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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사위원회의 '인혁당 고문조작' 발표 후 두 달간의 침묵을 깨고 14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이용택 전 중앙정보부 6국장(73).
ⓒ 오마이뉴스 김정훈

"인혁당 실체는 있었다 그러나 가혹행위는 없었다." / 김정훈 기자

지난 9월 아쉬움 속에 활동을 잠정 중단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원회)가 지난 14일 국회 법개정을 통해 활동기한을 1년 더 연장하게 됐다. 의문사위원회가 비상임위원들이 새로 위촉된 후 내년 봄부터 활동을 재개하면 30여건의 미제 사건들의 조사 작업도 활기를 띌 것으로 보인다.

미제 사건들중에는 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이하 인혁당) 사건 관련자로 체포돼 옥사한 장석구 사건도 포함되어 있는데, 의문사위원회는 지난 9월12일 장석구 사건 중간발표에서 "1964년과 74년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발표한 1,2차 인혁당 사건은 모두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밝혀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이 재심을 추진하고 중정의 '고문 조작'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된 가운데 여론의 화살은 당시 중정 지휘부와 '주모자 8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대법원 판사들에게 모아졌다.

이용택(73, 농서장학회 이사장)씨는 1차 사건에서는 5국 대공과장, 2차 사건에서는 중정 6국장으로서 수사 지휘선상에 있었던 인물. <오마이뉴스>는 의문사위원회 발표 이후 두 달 이상 침묵을 지켜온 이씨와 최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이씨는 "인혁당이라는 반국가단체는 실존했다. 그러나 나 몰래 (부하들이) 고문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심은 있다. 분명한 것은, 나와 신직수 중정 부장(작년 9월 작고)은 직원들에게 '고문하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씨의 이 같은 발언은 지난 30여 년간 고문 의혹 자체를 일축해온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부하들의 우발적 행동 가능성'을 암시한 것으로, 설사 고문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지도부의 조직적 개입 의혹'을 회피하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이씨는 "고문당했다는 말들은 많은데, 증거는 없다. 간첩들치고 고문 안 당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의문사위원회도 원래 발표하기로 한 장석구의 사인은 얘기 안 하고 엉뚱하게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또 그런 걸 박수를 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씨는 "발표 내용에 승복하지 않지만, 의문사위원회의 조사기간 연장과 유족들의 재심청구를 환영한다"며 "수사 과정에서 불법이 드러나 판결이 뒤집힌다면 도리가 없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유죄로 인정한 사건을 행정부의 한 위원회가 뒤집는 것은 법치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1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 김대중 정부 들어 과거사를 재평가하거나 뒤집는 결정이 많이 나왔습니다.
"많이 나왔죠. 물론, 그 중에 옳은 것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수지 김 사건 같은 것... 그런데 사상범 관련 사건들의 결정들이 다 뒤집어지고 있어요. 그건 판결도 아닙니다.

(인혁당 사건을 의식한 듯)군사정부 하에서 1, 2심을 군사재판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민간법원인 대법원에서 심의해서 판결했습니다. 3권 분립이 이뤄진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심판을 한 사건인데, 판결이라도 해서 뒤집어야 할게 아닙니까? 그런데 판결도 없이 행정부 산하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서 그걸 뒤집어버려요. 우리 국민들이 그걸 또 전부 박수를 치고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드릴께. (의문사위원회가)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조사한다고 수십 명을 불러들였어요. 전부가 '최 교수는 자살했다'고 그랬는데, 딱 두 사람이 '타살됐다는 말이 있더라'고 했어요. 최 교수는 유럽에 있는 북괴간첩에게 포섭이 돼서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도 다녀왔고, 자술서도 썼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거는 채택을 안 하고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또 서울지검 이모 검사가 최 교수가 자살한 장소를 현장 검증했는데도 의문사위원회는 '가지도 않고 현장 검증했다'고 발표했어요.

- 지난 9월 발표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이하 인혁당) 사건도 그렇다는 겁니까?

선고 후 20시간만의 처형..."사법사상 암흑의 날"
재심 추진중인 유신시절의 대표적 인권유린 사건

중앙정보부는 74년 4월 "반유신 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민청학련 배후에는 친북이적단체 인혁당 재건위(이하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에 연루된 이철, 유인태 등의 배후에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여정남이 있고, 여정남의 배후에 64년 중정에 의해 조직이 와해된 인혁당이 있다는 것.

