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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현대가 대북 7대 사업의 대가로 5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하려는 사실을 임동원 특보에게서 보고받은 적이 있나.
"당시는 정상회담에 몰두할 때였는데, 현대 관계 보고를 잠깐 들은 기억이 있다. 남북 평화와 국익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큰 이의를 달지 않고 수용했다." (김대중 대통령)

- 임동원 특보는 당시 국정원장으로서 현대상선 대북 송금에 대한 편의 제공이란 중대한 사안을 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나.
"현대로부터 편의 제공 요청을 받고 가능성 검토를 관계 부서에 지시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일주일 전께의 일이라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고, 추후 보고도 받지 못해 돈이 갔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문제가 불거지면서 알게 됐다. 물론 대통령께는 내가 몰랐기 때문에 보고를 못했다. 편의제공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고, 또 나 자신이 잘 모른다." (임동원 외교안보통일 특보)

- 박지원 실장은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싱가포르에 개인적 용무로 갔다고 했는데.
"당시 싱가포르에 가서 북측의 송호경 아태부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남북 당국간 접촉을 시작하면서 북측에선 몇 차례 성명도 내서 국정원이 개입하지 말도록 촉구해서 제가 특사로 결정됐지 않았나 생각한다. 북한은 제가 대통령 측근임을 확인하고 상견례만 하는 자리였다. 한마디로 정상회담의 탐색전이었다. 그러나 그쪽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비공개로 해 달라고 요구했고, 저도 앞으로의 국면이 확실하지 않아 확인해줬다. 이것은 외교관례상 지켜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회 질문시에도 이런 외교관례상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박지원 비서실장)

지난 2월 14일에 발표된 대북송금 건에 대한 청와대측 해명과 사과 중에서 야당과 언론이 문제삼는 '거짓말 의혹'은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런 의혹 제기는 본질을 벗어난, 문제를 삼기 위한 '말꼬리 잡기'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박지원은 증인·소환에도 생존한 '신기록 보유자'

우선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은 박지원 실장이 지난해 10월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으로부터 "싱가포르에서 북측 고위인사를 접촉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싱가포르 방문만 인정한 채 "대통령의 휴가 허가를 받고 가서 친분 있는 중국인 등과 만나서 좀 쉬었다"고 거짓 증언을 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2000년 3월 8일 당시 박지원 문광부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북측의 송호경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 부위원장과 비밀 회동한 것은 사실 '공개된 비밀'이었다. 필자도 이미 지난 2000년 6월 정상회담 직후에 '정상회담은 싱가포르에서 시작됐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국정원-아태 라인이 2000년 3월 싱가포르에서 이뤄진 세 번의 007접촉에서 '각본'을 완성하는 등 유례 없는 '깜짝 선언'을 이끌어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 설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국가 간의 외교교섭에 관한 일인 데다가 상대국이 비공개로 해줄 것을 요청한 마당에 외교관례를 지킨 것이 위증에 해당할지는 의문이다.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통일 특보도 국정원장 시절에 정상회담 전인 2000년 5월, 비밀 방북한 사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한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 또 그전 정부에서도 당시 박철언 보좌관(노태우 정부)과 장세동 안기부장(전두환 정부) 등이 정상회담 등을 추진하기 위해 비밀리에 방북하거나 북측과 접촉했으나 국회 위증혐의로 논란이 된 적은 없다.

박지원 비서실장은 김대중 정부 중반에 이른바 한빛은행 대출압력 의혹으로 국회 국정조사 증인으로 청문회에 선 바 있다. 또 최근에는 벤처기업인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았다는 의혹과 관련해 호텔에서 조사받은 사실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지원 실장은 사법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살아남았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 같은 존재인 박 실장을 다시 한번 청문회에 증인으로 부르거나 특검이 소환토록 해 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 실장은 현재로서는 국회와 검찰의 최다 증인·소환에도 '살아남은 신기록 보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상회담은 국정원의 거대한 '편승공작'의 일환

▲ 박지원 비서실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임동원 특보가 국정원장 시절에 대북송금 편의제공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점과 대통령이 몰랐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야당과 언론은 대부분 이해가 안된다는 투이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정보기관의 조직생리를 알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선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정보기관의 비밀공작(covert action)이 비합법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비밀공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정보의 수집과 방첩활동을 제외한 정보기관이 수행하는 모든 비밀활동을 의미하며 정보기관의 역할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고 고유한 업무로서 대부분 비합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합법적 활동이라면 일반 행정기관이 수행하거나 외교적으로 해결하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상회담 자체도 국가정보기관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국가공작으로 분류된다. 다만, 방법론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대의 이른바 7대 대북사업에 업혀서 가는 '편승공작'을 띠고 있을 뿐이다. 국가공작의 목표는 물론 북한의 개방개혁이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은 정상회담의 성공으로 일단 1단계 국가공작을 완성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정원은 제2단계 국가공작을 수행중일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공작은 외국 내에 자국 혹은 자국 정부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대하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추진하는 공작이다. 미국 언론에서는 이를 '영향력 확보 활동'이라고 부른다. 정치공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통령, 총리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테면 대북 정치공작의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남 인식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상회담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그럴 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을 피한 DJ

