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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첫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세종로 이순신 동상의 자리를 차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기에 영화는 일본 식민지가 된 한국을 묘사하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사진은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한 장면.
ⓒ 인디컴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陰)

한 바다 가을빛 저물었는데(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驚雁寒陣高)
가슴엔 근심 가득 잠못드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과 활을 비추는구나(殘月照弓刀)


혹시 미남 배우 장동건이 열연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보았는지 모르겠다. 영화를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그 영화가 떠오르곤 하는데, 특히 영화의 첫 장면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교보문고를 찾거나 세종로를 지날 때면 생각나는 바로 그 장면, 충무공 이순신 동상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이 그것이다.

(역사에 있어 ‘만약’이란 가정의 무의미함을 알지만) 만약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때 왜(倭)가 한반도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거나 그 이후에라도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면, 영화에서처럼 세종로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이 차지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 이순신 장군상 뒤로 세종문화회관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경복궁, 북악이 보인다. 세종로는 한국의 정치․경제․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나, 거기에 ‘사람의 따뜻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듯 하다.
ⓒ 권기봉
아마도 영화에서 ‘세종로를 차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을 첫 장면으로 설정한 이유는 한반도의 일본화를 ‘단칼’에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만큼 세종로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상징 도로, 세종로

지난 2002 월드컵 당시 4강 신화를 이룩한 월드컵 대표팀이 카 퍼레이드의 종착지로 삼은 곳도 이곳 세종로요, 각종 관제 행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곳 역시 여의도 광장(지금은 여의도 광장도 공원으로 바뀌었다) 아니면 이곳 세종로다.

소프트웨어적인 ‘행사’들 뿐만이 아니다. 하드웨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들만 보아도 세종로는 가히 우리나라의 중심이다. 과거의 권력을 상징하는 경복궁이 세종로가 시작되는 곳에 자리잡았고, 현재의 정치 권력을 상징하는 청와대가 지척이다.

현대 관료 정치 체제를 한눈에 보여주는 정부종합청사와 자칭 한국의 문화 수준을 대변한다는 세종문화회관이 세종로 서쪽에 위치해 있고, 반대편에는 전경들에 의해 둘러싸여 함부로 접근하기조차 겁나는 미국 대사관과 개발시대 한국 관치경제의 대표주자 중 하나였던 KT(옛 한국통신) 사옥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주변 건물들뿐만 아니라 세종로 스스로도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널찍한 도로를 독차지한 자동차들과 땅속으로 들어가야만 길을 건널 수 있는 보행자들로 양분되는 불친절한 풍경이 한 예이고, 한국 대표 도로인 만큼 도시 환경 정화를 위해 깨끗이 ‘청소’한 나머지 노점상 하나 들어가기 힘든 곳이 세종로다. 이 정도만 보아도 세종로의 ‘위상’과 그것이 갖는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

▲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반공(反共)을 국시로 내걸고 강화도나 화성 등에 남아 있는 각종 군사유적을 복원하게 된다. 특히 1968년에는 세종로의 세종대왕 동상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앉힌다. 당시 권력자는 ‘문약한’ 세종대왕상을 뜯어내고 ‘상무(尙武) 정신’의 표본인 이순신 장군을 택한 것이다.
ⓒ 권기봉
이승만이 먼저 차지한 세종로

‘자칭’ 권력의 거리, 문화의 거리, 경제 개발의 거리 중심에 바로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혹은 찬바람이 거세도, 제아무리 햇볕이 쨍쨍 내리 쪄도 그는 그저 담담하기만 하다. 한국의 상징 도로 세종로의 중심 위치에 서있는 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세종로가 지금처럼 넓혀지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이후 처음 이곳을 차지한 이는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거대한 동상 자리였던 것이다. 특히 이승만의 동상은 서울만 해도 탑골공원이나 남산 등 곳곳에 만들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57년 8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남산 중턱 일제의 조선 신궁터에 세웠던 동상일 것이다.

이 동상을 만든 이는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도 불렸던 친일파 윤호중(창씨개명 후 伊東孝重)으로, 당시 3억 원의 거금을 들여 총 높이 25m에 동상 높이만 7m나 되는 대규모의 동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1960년 4·19의 함성은 이승만과 그의 동상을 비껴가지 않았다. 성난 시민들은 4.19 직후 그의 동상이란 동상은 모두 철거해 새끼줄에 묶어 끌고 다니게 되는데, 당시 만들어졌다는 다음의 시가 압권이다.

▲ 4.19혁명의 함성은 이승만뿐만 아니라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들도 지나치지 않았다. 시위대는 ‘독재자 이승만’을 외치며 이승만의 동상을 깨뜨려 거리에 질질 끌고 다녔고, 우익깡패 김두한은 청년들을 동원해 현재 남산식물원 자리에 있던 이승만의 동상 역시 철거했다.
ⓒ 김천길
“하늘이 남산을 내실 제는 사사로운 소유가 아니었으니, 백성을 모두 바라볼 제 바위와 바위로 덮였어라. 화강암 덩어리를 붙여서, 이 가까운 곳에 세워 놓고 서울을 온통 위압케 하였는가? 구리로 부어 만든 스물세 척 커다란 몸, 큰 비용과 공병의 힘 휘둘러가며 이루었네. 스스로 공명한 당의 대(大)두령이라고 하는 사람이, 개돼지를 충동질하여 높은 덕인 듯 찬양케 했네. 이로부터 바람에 마비된 늙은 여유의 동상. 삼 억이나 되는 나랏돈 헛되이 써 버려 말리었네. (중략) 이는 곧 구리 몸이요, 생살로 된 몸이 아니니, 늙은 도적놈을 찾아내라고 우리들 허정에게 외쳤네. 찾아도 잡지 못하자 분한 마음 더욱 뜨거워 구리 몸을 끌어내려 마음대로 깨뜨렸네. (후략)" - 리가원 〈김창숙의 이승만 동상가를 차운하여〉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을 밀어내고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은…