중정은 인혁당을 북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규정했지만,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4명이 "고문 의혹이 있어 피고들의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기소에 반발하는 등 진통을 겪은 바 있다. 1차 사건에서 각각 검찰총장과 중정 요원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신직수, 이용택씨는 10년 후 2차 사건에서는 중정부장과 6국장으로 재등장, 수사를 총지휘했는데, 의문사위원회는 "수사관들이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통해 조서를 허위 작성했다"고 밝혔다.

관련자 가족들의 무죄호소와 구명운동에도 불구, 계엄령 하에서의 군사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도예종 등 주요 관련자 8명은 75년4월8일 대법원에 의해 사형이 확정됐다. 이들은 다음날 오전 6시 전격적으로 처형됐고, 국제법학자협회는 사형이 집행된 75년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언했다.

재야법조계와 인권단체들은 인혁당 사건을 '민주화운동을 억압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고문 조작된 대표적인 인권 유린 사건'으로 규정해왔고, 의문사위원회의 발표에 힘입어 유족들은 재심 청구를 준비하고 있다. / 손병관 기자
"그 사건도 자기네들은 장석구의 의문사를 조사하는데, 원래 조사하기로 한 장석구의 사인은 조사 못했다면서 엉뚱하게도 '실체가 없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고문했다'고 하거든요.

그것도 나는 승복할 수 없어요. 조사받은 일도 없지만..."

-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요청에 불응하셨습니까?
"가려고 했는데, 미리 발표를 해버리더라구요. 발표를 먼저 하는데, 내가 엑스트라가 될 필요도 없고...

그래도 할 얘기가 있으면 오라던데, 내 얘기를 채택도 제대로 안 해줄 텐데 가서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가 있나? 못 가겠다 그랬더니 그쪽에서도 '좋다'고 그랬어요."

- 그렇다면, 의문사위원회의 인혁당 사건 발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혁당의) 실체가 있다는 증거가 있어요. 당시 북한 김일성이 '남조선의 민족해방전사들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하라'고 지시한 총화사업보고서라는 게 있었어요.

▲ 75년4월8일 대법원 선고 이튿날 처형된 8인의 인혁당 사형수들. (가나다순)
인혁당 관련자들은 '라디오를 듣고 그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데... 혹시 김일성의 연설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니라고 답하자) 그 사람 말이 굉장히 빠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다 받아 적었냐 이거예요.

추궁을 하니 관련자들은 이게 받아 적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동자들이) 16절지 넉 장에 깨알같이 써 가지고 모든 관련자들에게 교양을 했습니다. 이걸 옮겨 쓰더라도 탈오자가 생기는데.... 김일성의 라디오 연설을 듣고 받아 적었다는 것이 우리가 일본을 통해 입수한 원문과 글자 하나까지 똑같았어요."

- 받아 적은 게 아니라 직접 받았다는 얘기군요?
"누구한테 받았는 지는 말을 안 했지만, 틀림없이 이건 간첩이 갖다줬거나 누군가 북에 가서 가져왔구나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또 한 가지,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중에 증거가 불충분해서 반공법으로 가볍게 처벌받고 풀려났다가 1967년 간첩으로 체포된 사람이 김배영 등 3명이나 됩니다.

김배영은 북한 군인이 쓰는 권총과 실탄 3백발을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올림픽 사격대표 선수로 나가려고 그걸 가져왔겠습니까?

이렇게 관련된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과연 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냐 이겁니다. 실체는 있는데, 수사 과정에서 조금 무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건 난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로 인해 죽은 장석구의 사인은 규명 못하겠다? 실체적인 증거는 묵살하고 고문에 의해서 조작됐다?"

- 그래도 고문이 있었다는 얘기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고문을 했다'는 얘기를....이건 잘 들으세요. 내가 초등학교때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한 것으로 몰려 주재소(일제시대의 파출소)에까지 끌려가 하루종일 벌을 선 적이 있어요. 내가 지금도 잊지 않는데, 누명을 씌워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어요.

