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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한 노숙인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 임경환
"이번 해만해도 나랑 같이 있던 노숙인 2명이 죽었어. 같이 술 먹고 있는데 픽 쓰러지더니 안 일어나더라고. 응급차에 실려 시립병원으로 갔는데 결국 죽었어. 두 친구 모두 고아 출신이어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 결국 내가 보증을 서고 한 놈은 서울대병원으로, 한 놈은 고려대병원으로 실려갔어. 해부용으로."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는 김아무개씨(49·부산)가 기자에게 전해준 '동료 노숙인의 죽음'에 관한 얘기다. 술이 동료들의 죽음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김씨는 소주에 콜라를 반쯤 섞더니 다시 술을 들이킨다. 그렇게 세 잔을 비우고 난 뒤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참 불쌍한 사람들이여. 죽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안 좋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인생이 참 허무하더군."

낯선 사람이 그들만의 공간에 들어와 얘기를 하는 것이 신기했던지 노숙인들이 주변에 하나 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아무개(51·분당)라고 밝힌 한 아저씨도 술을 먹다 죽은 동료 노숙인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끼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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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의식을 마친 한 40대 아저씨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촛불 모형물 앞에 누워버렸다.
ⓒ 임경환
"같이 저녁에 여관에서 소주 3병을 사다 먹었거든. 아침에 안 일어나더라고. 그래서 나는 동상들 만나러 서울역에 나왔지. 그런데 오전 11시쯤에 돌아가셨다드만... 호주머니 뒤져보니 가족 연락처가 있더라고. 그래서 친척인가 하는 사람이 몇 사람 와서 그냥 간촐하게 치뤘어."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이아무개(51)씨는 동료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한다. 한 달이면 몇 명씩 죽어가는 노숙인들의 모습을 늘상 옆에서 지켜보던 그들에게 죽음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옆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매년 200여명 이상의 노숙인들이 이들처럼 '이름도 없이' 죽어간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와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이하 노실사) 관계자들은 "올해도 최소한 200여명은 거리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고 말한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1년 우리나라 전체 사망자료에서도 217명의 노숙인이 거리와 병원에서 죽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개인 신상 공개를 꺼려하는 노숙인들의 속성으로 볼 때, 사망자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인의협은 추정하고 있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ADTOP6@
▲ 마임예술가 이정훈씨는 마임을 통해 죽은 거리노숙자의 넋을 위로했다.
ⓒ 임경환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생을 마감한 노숙인들, 자신의 몸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노숙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Homeless Memorial Day(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가 23일 오후 6시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을 즈음해서 치러진 이날 추모제에는 약 100여명의 노숙인들이 몰려들었다. 평소 지하철 서울역 지하도나 역 대합실에서 추위를 피하곤 했던 노숙인들도 이 날만은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 앞에 집결했다.

주최 쪽으로부터 흰 장갑과 초를 받아든 노숙인들은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인지, 아니면 자신도 곧 저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무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행사를 시작하기 앞서 노숙인들은 옆 사람에게 촛불을 건네받은 뒤 무대 왼쪽에 마련된 추모 촛불 조형물에 하나 하나씩 불을 붙여 나갔다.

▲ 추모제에 참석한 노숙인들은 촛불을 들고 서울역 광장을 한바퀴 돌았다.
ⓒ 임경환
그 가운데 40대로 보이는 한 아저씨는 조형물에 모두 불이 불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가 물고 있던 담배를 촛불 위에 올려놓는 '자기만의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이북이 형님'에게 바치는 담배라고 이 아저씨는 설명했다.

촛불 의식이 끝이 나고 본격적인 추모제 행사가 진행됐다. 인의협, 자유의 집 등 참여단체 대표들의 추도사가 이어지고 마임예술가 이정훈씨의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마임 퍼포먼스'가 진행되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특히 공연 도중 이정훈씨가 "죽으면 안돼"라고 소리치자, 노숙인들은 자신의 불안한 앞날이 떠올랐는지 "죽긴 왜 죽어. 안 죽어"라고 절규하듯 외쳤다.

이어 한 노숙인의 진혼시 낭송이 끝나고 노숙인들은 촛불을 들고 서울역 광장을 한 바퀴 돈 뒤 뿔뿔이 흩어졌다.

▲ 정일용 인의협 공동대표.
ⓒ 임경환
지난해에 처음으로 치러진 추모제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뤄졌다. 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조기에 IMF를 졸업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IMF 때문에 거리에 내몰린 노숙인들은 거리에서 죽어가거나 여전히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정일용 인의협 공동대표는 "IMF 때에는 오히려 노숙인들이 실직자로 포장돼 혜택을 받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관심에서 점점 멀어짐에 따라 노숙인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돼 가고 있다"면서 "정부는 노숙인들의 존재를 감추려 하지 말고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해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 대표는 구체적인 대안으로 △노숙인 상설 현장 진료소 확충 △노숙인 전문 2·3차 진료병원 설립(알코올·정신질환 전문병원 등) △거리 노숙인을 위한 전문 쉼터 설립 등을 제시했다.

노숙인 사망률, 일반인보다 2.7배 높아
2001년 통계청 자료로 알아본 노숙자의 사망실태와 사망원인

▲ 추모제에 참석한 노숙인들
ⓒ임경환 기자
이날 추모제를 맞이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통계청의 우리나라 전체 사망자료를 이용해 노숙인들의 사망실태와 사망원인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한 해 동안 사망한 노숙인의 수는 217명(전체 약 1만4000명). 일반인이 한 해에 약 25만 명(전체 약 4500만명)이 사망한다고 한다면 일반인에 비해 노숙인의 사망률은 약 2.7배정도 높다.

인의협 주영수 교수는 "일반인보다 사망률이 2-3배 정도 높은 집단이 있다면, 정부는 이 집단이 생존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특별관리를 해 줘야 한다"면서 "이러한 집단에게 의료지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또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노숙인의 평균연령은 48.3세로서 일반인의 평균 사망연령인 66세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노숙인들의 사망원인으로 가장 흔한 것은 사고와 관련돼서 발생하는 손상, 중독, 외인성 질환(34.1%)으로 조사됐고, 간장질환(13.4%), 악성종양(12.4%), 순환기계질환(11.5%)이 그 뒤를 이었다.

주 교수는 "일반인의 주요 사망 원인이 악성종양과 순환기계질환임을 감안해 볼 때, 손상, 중독, 외인성 질환과 간장질환은 노숙인에게만 특별히 심하게 나타나는 질병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으로 노숙인들의 사망원인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동사(凍死)는 217명 가운데 1명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 밖에 노숙인들은 4월과 9월에 가장 많이 사망하고, 서울 등 수도권에 전체 사망자의 3/4가 집중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 임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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