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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부터 우리 연립주택 현관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한 고양이 가족은 이제 여러 가지 형태로 내게 크다면 큰 짐이 되어 있다. 지난가을 화단 가운데다 컴퓨터 책상을 이용하여 만들어준 집도 날씨가 추워지면서부터는 외면을 하고 겨울밤의 잠자리를 어디에서 해결하는지 모를 고양이들은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현관으로 와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다. 그것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우리 집의 현관문 하나가 낮이나 밤이나 열려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할 터이다.

고장이 나서 떼어놓은 한쪽 문을 아직 고쳐 달지 않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고양이들을 거두어주고 있는 내 '의지' 때문에, 문을 고친다 해도 우리 집 현관문은 길래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내게서 밥을 얻어먹으며 우리 집 현관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고양이 가족의 존재를 번연히 알면서 누군들 박절하게 현관문을 닫을 수 있겠는가. 내가 고양이들을 거두어주는 일을 계속하는 한, 우리 집 현관문 하나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밤에도 그냥 열려져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생각하면 그것 역시 현관을 함께 사용하는 아래층과 위층 4개 집 가족들에게 적이 미안한 일이다. 고양이들 때문에 생겨나는 불편은 적지 않다. 고양이들 중에는 배뇨와 배변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는 놈이 있어서, 내가 매일같이 치르고 감내하는 고초도 적지 않다. (이 부분과 관련하는 이야기는 다음 글에 소개하겠다.)

아무튼 고양이들에게, 그리고 끈질기게 고양이들을 거두어주고 있는 내게 반감과 불만이 큰 앞집 은옥엄마도 이제는 나와의 신경전에서 한 발 물러선 듯한 모습이다. 며칠 전에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현관 물 청소를 한 다음 고양이 밥그릇들을 화단 앞에다가 내어놓았는데, 다음날 비가 내렸다. 그 비를 핑계로 내가 다시 슬그머니 고양이 밥그릇 두 개를 현관 안에다 들여놓았더니, 은옥엄마는 내 극성에 손을 든 듯 애써 무관심한 표정이다. 나는 겨울철 동안은 고양이 밥그릇들을 현관 안에 놓는 것을 고수할 작정이다.

이미 벌써 서너 번이나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를 썼기에, 고양이 얘기를 다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하면 내가 너무 한가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밖에 안 될 것 같기도 해서였다.

그런데 의외로 나의 '고양이 이야기'들을 잊지 않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그 다음의 일들을 궁금해하는 말들을 접할 때는 괜히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 뜻밖에도 고양이들은 내게 많은 이야기 거리들을 안겨 주고 있다. 배뇨와 배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애 고양이와의 사연, 나의 신중치 못한 실수로 그만 최근에 고양이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만 데서 안게 된 상심 등은 꼭 기록을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우선 내가 그 동안 보고 접했던 어미고양이의 모성애에 대해서 기록을 하겠다. 어미고양이의 모성애는 내가 그들 고양이 가족을 거두어주고 있는 이유랄까, 하나의 확실한 근거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현관에서 다시금 고양이들의 야옹 소리가 들린다. 어떤 놈들은 지금 우리 집 문 앞에서 거실 안의 내 기척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30분쯤 후에 나는 잠시 일을 멈추고 밖에 나가 동네 주변 아홉 개의 가로등과 방범등을 꺼야 한다. 등들을 끄러 돌아다니면 고양이들은 또 나를 강아지들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아침마다 나를 만나는 고양이들의 기쁨을 피부로 느끼곤 한다. 나를 따라다니는 놈들의 날렵한 뜀박질에서 나를 그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오늘도 맛있는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인지 나를 따라다니는 놈들의 뜀박질은 참으로 경쾌하고도 날렵하다.