1949년 9월 대구농림고등학교 다닐 때는 빨갱이들이 모략을 해서 살인강도죄를 뒤집어쓸 뻔했어요. 붙들려가서 고문을 당하는데, 팔다리를 묶어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후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는 거예요.

숨쉴 때, 고춧가루가 코로 들어가는데 마치 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습니다. 고춧가루 물에 몽둥이 찜질에... 내가 이틀동안 당했습니다. 다행히 살인강도 사건이 있던 그날 헌병대와 함께 불온 유인물을 만들던 빨갱이를 잡으러 다닌 알리바이가 성립돼 빠져 나올 수 있었어요.

이렇게 당한 일도 있고, 미국에 가서 정보수사 교육도 받았습니다. 거기서 '100명의 죄수를 놓쳐도 1명의 양민을 억울한 죄인으로 만들지 말라'고 배웠어요.

중정에서 수사를 하면서도 매일 순찰도 하고, 아침 조회에서 직원들에게 강조했어요. 절대로 가혹행위를 하지 말아라. 만약 하면 네가 알고 있는 것 외의 여죄는 추궁 못한다. 그러니 승복시켜서 자복시키라고....

▲ "교도소에 외부의사 들어가서 진찰할 수 있는데 왜 고문 증거를 확보해놓지 않았나? 지금 와서 말로만 당했다, 당했다 하고 다닌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중정에서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법정 증인으로 나가기도 했어요. 거기 가서 '당신이 고문당했다는 증거를 내놔라'고 하면 증거가 없어요.

그저 말로만 당했다는 거예요. 반국가사범과 간첩들치고 중정에서 고문 안 당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나는 도저히 그런 게 이해가 안 간다 이거예요.

그러나 하두 고문당했다고 하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지만 내가 안보는 데서 나 몰래 (부하들이) 이런 걸 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심은 있어요. 의심은 있지만, 증거는 없단 말이예요.

교육하고, 순찰하고, 물어도 보고 그랬는데, 고문당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그리고 더더군다나 인혁당 사건은 실체적인 진실이 있는데, 고문 조작했다는 말은 말이 안되는 것 아닙니까?

너무 과잉 수사를 했다고 하면 또 그건 모르겠지만, 난 그걸 인정할 수 없다. 왜? 내가 고문하지 말아라... 내가 또 순찰을 해... 고문했다는 소리 들은 일도 없고... 교도소에 외부의사 들어가서 진찰할 수 있습니다. 진찰해서 고문당했다는 증거를 왜 확보해놓지 않고 있습니까? 지금 와서 말로만 당했다, 당했다....

- 당시 인혁당 관련자들이 처형당한 후에 일부 가족들에게는 (고문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곧바로 안 주고 화장을 한 후 인계하기도 했는데...
"그건 내가 중정 일을 그만둔 후의 일이기 때문에 모르겠는데... 판결 후 20시간만에 사형 집행한 것도 관례에서 벗어난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위법은 아니죠."

- 고문을 부인하고 있지만, 9월12일 의문사위원회 발표내용을 보면 64년 1차 인혁당 사건때 서울지검 공안부 장모 검사가 "당시 도예종 등이 윗통을 벗어 올리자 몸통에 지지고 멍든 상처가 있었다"고 말했고, 10년 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에 가담한 경북도경 수사관들도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1차 사건에서 고문 흔적 봤다는 검사 얘기는 다 거짓말이예요. 2차 사건의 진술 경찰관도 두 사람입니다. 자기가 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고문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뿐이예요. 그것도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 경찰이외에 교도관 진술도 있었습니다.
"나도 교도관이 '조사 받고 나서 걸음도 못 걷고, 많이 당한 것 같더라'고 진술한 걸 신문에서 봤는데..."

- 당시 수사책임자도 고문이 있었다 없었다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인데, 교도관과 검경의 진술이 이렇게 나오면 사람들은 '뭔가 있었구나' 하고 믿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내가 아까 3단계로 얘기했잖습니까? 첫째, 인혁당이라는 반국가조직 이적단체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둘째, 조사과정에서 조금 가혹한 무리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세째, 그러나 내가 매일같이 '고문하지 말라'고 교육했고, 순찰도 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신직수 부장도 '따귀 한 대도 때리지 말라'고 그랬고, 혹시 모르니 순찰을 강화하라고 해서 저 역시 지침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중정 국장이 사건 하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 이건 다른 얘기지만, 85년 김근태 의원을 고문했던 경찰관들도 고문하는 동안 자기들끼리 아이들 키우는 걱정 얘기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답니다.

