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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사에 있는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충무공이 남긴 말 기념비
ⓒ 충남신문
며칠 비가 오더니 바람 빛깔이 틀려졌다. 개구리가 서서히 몸 풀 준비를 하는 경칩을 앞두고 한낮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아침, 저녁 바람마저 살갑기만 하다. 온천이 나온다 하여 세종대왕이 이름을 내려 지금까지 지명으로 사용하는 온양.

지금이야 신혼여행지로 제주도는 물론이고, 괌 등 외국을 다녀오지만 우리네 부모님 세대에는 온양 온천이 제일 가는 곳이었다. 온양이 관광지로서 이름을 드높이던 때는 아주 오래 전으로 지금은 해마다 줄어드는 관광객으로 지역 상권이 침체돼 있다.

이 충무공을 기념하는 현충사를 찾는 수학여행 학생들도 숙박을 하는 것이 아닌 단지 지나가는 코스 정도로 되어있고, 그마저 요즘은 국내외 유명 여행사에서 관광 체류지로서 온양을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온천만 떠올리게 되는 온양은 사실 시간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아산시 배방면 중리 2구에 있는 은행나무 노란 그늘지는 옛 빛 가득한 기와집, 맹사성 고택.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와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맹사성 행단으로도 불려지는데 우리나라 민가 중 제일 오래된 집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방이 양 켠으로 하나씩 배치된 ‘ㄷ’자형 맞배집으로 전형적인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는 이 집은 또한 우리 역사의 큰 인물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이다.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이다. 노자가 소를 타고 속세를 떠난 것과 비유해, 소를 타고 풍류를 즐긴 맹사성의 호는 고불(古佛)이다.

▲ 맹사성 古宅의 맹사성등 맹씨 3위 위패가 모셔진 세덕사(왼쪽)와 윤보선 대통령 생가
ⓒ 충남신문
이는 고불심(古佛心)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순수하고 참된 도인의 마음을 가리킨다. 진정한 풍류가 무엇인지 알았던 맹사성에 대한 숱한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특히 코미디 프로에서 소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맹사성이 높은 벼슬에 있을 때 과거보러 가는 젊은이와 주막에서 나눴다는 '공당문답', “…했는 공”, “… 있는 당”으로 전해지는 일화는 고불의 해학을 엿볼 수 있다.

19세의 나이에 장원급제하고, 20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되어 거만한 마음을 가지게 된 맹사성이 훗날 조선시대 가장 청렴한 정승으로 기억되게 만든 이야기도 던지는 바가 크다. 무명선사와 만난 자리에서 백성을 다스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쁜 일은 말고 착한 일을 할 것이며, 지식이 넘치면 인품을 망치고 머리를 숙이면 부딪히는 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전한다.

▲ 맹사성이 심은 수령 600여년 된 은행나무
ⓒ 충남신문
고불의 흔적은 새로 단장했지만, 고택 앞에 대리석으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행정 지역이름인 중리2구에 앞서 커다랗게 새겨진‘청백리 마을’에서 나타난다. 고불은 재상만은 아니었다. 음률을 아는 음악가이기도 했다. 같은 시대의 유명한 음악가 박연과 함께 악기 연주도 했다고 한다.

옥저라 불리우는 피리를 잘 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피리는 현재 맹씨 행단에서 잘 보관돼 전해 내려온다. 예술가로서, 혹은 청렴한 선비로서 그의 풍모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문풍지에서 새어나오고 있다. 창 밖의 소나무 그늘에 줄을 얹어 걸어두고 보니 바람에 저절로 우는 거문고 소리가 난다는 고택을 뒤로하는 길에 솔바람, 은행바람이 발길을 가볍게 한다. 시간을 확실히 뒤로 돌려놓았나 보다. 이리 휘고 저리 꺾어진 길을 돌아 마주 친 눈앞의 풍경은 자꾸 지나 온 뒷길로 눈이 가게 만든다.

▲ 외암마을 입구에 고샅길이 정답기만 하다
ⓒ 충남신문
산자락 아래 위치해 정승으로 맞이하는 외암리 민속마을. 돌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어디에서 구한 것인가, 감칠 솜씨로 짚 이엉을 해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초가집, 여봐라 문 열어라 소리치면, 마당쇠가 삐그덕 소리내며 열 것 같은 기와집.

나는 분명 영화 속에 뛰어들은 것이리라. 외암리 민속마을. 충청도 지방 고유의 가옥 형태인 반가(班家)와 초가가 400여년 그 형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곳. 예안 이씨가 정착하며 대를 물려가며 살아오고 있는 이 곳은 디딤방아, 연자방아도 있어 필경 잔치 때면 들려왔을 쿵더덩 쿵, 쿵더덩 쿵을 기억하게 한다.