국가정보기관은 기본적으로 대내·대외적 중대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합리적 결정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이 조직의 생래적 특징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의 비밀공작은 본질적으로 비합법적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기관이 수행하는 비밀공작의 하나하나 마다 대통령에 대한 보고와 승인과정을 거친다면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대통령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공작의 생명은 보안인 것이다. 그러나 보안이 누설되었을 경우에는 흔히 국가 최고 책임자나 정보기관 책임자는 그런 사실을 몰랐으며 하부 조직원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일이라고 부인하는 '도마뱀 꼬리 자르기'가 일반적인 관행이다. 이를 가리켜 미국 언론은 '그럴 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1960년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정찰기 U-2기가 소련 영공에서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기는 몰랐던 일이라고 부인했다. 그 이후 미국은 1974년 칠레 아옌데 정권의 전복(顚覆)을 기도한 CIA 비밀공작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대통령과 의회의 승인 없이는 비밀공작을 추진할 수 없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에 이란 무기를 니카라과 반군에게 판매한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존 포인덱스터 제독은 자기가 대통령의 '그럴 듯한 부인'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이 공작에 관해 보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처럼 대통령의 면책을 위해 일부러 보고하지 않는 것이 정보기관의 고유한 업무수행 방식이다. 따라서 "대통령께는 내가 몰랐기 때문에 보고를 못했다"는 임동원 특보의 진술은 타당한 것이며,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그것은 대통령의 '그럴 듯한 부인'을 위한 정보기관장의 진술로서 충분히 용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공작이 본업인 국가정보기관에 대해 위법을 탓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그럴 듯한 부인'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시는 정상회담에 몰두할 때였는데, 현대 관계 보고를 잠깐 들은 기억이 있다. 남북 평화와 국익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큰 이의를 달지 않고 수용했다"면서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지겠다"고 밝힌 점이다.

임동원 특보는 보충설명을 하며 "보좌를 제대로 못해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전날 밤새 직접 담화문 원고를 다듬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대통령은 회견 내내 초췌하고 굳은 표정이었고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기도 했다.

햇볕정책과 김대중-임동원은 2인3각 관계

▲ 임동원 특보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임동원 특보는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통일부장관, 국정원장, 외교안보통일 특보 등을 거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인 '햇볕정책'을 입안·집행한 장본인이다. 김대중과 임동원, 둘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없었다면 햇볕정책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김대중-임동원은 햇볕정책을 매개로 2인3각 관계라는 것이다.

99년 12월23일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이 '설화'(舌禍)로 물러난 천용택 국정원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을 때 정치권은 매우 의아해 했다. 왜 하필 임동원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4월 총선이 넉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하필이면 현 정권 하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을 가장 정치적인 자리(국정원장)에 임명한 DJ의 의중이 과연 뭔가 하는 물음이었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그를 발탁한 배경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그가 통일-외교-안보 세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문가라는 점. 둘째는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점. 셋째는 정치적 야망이 없어 야당의 정치 개입 시비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그러나 정작 DJ가 임장관을 국정원장으로 중용한 것은 인간적 신뢰감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실 임동원은 DJ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빈틈없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데다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정치적 야욕이 없다.

그의 배경도 DJ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요인이다. 역대 선거에서 DJ에 대해 뿌리깊은 적대감을 보여왔던 이북(평북 위원) 출신인데다 한때 DJ에 대한 공개적 '비토 세력'이었던 군(육사 13기) 출신이다.

군 출신이지만 그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수학했으며, 나이지리아·호주 대사 등을 역임해 외교관으로서 국제적인 안목을 가졌다. 또,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통일부 차관을 거치면서 외교·안보·통일 3박자 감각을 두루 갖춘 흔치 않은 인물이다. 이 정도 출신과 배경이라면 으레 북한에 대한 극우적인 시각을 가질 만도 한데 그는 묘하게도 DJ와 같은 '비둘기과'였다.

율곡계획 청사진 짠 자주적인 전략가, 임동원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군 전력증강계획(율곡계획)을 처음 시작했을 때, 당시 임동원 대령(합참 군사력소요과장)은 이재전 소장(육사8기·합참 전략기획국장)·이병형 중장(육사4기·합참 본부장)과 함께 한국군 최초 중장기 군사력건설의 청사진을 짠 '전략통'이었다. 초대 전쟁기념관장을 지낸 이병형 장군은 임동원 특보에 대해 "내가 겪어본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2대 전쟁기념관장을 지낸 이재전 장군 또한 그에 대해 "30년 동안의 군문(軍門)에서 사관학교 출신 장교 가운데 그렇게 우수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할 정도로 극찬을 했다.

임 특보가 육사 교수부에 근무할 때 육사 교장을 지낸 강영훈 전 총리는 임 원장의 장남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섰는데 그때 참석한 하객들에게 신랑의 아버지(임동원)를 "가장 존경하는 제자"라고 소개했다. 존경한다는 표현은 스승이 제자에게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DJ도 그에 대한 이런 신망을 높이 산 것이다.

