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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과 함께 깨끼춤을..
ⓒ 김기
굿쟁이 무세중, 그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도 않지만 소위 문화판에 발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흘려 넘길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무세중은 계륵같은 존재이다. 무시할 수도 없고 인정하자니 곤욕스러워 모두들 입을 맞춘 듯 그에게 전위예술가, 행위예술가라는 포장을 덕지덕지 붙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 무세중의 성 무(巫)자는 애써 외면하려는 해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세중은 실제 신을 모신 무당이다. 몰론 그는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행위예술로 명명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것을 어떻게 이름짓고 해석하건 그에게는 굿일 따름이다.

부모가 내려주신 김씨 성을 버리고 어느 족보에도 없는 무씨 성을 정해 살아오는 그는 행위예술가 이전에 이 땅의 잃어버린 민족 사상과 민족 미학을 되살리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얼이 살아 있는 민족운동가이자 굿쟁이다.

▲ 그가 창안한 무사위 동작
ⓒ 김기
풍물굿학교의 커리큘럼이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다섯째날 아침, 전날 밤에 도착한 무세중 선생은 학생들에게 우선 엄하게 다그치는 일부터 하였다. 고승의 선문답도 아니면서 난데없이 피흘림이 더 필요하다는 말로 시작한 그의 강의는 사실 탈춤의 일종인 깨끼춤이 주제였다.

그러나 춤보다 그가 먼저 학생들에게 말한 것은 몇가지 용어에 대한 일갈이었다. 예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키는 것이다. 가는 길만 알려줄 수 있는 것이 한국의 춤이고 예술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고민한 분의 던지는 말 한마디를 듣자 곧바로 납득하기 어디 쉽겠는가.
알듯말듯한 말이었다.

우리춤은 무형식의 형식이고 무기법의 기법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가르친다는 잘못된 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깡촌 대동굿판에 가서 촌노가 신명에 겨워 부실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얼쑤를 놓는 춤을 보고 팔동작이 틀렸다 스탭이 잘못됐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50년이 넘은 탈, 그의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았다.
ⓒ 김기
물론 우리 민속춤에도 기본적인 사위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정형이 되어 춤추는 이의 신명을 구속하지 못한다. 우선 '춤'이라는 말자체가 'ㅊ+움'의 복합어로써 차다와 움트다가 결합된 뜻이라고 한다. 움튼다라는 말은 정말 우리말의 정말 아름답고 심오함을 가진 말이다.

춤은 거친 황토를 뚫고 새싹이 움트듯이 일상의 가난과 고통을 뚫고 비로서 오장육부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신명과 흥의 자연스러운 동작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형식이며 규격이 가당하냐는 것이다. 우리 민족 예술의 전반을 꿰뚫는 즉흥성과 자유로움을 담은 말이다.

게다가 우리춤의 최고 절정은 병신춤이라고 한다. 보기에 아름답고 화려한 춤도 쎄고쎈데 왜 하필 병신춤일까 궁금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미학의 배경은 언제부턴가 서양의 기조가 가득차 있어 우리의 전형의 아름다움을 쉽게 간파하지 못함이 문제이다.

우리민족이 향유해온 문화는 미과 추를 동시에 담고 있다. 당장 탈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얼굴에 쓰고 나오는 탈의 모습들만 봐도 그렇다. 소위 서양적인 미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탈춤의 사설이나 춤동작에 배인 풍자와 풍자의 현실 속에 사는 민중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움이었다.

유일한 정서의 탈출구였고 소위 양반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민족미학의 저변에 깔린 것은 해방이었다. 한때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해방이란 단어에 대한 협의의 선입관이 적지 않겠지만 이때의 해방은 좀더 넓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깨끼춤을 배우기 위한 무세중 선생의 민족미학 강의는 길게 이어졌고 학생들은 새롭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선생의 강의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집중하였다. 춤도 춤이지만 그에게서 듣는 민족미학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을 뜨금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반쯤 가르침이요 반쯤은 꾸짖임인 민족미학에 대한 강의도 하고 강당에서의 깨끼춤도 배웠다. 무엇보다 무세중 선생 당신이 직접 우리춤의 정신에서 뽑아 창안했다는 무사위 다섯 중 세가지의 동작을 배울 수 있었다.

▲ 깨끼춤 사위
ⓒ 김기
어찌보면 춤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무예같기도 한 것이 예사롭지 않은 동작들이었다. 특히나 팔꿈치와 어깨까지 확장한 상체의 궤도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깨춤을 출 수 있게 하였다. 우리춤이 손과 팔 동작보다 옷 속에 감춰진 어깨의 움직임에 그 묘미가 있다는데 결국 무사위는 규격으로서의 어깨춤이 아닌 자연스러운 어깨춤을 가능케 해줄 것 같았다.

오전 오후의 가르침과 배움의 시간이 지나고 여느때처럼 저녁 식사 후의 자연스러운 이야기 합굿 시간은 지난 시간보다 더욱 치열하고 긴장된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수많은 화두와 고민이 오가던 중 우연히 무세중 선생의 사는 모양에 대한 이야기가 머물게 되었고, 그렇게 크고 강하게 보이던 선생은 차마 보일 수 없었던 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버려진 민족 미학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일에 매진하였던 그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힘이 빠졌을까 그를 내내 억누르는 가난에 문득 설움이 북받쳤나 보다. 아니 그것이 어디 그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제도권에 영합하지 않고 진정된 자기 소명을 다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논하는 민족미학이나 굿이니 하는 논의의 터전을 읽군 사람 중 빼놓을 수 없는 무세중, 그가 김세중이 아닌 무세중이어야 할 만큼 절박했던 민족미학의 위기 속에 자기를 던졌던 기인이자 선각자였던 무세중, 그가 굵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전통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척박하기만 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리고 빼앗긴 우리의 얼과 넋이 흘리는 눈물은 아닐까.

▲ 민족을 신으로 받드는 사람, 무세중
ⓒ 김기
그러나 그 눈물을 딛고 무세중 선생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인적 드문 산속의 한 수련장에서 그가 평생을 해온 민족미학의 씨뿌리기는 이어졌다. 그리고 말은 없었지만 그렇게 뿌리는 민족의 씨앗이 어디에선가 건강하고 뿌리 깊은 싹을 움틔우기를 바라며 그는 서울로 돌아갔다.

아니 여전히 그의 신앙인 민족의 씨앗을 뿌리고 움틔우는 그의 현장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갔지만 그가 앉았던 자리에는 많은 고통스러운 숙제들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풀어야 하는 것이 그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들과 또 우리 모두의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거의 한세기 동안 억눌려온 우리의 얼과 넋을 되살리는 일. 문화의 외관을 치장하는 장신구로써가 아닌 진정한 민족의 알기를 되찾는 일이며 삶의 근본을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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