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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환은 한갓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를 갚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기필코 여러분을 지하에서 도울지니 바라건대 동포 형제여 아무쪼록 더욱 분투…" (민영환 동상에서)

▲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왼쪽에 쓸쓸히 서 있는 민영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그이지만,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채결된 '을사조약'에 항의해 자결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하게 된다.
ⓒ 권기봉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던 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 식민 조국에 금메달을 안겨준 손기정 옹과 트럭 한 대로 시작해 종합물류회사 한진그룹을 일으킨 조중훈 회장 등, 11월 들어 굵직한 삶을 살아온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근 백년 전의 11월에도 굵직한 인물들이 스러져 갔다. 특히 지난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에도 한 인물이 자결이라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저버렸다. 그리고 그 죽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연쇄적인 죽음을 몰고왔는데, 대한제국 말기 시종무관장을 지낸 충정공 민영환이 바로 그다.

호조판서 민겸호의 아들로 입양된 민영환은 고종 15년인 187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판서와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한성판윤 등에 오르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사직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이 출중했던 그를 권부에서는 가만히 두지 않았고, 이듬해 4월 러시아황제 대관식과 영국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연 등에 그를 특명전권공사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서구의 신(新)문물에 눈을 뜨게 되는데, 민씨 일가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하게 개혁성을 띤 인물로 분류되게 된다. 명성황후의 조카였지만 이 같은 이유로, 당시 보수 세력의 대표격이었던 민씨 일가로부터 큰 미움을 사기도 했다.

▲ 호조판서 민겸호의 아들로 입양된 민영환은 형조판서와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 등에 오르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러시아황제 대관식과 영국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연 등에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구의 신(新)문물에 눈을 떠 민씨 일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개혁성향을 보이게 된다.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등의 자체 개혁을 통해 조국을 암흑 속에서 건져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협회를 열심히 지원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던 민영환.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04년 4월 14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어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이 국가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잃는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이 대표적인데, 그는 곧바로 조약의 완전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 등을 골자로 하는 상소를 몇 차례에 걸쳐 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의 정치는 일제와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친일파 등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고 황제도 실권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요구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이나 유럽 등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지원하거나 만주나 간도로 넘어가야 했을까? 아니면 세를 규합해 도성(都城) 안에서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기거나 계속적인 상소를 올려야 했을까? 그러나 적절한 정답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더 상실감이 컸고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답답한 심경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민영환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황제와 국민들, 한양에 있는 외국 사절들에게 각각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지금 인사동 한미은행 앞에 있던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을 한다.

이 죽음은 민영환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라 을사조역 체결 후 함께 궁에 나아가 조약 체결 반대를 하기도 했던 조병세를 비롯, 적지 않은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특히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민영환이 이완식의 집에서 자결한 이후 피묻은 칼을 상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의 피 묻은 곳을 뚫고 올라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절죽(節竹)'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나무다.


▲ 민영환이 자결한 이후 피묻은 칼을 상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인 1906년 5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의 피 묻은 곳을 뚫고 올라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민영환의 충정이 혈죽(血竹)이 되어 결국 '절죽(節竹)'이 되었나 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민영환이 택한 방법은 자결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힘없는 개인으로서 가장 깨끗한 항의의 방법이자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고 황제에게 예를 다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쉬움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부러운 감정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마도 지금의 상황과 너무 비교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굳이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서도 IMF 구제금융을 받는 등 역사적 치욕을 당하기도 했고, 일부 몰지각한 기업주들은 내부자거래나 불법대출, 무차별적인 문어발 경영 등으로 국가 경제에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반성이나 사죄는커녕 '떳떳한' 자세로 자기 변호에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남은 재산을 뒤로 빼돌려 추징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자결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니 응당 책임 있는 자세를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자동차에 밀리고 현대인에게 버림받은 동상, 거리를 떠돌다

이런 아쉬움과 부러움을 가슴 한 켠에 가지고 민영환의 충절을 기리는 동상을 찾아가 보았다.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서울 인사동 한미은행 근처인데, 지금은 이를 기리는 조형물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끌지 못한 채 외로이 한 겨울의 찬바람을 맞고 있다.