DJ의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임동원은 95년 2월1일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에 취임했고 그해 봄에 김대중-이희호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부부는 롯데호텔에서 임동원 사무총장 환영 리셉션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 이사장은 임 총장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책임감 강한 공무원'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 '남북통일문제 전문가' 등으로 소개하며 '민족에게 통일 비전을 제시한 행동하는 양심'인 임 차관(전 통일원차관)이 오심으로써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온 남북 통일문제에서 백만 원군(援軍)을 얻었다고 극찬을 했다.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외교안보통일의 핵심 포스트를 두루 거친 임동원 특보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가장 자주적인 외교안보통일 정책을 입안한 전략가이다. 98년 2월 당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98년 2월 중국에 가서 중국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과 오찬 토론회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임 수석은 이때 중요한 언급을 했다. 그가 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우리의 동의없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존재할 수 없다"

▲ 김대중 대통령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지난 1년 동안 대북정책에는 한두 가지 특징이 있다. 남쪽이 먼저 액션(action)을 취하고 북쪽이 반응(react)해왔다는 것이다. 남쪽이 주도하고 북한이 따라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꾸로 되면 일이 잘 안 된다. 우리가 주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이나 외국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해주고 있고 그걸 배우고 싶어한다. 또 이런 화해협력을 통해 북한이 대남 의존도를 조금씩 높이게 하는 출발점을 만들어 줬다."

그렇다면 문제는 북한이 응해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다. 그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명하다.

▲ 김대중 대통령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해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방법으로 되도록 하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 북한이 호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도 전쟁과 위기를 회피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No war, no nuclear threat'의 원칙 하에 추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주인공은 코리언이다. 여기에는 7000만의 생명이 있다. 어떤 생명은 소중하고 어떤 생명은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의 동의 없는 (미국의) 대북정책은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합의가 돼 있다."

70년대 초반에 이미 자주국방의 철학을 체득한 그의 자주(自主)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결론은 이것이었다.

▲ 김대중 대통령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결론적으로 대북정책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네 가지 중요한 자세가 있다. 하나는 자신감(confidence)을 갖는 것이다. 2∼3년 전만 해도 붕괴될 것이라고 봤던 북한에게 왜 그렇게 자신감을 갖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중요하다. 둘째는 강자 위치에서 인내심(patience)을 가져야 한다. 북한은 다루기가 쉽지 않다. 대단히 어렵다. 인내심을 갖지 못하면 갈팡질팡하는 정책이 된다. 세째는 일관성(consistency)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로 정책추진에 있어서는 신축성(flexibility)을 갖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 나가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先易後難 先經後政 先民後官 先供後得

98년 2월 당시 중국 한반도문제 전문가들과의 오찬 토론회 이후 임동원 특보는 반대파에게 '햇볕정책'을 설명할 때마다 16자(字) 전법(戰法)을 구사했다. 그 자리에서 중국인들은 김대통령의 양광정책(陽光政策ː햇볕정책의 중국식 표현)을 다음과 같이 16자로 요약 설명했다.

先易後難(선이후난ː쉬운 것부터 먼저하고 어려운 것은 나중에 한다) 先經後政(선경후정ː경제를 먼저하고 정치를 나중에 추진한다) 先民後官(선민후관ː민간이 먼저 주도하도록 하고 뒤에 관이 따라간다) 先供後得(선공후득ː먼저 베풀고 나중에 얻는다)

임동원 특보는 그 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도 지지하는 이 표현을 원용해 햇볕정책을 전파하곤 했다. 한나라당 총재가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선공후득'에 대해 시비를 걸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정원의 편의제공 하에 현대가 북한에 보낸 5억 달러 송금과 남북 정상회담도 따지고 보면 '先易後難 先經後政 先民後官 先供後得'의 16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야당과 일부 언론의 마지막 의문은 현대가 북측과 2000년 8월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도 전인 2000년 6월에 무엇을 믿고 5억 달러라는 거금을 보낼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측과 사업을 할 때는 선금을 주는 것이 관행이라는 것은 대북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백만인의 상식'이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합의와 계약체결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은 계약 이전에 선급금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일반기업뿐만 아니라 언론사들도 '교류협력'의 대가로 거액을 뒷돈을 제공했다. 북한측이 방북을 허락하지 않은 조선일보를 제외한 중앙일보가 그랬고 황금동판까지 갖다바친 동아일보다. 물론 KBS, MBC, SBS 등 방송3사도 죄다 경쟁적으로 거액의 선금을 주고 북측과 합의해 자사의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했다. 한 방송사의 경우 북측에 100만 달러를 주고 현지 생방송 권을 따냈다. 다만 현대는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 개발이라는 거대한 국가개발사업권을 따냈기 때문에 그 권리금(대가금)의 규모가 커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톺아보기'는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는다'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인 '톺다' 또는 '톺아보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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