또, 얼마 전 검찰에서는 수사관들의 피의자 고문 사망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있는데, 언론의 자유가 봉쇄된 유신시절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 깊숙한 곳에서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 그러니까 딱하다는 겁니다. 내가 입이 백만 개가 있어도 안 믿습니다. 안 믿게 되어 있을 거예요.

사법부의 보루라는 검찰에서까지 물고문을 했다는데, '물고문 = 박종철' 떠올리잖아요? 박종철 사건 당시 내가 국회의원이었는데, 경찰에 '경찰청에 박종철 동상을 하나 세워라. 그래야 너희들이 지나가면서 동상을 보면서 고문 같은 것 해서는 안되겠다고 느끼지 않겠나'고 건의했어요. 그런데 경찰은 창피하다고 안합디다."

정형근의 발전모델? 지역화합의 전도사?
이용택을 둘러싼 극단의 평가들

대구 달성에서 태어난 이용택은 50년 대구농고를 졸업한 후 한국전쟁이 터지자 학병으로 입대, 60년12월 대위로 예편했다.

군 복무시절 박정희를 보좌한 인연으로 이듬해 5.16 쿠데타이후에는 중앙정보부 창설멤버로 정보기관 업무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박정희의 총애속에 분실장, 수사과장, 수사국장으로 승승장구하며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그가 74년 말 중정을 떠나게 된 이유는 민청학련 학생들의 석방을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유신체제를 민주주의로 볼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기자들에게 '폭력혁명을 선동한 주모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들을 석방시킬 테니 데모 좀 안 하도록 선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화근이 됐다"고 설명했다.

중정을 나온 후 개인사업(보아기계공업)과 사회활동(불교청소년교화연맹)을 하던 그는 5공화국 출범 이후 무소속 국회의원(달성-고령-성주)을 두 차례 지냈다. 그러나 그는 96년 총선에서 대구 달서갑에 무소속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고, 이제는 정치에서 손을 뗀 상태.

중정 수사국장 출신의 국회의원이라는 그의 전력은 역시 안기부 1차장을 거쳐 한나라당 정보통이 된 정형근 의원을 떠올리게 한다. 이 같은 이미지 때문에 시국사건 관련자들로부터 곧잘 '유신 정치공작의 실무책임자'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가 97년 10월 국민회의에 전격 입당해 김대중 후보의 특별보좌역을 맡았고, 지난 7월까지 민주당 당적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그의 비판자들조차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TK 출신으로 '호남대통령 만들기'에 나선 돌출 행보에 대해 이씨는 "DJ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 DJ 진영에 합류했다"며 "DJ가 대통령이 되면 지역감정이 완화될 것이라는 계산이 결과적으로 틀렸고, '당선되면 달서에 공단을 지어주겠다'는 DJ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현재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회장)와 농서장학회(이사장)를 이끌고 있고, 14일 출범한 자유민주수호국민운동총연합 활동에도 정력을 쏟고 있다. / 손병관 기자

- 지금 의문사위원회를 새로 구성해서 미제 사건 조사를 계속한다고 합니다.
"나는 얼마든지 찬성입니다. 1년이 아니라 100년이라도 의문사는 조사해야죠. 10년 전 대구의 개구리 소년들도 사인이 나오잖아요? 그런 건 꼭 밝혀야 해요. 빨갱이라도 그런 건 해야지. 인간을 미워해서는 안되거든요. 죄인이라고 고문해서 죽이면 됩니까? 그건 밝혀야죠."

- 의문사위원회에서 시간이 부족해서 장석구 사건을 조사 못했다고 하는데...
"천만에요. 그건 아니예요. 시간은 충분히 있었어요. 그 사건 하나 가지고도 두 달 넘게 조사를 했는데.... 2∼3달해도 안되면 20년이라도 조사를 하라고 하세요. 나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찬성합니다."

- 새로 구성된 의문사위원회에서 조사에 협조해달라고 하면 응하실 겁니까?
"아, 응해야죠. 하지만 지금 얘기한 이상도 이하도 없어요."