어린것들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미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면에서 새끼들과는 다른, '어른'다운 점잖은 모습을 보여 주는 어미도 이른 아침에 나를 만나면 나를 쫓아다니는 발걸음이 누구보다도 재빠르다. 아마도 어미한테는 나를 만나는 기쁨이 새끼들보다 좀더 크리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새끼들까지 또 하루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사실을 함께 기뻐하리라는 생각이다.

지난여름 비밀 장소에서 세상 빛을 본 새끼들은 이제 다 자랐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어미와 새끼들을 전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세 마리의 새끼가 며칠 전부터 두 마리로 줄어들었지만, 내게서 밥을 얻어먹는 고양이는 현재 모두 네 마리다. 한 마리는 분명히 한배 새끼가 아닌데도 어렸을 때부터 끼니때면 나타나서 밥을 얻어먹더니 이제는 완전히 한 가족이 되어버렸다.

나는 녀석들의 머리통이 점점 커지는 것에 맞추어 밥그릇을 큰 것으로 바꾸었다가 녀석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하나를 더 놓아주었다. 실은 새끼들에게 양보를 하고 밥을 먹지 못하는 어미를 위해서 밥그릇을 하나 더 마련해 준 것인데, 그래도 어미는 양보를 하다가 새끼들이 실컷 먹고 물러난 후에야 먹는 때가 많다.

새끼들은 어렸을 때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밥을 먹곤 했는데, 몸피가 커진 후로는 으르렁거리고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밥을 먹는다. 생선국에 말아준 맛있는 밥일수록 놈들의 다툼은 더욱 심해진다.

새끼들이 소리를 내며 밥을 먹을 때는 더욱 어미는 뒤로 물러난다. 모성애의 발동으로 새끼들에게 양보를 하는 것인지, 어린것들과 치사하게 다투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는 것인지, 그런 어미를 볼 때마다 나는 아리송해진다. 고양이 세계에서는 저 야생의 맹수들과는 달리 장유유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가보다는 생각도 들곤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좀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어미가 밥그릇 하나를 차지하고 밥을 먹을 때 새끼가 오면 전혀 경계나 위협을 하지 않고 같이 먹거나 양보를 하고 물러난다. 반면 새끼가 먹을 때 어미가 접근을 하면 새끼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그에 따라 어미는 몸을 사리며 물러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고양이 세상이나 인간 세상이나 어떤 면에선 공통적인 점이 있는 것 같다는 모호한 생각을 하면서 쓴웃음을 짓곤 한다.

