 생가 안동의 임청각, 보물 182호
ⓒ 박도
1911년 정초, 이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영춘원에 잠시 머물렀다. 먼저 도착한 이동녕, 이시영 선생이 20리 떨어진 추가가에 살면서 이상룡을 찾아와 앞일을 의논하였다.

망명객 이상룡은 토착민과 이질감을 없애고자 당신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청국 옷차림으로 고쳐 입고 이름마저 상룡으로 바꿨다.

우선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는 게 급한 일이라, 중국어강습소를 차려서 먼저 배운 사람들을 우리 동포들이 사는 여러 곳으로 보내어 그들을 가르치면서 토착민과 친선을 꾀하였다.

그 무렵 손문이 무한에서 혁명군을 일으키자, 이상룡은 조선족 동포로 정예군 1개 소대를 편성하여 그들을 돕자 혁명정부에서 훈장을 내렸다.

이에 이상룡은 손문을 만나 우리 동포를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손문이 크게 호응하여 이때부터 중국관리와 토착민이 우리 동포를 믿고 우대하게 되었다.

▲ 경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유하현 삼원포 대고산
ⓒ 박도
경학사 창설대회를 일제 앞잡이가 정탐할까 염려하여 대고산 속에서 가졌다. 이때 이상룡이 경학사 취지서를 낭독하자 거기 모인 동포들은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 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보고, 이상룡이 나서서 삼원포 일대의 넓고 기름진 땅을 빌어 억새풀을 베어내고 벼농사를 짓게 하여 비로소 동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주의 벼농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상룡이 경학사 창설이래 가장 심혈을 이룬 사업은 남만주 일대에 소학교를 세워 동포의 자질 향상을 꾀하였다. 아울러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위하여 합니하에 신흥학교를 세워서 국내외 청년을 모아 문무를 겸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가 그 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여기서 배출된 인재가 뒷날 항일 전선에 앞장섰다.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으로, 한족회로 개편 발전하였다.

1919년 4월, 만주의 한인 대표들이 모여 군정부를 조직한 바, 총재에 이상룡, 부총재 여준, 정무청 청장에 이탁, 군정청 청장에 양규열, 참모부 참모장에 김동삼, 독립군 사령관에 이청천을 임명하였다.

망명 초기에 함께 일하였던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등이 안창호, 이승만 등과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여운형을 보내와 대동 통합을 요청하였다. 군정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이상룡은 “나 또한 임시정부를 세우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정부를 세웠으니 광복 대도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대의로써 동지들을 설득하였다.

그 후 정부라는 호칭을 상해임시정부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총재를 독판, 독립군을 의용대로 고쳐 부르면서 본래의 사업을 지속하였다.

1925년 3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에서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 중심제로 고쳤다.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국무령을 선출한 결과,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피선되었다.

그 해 9월, 이상룡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한 후, 그 동안 남만주와 중국대륙에서 항일 투쟁에 크게 활약한 김동삼, 오동진,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유필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했으나, 이들 중에는 동포가 절대 다수인 만주를 떠나서는 국권회복을 할 수 없다고 거듭 사양하여 처음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또, 당시 세계 사조의 영향으로 좌우 대립과 임시정부 내부 갈등이 가시지 않아서 그 조정을 위해 약 반년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수습의 가망성이 보이지 않자 “내가 늙은 몸으로 허영에 몸을 굽히는 것은 평소의 기대에 어긋나는데, 그래도 한번 움직인 것은 오직 내분을 조정 통합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이제 이 희망이 없으니 어찌 이 자리에 머물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마침내 스스로 사임하고 훌쩍 만주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돌아온 이상룡은 충격이 컸다. 임정 내분을 수습하지 못한 자탄과 적전 분열을 보인 독립지도자에 대한 염려, 날로 뻗어나는 일제의 세력, 그에 투항하는 옛 동지들, 중국대륙 일대에 득실거리는 밀정들. 이런 시국에 우국 충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가 선생의 춘추 68세로 이미 숙환을 얻어 대신 아들과 손자를 독립운동 일선에 나서게 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후, 일본 관동군이 봉천과 창춘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마침내 길림까지 함락되자 독립지사들이 일부는 체포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룡은 더욱 낙담했다.

그러던 중, 오상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장 여준과 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장녕이 마적들에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만 곡기를 끊었다.

안동에서 먼 길을 찾아간 아우 상동이 “형님, 이제 그만 고국으로 돌아갑시다”라고 하자, 이상룡은 “인생은 다할 때가 있거늘 무슨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만주 땅에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나만 돌아갈 수 없다. 장부가 나라를 찾겠다고 출가해서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선조의 혼령에 사죄하겠느냐? 나는 만주 땅에 씨나 떨어뜨리고 갈 테니, 나 죽고 나거든 남은 가족들이나 돌아가게 하겠다”라고 말씀하면서 형제간 이승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가 임종할 때 임시정부 국민대표 이진산이 “선생님, 광복사업은 누구에게 맡기시고 가십니까? 통화현, 환인현, 영길현 높은 재를 넘으실 때, 기력이 강건하셔서 독립사업 성공하는 걸 보실 줄 믿었습니다. 나라 일이 암담하니 한 말씀 주십시오”하자, 이상룡은 한 말씀 남겼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 외람 되게 여러 동지들의 추천으로 중책을 맡아 조그마한 공로도 없이 죽을병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 같아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원컨대 여러 동지들은 외세 때문에 스스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힘써서 이 늙은이의 소망을 져버리지 말게나. 우리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성실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어떤 목적이라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하겠는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 효도로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내가 평시에 중국 복장을 한 것은 중국에 동정을 얻기 위해 입은 것이지 좋아서 입은 것은 아니었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때를 기다리도록 하라. 조국이 광복되거든 내 유해를 유지에나마 싸서 선산발치에 묻어라.”

▲ 국립묘지 임정 묘역에 마련된 석주 이상룡의 묘
ⓒ 박도

어찌타 영웅 장부가 해골을 아끼랴.
남은 이들이여, 고향 동산에 좋이 머물며 슬퍼하지 말게나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니.


1911년 정초, 이상룡이 조국을 떠나면서 읊은〈거국음(去國吟)〉의 한 구절이다.

하지만 임청각 군자정의 주인은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 망국의 한을 품고 이역에서 운명하셨다.

오늘 3.1절 여든네돌을 맞이하면서 우리나라가 그나마 부끄럽지 않는 독립운동사를 쓸 수 있음은 우당 이회영 선생, 석주 이상룡 선생,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선각자들이 언 땅에다 조국 해방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여든 네돌을 맞는 삼일절 날 아침, 이제나마 그분들과 그 후손들을 제대로 모시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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