- 당시 구명운동 하던 사형수 부인들도 중정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고 하던데...

"녹화를 하지는 않지만, 조사관실은 60년대부터 감독자가 항상 볼 수 있도록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 "중정 출신이라고 백정처럼 본다는 것은.... 다 배웠고, 가족 있고, 자식 키우는 사람들인데 아무려면 그럴 수 있었겠소?"
ⓒ 오마이뉴스 김정훈
벌건 대낮에 부인들 불러서 조사실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인들을 불러서 '왜 당신들은 우리가 하지도 않은 고문했다는 주장하고 다니느냐'고 주의를 줬을 수는 있을 망정 남편들이 다 잡혀와 있는데, 부인들을 어떻게....?

누구라고 얘기는 안 하겠는데, 나는 심지어 1차 인혁당 사건 직후 관련자 가족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이부자리 만들어 판다고 해서 찾아가서 이불 하나 사준 사람입니다.

사람을 감동시켜야지, 법으로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래서 내가 중정 그만두고 처음으로 맡은 게 불교청소년교화연맹 회장이었습니다. 교화 도량으로 삼으려고 절도 짓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중정 출신이라고 하면 몽둥이질하는 백정처럼 본다는 것은.... 우리도 다 배웠고, 가족이 있고,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인데 아무려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소?"

- 유족들과 인권단체에서는 인혁당 재판에 대한 재심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재심은 나도 희망해요. 나는 절대로 의문사위원회 발표를 승복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검찰의 재수사를 한 번 보자 이겁니다."

- 그런데 가혹행위가 없었다고 확언은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내 위치에서는 (고문이 없었다고) 확언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안볼 때 한 것까지 내가 자신 있게 얘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 설사 인혁당이 실존했다고 하더라도 "가혹행위에 의한 자백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판례가 있죠? 가혹행위가 확인될 경우 과거 판결이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은 있는데, 수사 과정에서 불법이 있다면 원래 진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례는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법률에 의한 것이니까 도리가 없는 거죠.

그러나 그런 절차도 밟지 않고 사법기관인 대법원까지 유죄로 인정한 사건을 행정부내 속하는 위원회가 아니라고 뒤집은 것을 전부 믿는다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는 거죠."

- 의문사위원회의 발표 이후 언론보도를 보고 곤혹스럽지는 않으셨어요?
"그런 건 없어요. 지금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 '고문 없었다'고 얘기한다고 믿어주겠어요?"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없나요?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문사위원회 조사는 필요하다. 대신,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발표해야지, 예단을 가지고 앞질러가서야 되겠는가 이겁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틀려 보일 수는 있지만, 인혁당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군사정부치하였지만, 대한민국 마지막 양심의 보루인 대법원에서까지 판결을 했는데, 의문사위원회의 발표만 믿을 수 있나?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린 사안에 대해서는 판단을 하기 전에 한번 더 짚고 넘어 가야죠."

이씨와의 인터뷰는 여기에서 끝났다. 당시 사건에 연루된 현역 정치인과 언론인에 대한 이씨의 얘기는 추후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의 권력기관들이 수사과정에서 철저한 인권 보호 의식을 견지했다면 검찰청에서 피의자가 구타당하고 물고문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혁당 사건은 권력의 인권경시 풍조가 최악에 도달한 결과라는 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크나큰 오점으로 남을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이씨의 반응은 의외로 당당했다. 의문사위원회의 조사도 피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의문사위원회의 80년대 녹화사업(강제징집 대학생 의식화 공작) 조사에 불응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 사망사건에 대한 조사를 회피하다 과태료를 부과당한 정모 검사의 태도와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고문조작이냐 정당한 법 집행이냐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의 생각은 인혁당 사형수 가족들의 그것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다. "고문 증거를 당시에는 왜 내놓지 않았냐"는 그의 반론에도 인권단체들은 "피의자의 변호사 접견도 일체 허용되지 않은 당시의 서슬 퍼런 분위기를 이씨가 몰라서 그런 말을 했겠나?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씨의 당당함이 진실인지 허세인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생존해 있는 권부의 핵심증인들이 이씨처럼 의문사위원회 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바램은 기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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