밥을 먹고 난 고양이들은 내가 현관 구석에 두툼하게 깔아준 신문지 위에 앉아 서로 몸을 맞대고 식곤증을 즐기는데, 그럴 때마다 어미는 꼭꼭 새끼들의 몸을 핥아주곤 한다. 몸피는 같아졌으되, 그렇게 핥아주는 것으로 해서 놈이 어미라는 것이 다시금 확연해지곤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어미가 장애를 안고 있는 새끼를 좀더 많이 핥아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쪽 뒷발과 방광과 항문에 장애가 있는 새끼의 얼굴과 몸은 물론이고 지저분한 엉덩이도 자주 열심히 핥아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쩌면 어미에게 장애를 겪는 새끼에 대한 측은지심 같은 것이 작용하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완전히 성장한 새끼들은 식사 후 식곤증을 즐기다가도 어미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배 밑으로 파고들곤 한다. 젖꼭지를 찾는 짓이다. 어미는 이제 다 큰 새끼들의 몸피 때문에 자신의 몸이 들려 올려지는 상황인지라 자꾸 몸을 피하곤 한다. 그러다가 한 번은 젖꼭지가 아팠던지 버럭 화를 내며 앞발로 새끼를 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그리고 새끼들이 좀더 성숙했기 때문인지 새끼들이 어미 젖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이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어미가 새끼들을 핥아주는 것은 여전하다. 놈들은 한참 각기 떨어져 있다가 만나게 되면 으레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새끼들은 어미에게 엉덩이를 보이곤 한다. 그러면 어미는 엉덩이 검사를 하듯 잠시 살펴보고 핥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놈이나 그러하지 장애를 가진 놈은 오히려 엉덩이를 감추는 본새다. 엉덩이가 지저분해서 부끄럽기 때문인지, 거기에 통증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장애를 가진 새끼에 대한 어미의 일종의 편애 장면을 나는 두 번이나 목격하고 크게 감동을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새끼들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근처 통닭 집에서 던져 주었는지 닭고기 한 점을 물고 화단으로 온 어미는 장애를 겪는 새끼 앞에 그것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다른 새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오래도록 고양이들을 지켜보았다. 닭고기는 생고기여서 내가 빼앗아 잘게 찢어줄 수도 없었다. 장애를 겪는 새끼 고양이는 고기를 받아 물고 씹다가 뱉고, 다시 씹고 뱉고 하다가 한참만에 겨우 삼켰는데, 그렇게 고기를 삼킬 때까지 어미 고양이는 줄곧 새끼를 지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 어미 고양이는 며칠 전 우리 집 현관에서 앞집 은옥이네 김장 공사가 벌어질 때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통닭 집에서 또 한번 고기 한 점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물고 김장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현관으로 와서는 야옹 소리로 새끼를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애를 겪는 새끼가 나타나자 건네주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본 여자들이 감탄을 할 수밖에. 어쩌면 그 광경을 본 것 때문에 은옥엄마의 고양이들에게 대한 반감이 조금은 완화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어미 고양이가 지금 몇 살이나 되었고, 새끼를 몇 번이나 낳았는지 따위를 나는 전혀 모른다. 처음부터 내가 기른 고양이가 아니니 알 수가 없다. 어디에서 살다가 어떤 연유로 우리 연립주택 현관으로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참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놈에게는 노숙한 기미도 있는 것 같다. 나를 완전히 주인으로 알고 나만 나타나면 다가와 절을 하고 내 다리에 몸을 비비고 내 앞에서 뒹굴며 재롱을 부리기도 한다. 한쪽 눈이 멀었는지 눈 색깔이 각기 다르다. 흰색의 눈은 필경 먼 눈일 것이다. 왜 한쪽 눈이 멀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어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생선을 오래 안 먹은 탓일 거라고도 하고, 너무 짠 음식을 많이 먹은 탓일 거라고도 한다.

나는 어미 고양이의 지난여름의 한가지 모습을 잊지 못한다. 새끼들이 아직 어릴 때였다. 그날 따라 신문 배달이 늦어서 일찍 뜬 여름의 아침해가 동동해서야 신문 배달 오토바이가 왔다. 그때 나는 현관에 나와 있었다. 오토바이의 출현에 놀란 고양이 새끼 두 마리는 현관 구석으로 몸을 감추었는데, 한 놈(그 놈이 수컷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은 그냥 현관 문 앞에 앉아서 오토바이 쪽을 보고 있었다. 신문 배달 직원은 오토바이에서 내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다가가서 신문을 받는데, 배달 직원은 고양이들을 가리키며 저것 좀 보라고 했다.

내가 돌아서 보니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의 뒤에 붙어 서서 앞발로 새끼 꼬리를 밟고 있었다. 그리고 오토바이가 떠난 후에야 발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는 어미 고양이가 아무 생각 없이, 저도 모르게 새끼의 꼬리를 밟고 있었다고는 보고 싶지 않다. 의도적으로 앞발을 내밀어 새끼 꼬리를 밟고 있었음이 참으로 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고양이들에게 좀더 관심을 갖게 된 일차 계기였다.

그런데 생각하면 참 아쉽다. 어떤 위험을 감지하고 철없는 새끼가 오토바이 쪽으로 뛰어나가지 않도록 새끼의 꼬리를 밟고 있었던 어미 고양이가 왜 며칠 후에는 내 차 밑에 있던 새끼 한 마리를 챙겨 주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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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