그래도 이건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의 동상은 일단 서 있는 위치도 적절치 못할 뿐만 아니라, 동상을 만든 이도 알고 보면 친일(親日) 인사이기에 이미 죽은 이를 두 번 죽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 동상은 낙원상가 쪽에서 운현궁을 지나 헌법재판소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안국동 네거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의 도시답게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지금과 같이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으로 이전되었고, 서울시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동상이 서 있어 방해가 된다는 창덕궁 관리사무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이 동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미 일제 치하 반세기를 잊고 나라 잃은 설움을 잊은 우리들이 해온 일이 이렇다.

▲ 나라가 일제에 넘어간 데 비분강개해 자결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택한 그이지만, 정작 동상을 만든 이는 친일작가 윤호중이다. 이 동상은 윤호중이 1956년 만든 것으로, 4·19로 동상이 끌어내려지기 전까지 남산에 서있던 이승만 동상을 만들기도 한 인물이다. 사진에는 이름이 '윤효중'으로 보이지만 '윤호중'이 맞다.
ⓒ 권기봉
친일인사, 충직한 신하의 동상을 만들다

▲ 윤호중
그래, 장소 문제라면 추후에라도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니 널리 이해심을 가져보자. 그런데 그 동상을 만든 이가 적절치 못한 내력, 즉 친일 경력을 지닌 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지금 창덕궁 앞의 민영환 동상은 1956년 친일 미술가인 윤호중이 만든 것인데 4·19로 동상이 끌어내려지기 전까지 남산에 서 있던 이승만 동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경력'과는 달리 이순신 동상 등 항일 인사들의 동상을 만들기도 한 바 있다.

결국 1940년대 특히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친일파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점령을 자결로써 반대한 인물의 동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광복을 하고도 11년이나 지난 후까지도 유력한 조각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으니 당시의,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예술가들을 지원했던 권력자들, 즉 그들도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이들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몰상식'과 '염치없음'에 혀가 내둘러질 뿐이다.

우리네가 기념한다는 것들은 왜 이렇게 뚜렷한 한계가 드러나는 것일까. 비단 민영환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공평동 100번지 제일은행 본점 앞에 서 있는 김상옥(金相玉) 의사 의거 기념비(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투탄)만 하더라도 알고 보면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시 종로경찰서가 있었던 종로 YMCA 옆 장안빌딩 앞에 서 있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제일은행 본점 자리는 조선시대 때 의금부가 있었다는 것 말고는 김상옥 의사나 종로경찰서와 별반 관련이 없는 자리인 것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고증조차도 충실히 하지 않았을 것이란 추론을 가능케 해주는 것일 뿐이며, 만약 고증을 했는데도 그 자리에 세운 것이라면 이는 김상옥 의사나 다른 독립 투사들을 모욕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소홀히 대접받거나 무시되는 우리 사회. 전혀 엉뚱한 자리에 독립 투사의 기념비가 세워지고, 무엇이 떳떳하다고 광복 이후에도 친일 조각가가 유력한 미술가로 인정받고 또 그런 친일 인사가 항일 인사의 동상을 만드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 오는 2003년에는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지, 이런 몰상식이 계속 되는 것은 아닐는지 그저 염려스럽기만 하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1월의 창덕궁 앞, 길손은 복잡한 심사를 거두지 못한다.

▲ 왜 민영환 동상이 여기 서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민영환과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이곳보다는,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 그가 자결한 지금의 인사동 한미은행 앞에 있는 이완식 집터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 권기봉
▲ 대한제국이 일본에 넘어가는 데 있어 '큰 책임'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힘든 민영환. 그는 황제의 신하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의식에 몸둘 바를 몰라 결국 자결한 것으로 보이지만, IMF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을 당하는 오늘의 한국에서 이런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는 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 권기봉


창덕궁 앞 민영환 동상 찾아가기


윤호중이 만든 민영환의 동상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의 왼쪽에 서 있는데, 종로3가역이나 안국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금새 닿을 수 있다. 즉 역에서 나와 창덕궁 방면으로 걸으면 되는 것이다.
한편 민영환이 자결한 이완식의 집은 인사동 한미은행 앞으로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내리면 그리 힘들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즉 역에서 밀레니엄타워 앞쪽으로 나와, 조계사 방향으로 걷는다. 그러다가 오른쪽으로 공평빌딩이 보일 때 건물을 돌아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으로 한미은행이 보인다. 바로 민영환이 자결한 터이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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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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