이처럼 세종로의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철거된 이후 1968년 이순신 동상이 들어서기 전까지 세종대왕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동상을 철거한 이후 그냥 두기는 썰렁해 보이고 무엇을 하나 세우고 싶긴 한데 가장 적합한 이가 세종대왕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이가 세종대왕이기에. 여하튼 이승만이 있던 자리는 세종대왕이 잠시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충·효·예와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던 1960년대 후반의 박정희 정권 시절, 세종로 한쪽 끝의 광화문을 시멘트로 멋들어지게 복원(?)한 박정희는 ‘문약한’ 세종대왕상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글월의 힘보다는 ‘상무(尙武)’를 중시하는 사회, 아니 권력자는 세종대왕 동상의 대안으로 왜를 물리쳐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막아낸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순신 장군은 성왕 세종대왕을 제치고 한국의 대표 도로 세종로를 ‘접수’하게 된 것이다.

▲ 시인 김남조의 남편이기도 한 김세중(옛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만든 이 이순신 동상에 대해 말들이 많다. 왜 항장처럼 오른손으로 칼집을 잡았느냐는 것에서부터, 갑옷은 왜이리 길며, 고개는 왜 숙이고 있는 것인 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 권기봉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김세중(1928-1986)의 이 이순신 동상을 두고 말들이 많다. 먼저 왜 오른손으로 칼집을 잡았느냐는 것이다. 즉 적에게 항복한 장군은 적의(敵意)가 없다는 의미에서 오른손에 칼을 드는데(대부분이 오른손잡이이므로 칼집을 왼손에 쥐어야 싸우기에 적합할 것이다), 마침 세종로의 이순신 동상 역시 마치 항장(降將)처럼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길이나 굵기에서 보이듯 이순신 동상이 잡고 있는 칼은 실제 전투를 할 때 쓰는 칼이 아니라 의식(儀式)용으로 이용하던 칼로 보인다.

동상 제작자의 말을 직접 들은 바 없어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현충사나 독립기념관, 박물관 등에 가보면 장군이나 병졸들이 실제 전투를 할 때 쓰는 칼은 적을 베기 좋도록 상당히 날카롭고 날렵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손아귀에 잘 맞는 크기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이 들고 있는 칼은 전투용 칼이라기보다는 의식용 칼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굳이 칼집을 왼손에 쥐고 적에게 대항하는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모 텔레비전 CF에는 이런 이유 때문인 지 칼집을 왼손에 든 이순신 장군이 등장한다.)

▲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순신 장군의 표준 영정으로,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묘사한 이순신에 입각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징비록>에는 "순신의 사람된 품이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아담하여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 같았으나 가슴에 담력이 있어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본래부터 수양해온 소치라 하겠다”고 적고 있다
ⓒ 장우성
또한 활동성이 보장되어야 할 장군의 갑옷이 너무 길어 자칫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할 수도 있고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의 표준영정과 얼굴 모습이 다르다는, ‘합리적인’ 지적도 있고 보면 역설적으로 이순신 장군과 그의 동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왜 장군이 마치 사색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냐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고개를 바로 들거나 치켜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처럼 적당하게 숙이고 있는 것이 더 위엄 있어 보이기고 하지만, 이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

즉 동상을 만든 작가의 작업실이 좁아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인’ 장군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원래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 때에는 15자 정도의 크기로 만들었는데 작품이 작다고 21자로 늘렸고, 또 여기에 투구를 씌우니 22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세종로는 이순신 장군의 ‘바다’로 남아 있을까?

그런데 이승만을 거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으로 이어지는 ‘세종로 주인’ 자리를 앞으로도 이순신 장군이 계속 독차지할 수 있을까. 왜로부터 조선을 지켜내 식민지화를 막아낸 이순신 장군 말고 다른 의미의 역사 인물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이 자리에 계속 동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선입견 아닐까.

즉 동상을 아예 걷어내자는 주장은 너무나도 불경스러운 생각일까.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국민이 무엇을 시대적인 가치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떠한 합의 절차를 거쳐 이러한 ‘영웅’이 결정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일단 이순신 장군 등이 분명 위대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이 자리를 차지한 데에는 사회적 합의라기보다는 당시 최고 권력자의 입김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경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영웅’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세종로 한 가운데 ‘서 있던’ 이승만 대통령상과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 이와 같은 역사 영웅을 내세우는 권력자들의 ‘은근한 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 지에 대해.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이었던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왜의 함선에 비해 목재가 튼튼하고 규모가 커 내구성이 상대적으로 좋았으며, 전투원의 위치가 왜의 그것보다 높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 권기봉
▲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랫부분에는 1592년 처음 만들어졌다는 거북선 동상이 놓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선으로 거북선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 당시의 주력 전투선은 판옥선이었으며, 거북선은 주로 ‘돌격선’으로서의 보조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권기봉
▲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기단부에는 당시 해전을 본떠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부조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남긴 『난중일기』 등으로 대표되는 기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텐데, 이순신 장군이 초급장교 시절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할 때는 『함경도일기』를 쓰기도 했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오는 12월 22일(日)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 앞 바다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는 적의 주력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날(1598년 음력 11월 19일, 공의 나이 54세)로, 당시 적선 2백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점점 싸늘해지는 겨울, 그를 생각하다 서울 세종로를 찾았다.

이 글은 컴퓨터 전문 월간지 'PC사랑' 12월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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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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