마을 한 가운데라기보다는 입구로 어울리는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는 곳을 지나면 집집마다 둘려쳐진 돌담길 사이사이, 분명 동네 마실을 다녔을 고샅길이 눈에 들어온다. 옛 사람들은 정말 아무 곳에서나 삶의 터를 정하지 않았나 보다. 풍수란 이런 것인가. 나무와 바람, 마을 앞을 지나는 실개천은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만들고 가꾸어 왔는지 살필 수 있었다.

마을은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봄을 맞이해 주민들이 마을 대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도회지에서는 볼 수 없는 공동체 의식, 여기에는 생명이 있고 잊고 지냈던 정이 마을에 돌아다니는 작은 돌 조각에도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양민주 외암 민속마을 문화유산 해설사는 “현재 약 65가구 300명이 이 곳에 살고 있습니다. 명절이면 옛 전통 그대로 음식을 만들고 세시 풍속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마을 고택 중 특히 영암댁이라 불리는 건재고택은 충청지방의 대표적인 반가로 정원수와 자연석, 연못 등이 한옥과 어우러지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보이며 조선시대 양반가 정원 형태 연구에 커다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평상시 닫혀 있는데 사전 연락을 주면 개방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리 출렁 저리 출렁 논두렁길을 따라 순천향 대학 뒷길을 통해 도고에 가면 눈에 들어오는 표지판 전통 옹기장. 한때는 우리나라 최대의 옹기구이 집성터였던 도고면 갈티 마을은 입간판이 무색하게 과거 100여명 이상의 옹기 기술자가 살고 있던 집의 흔적만 녹슬은 양철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 한 때 우리나라 제일가는 옹기촌이었던 도고 갈티마을에 남아있는 옹기굽는 작업장
ⓒ 충남신문
25일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 흔히 나랏님은 하늘이 점지한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은 조상의 묘지를 이리저리 옮겨보기도 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풍수를 알아보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쓰러졌다, 다시금 일어나고 특별한 영양 공급이 없어도 척박한 땅 어디에서도 살아있음을 푸르름으로 알리는 잡초같은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야, 나랏님이 어떤 땅에서 태어났나 호기심으로 찾아보는 정도일 뿐이다.

폭풍같은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제2대 대통령 해위 윤보선. 4.19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모든 것을 상실한 인물. 이후 대통령 후보로 두 번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상대해 한때는 박 전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고 이후 한국 재야의 상징이었던 해위는 오늘 자신이 이름지은 ‘청와대’의 주인이 새로 들어서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에 있는 해위의 생가는 권력무상을 집 스스로가 웅변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건물 외벽이며 트럭이 지나가며 허물어뜨린 기와로 맞이하는 해위의 생가는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일국의 대통령을 탄생시킨 곳으로 보기 힘들었다.

2년 전부터 해위의 생가에 거주하고 있는 제갈균(37)씨 윤씨 가옥에 대해 설명했다.

“풍수지리가들과 일반 국민들이 가끔 찾아옵니다. 일반인들은 이곳의 모습에 실망을 많이 합니다. 봄 되면 잡초 제거가 큰 문제입니다. 서울 안국동 집에 비해서 언론의 조명을 못 받아서인지 몰라도 대통령 생가치고는 관의 지원이 미흡합니다. 이웃한 윤일선 가옥은 지난해 보수가 됐는데 말입니다.”

윤보선 생가 옆쪽으로는 일제 강점기 정치활동을 한 윤치호의 생가도 있었다. 청와대를 이름지은 인물과 그 곳의 새주인이 들어서는 오늘, 해위의 생가는 서글픔으로 다가오지만, 얼음과 눈발을 헤치고 달려온 햇빛은 유난히 눈이 부셨다. 처음이었다. 땅이 풀리며 새싹이 돋아난 것을 보기는. 해위의 생가 옆 텃밭에 톱밥을 뚫고 채소 잎이 싱그러운 파란색을 드러내며 봄바람에 몸을 맞기고 있었다.

"재정 지원없어 방치 안타까워"
윤보선 전대통령 생가 관리하는 제갈균씨

"아산시 의회 의원들이 찾아와, 올해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를 정비한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생가라면 역사적 의미가 깊고 해당 지자체의 자랑인데, 사실 그 동안은 좀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뒤늦게 라도 생가 복원이 이뤄질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2년전 사업에 실패하고 대구에서 올라와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에 거주하며,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제갈 균씨. 지난 두해 동안 제갈씨는 생가에 살게 된 까닭으로 부인과 단 둘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틈틈이 잡초를 제거하는 정도의 생가 관리를 해오고 있는데, 한 겨울철에는 손도 못 대었다고한다. 제갈씨는 살고 있는 집 바깥 사랑채가 헙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재정 지원없이 보수를 할 수도 없어 방치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외부 관광객들이 찾아왔을 때 무척 부끄러웠노라고 고백한다.

"지금까지 딱 한번, 독한 것이 전부입니다. 생가 입구 입간판도 정비해야 하고, 파손된 기와도 수리해야 하며 전반적인 수리가 필요합니다."
/ 이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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