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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고려시대부터 선녀와 용신의 기원지에 선녀구름이....
ⓒ 권희덕
마이산의 돌탑은 매우 기이하다. 엄청난 태풍에도 수많은 돌탑들이 건재하다.

시멘트로 반죽한 것 같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673 m의 암 마이봉과 667 m의 숫 마이봉의 두 봉우리로 형성되어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 했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어 왔다.

서다산은 솟대처럼 장대같은 높이에 천신 선녀처럼 생겨서 신라의 화랑 원화 등이 순회하며 풍물예술단이 신라의 국운을 비는 신앙터전으로 매년 가무제사가 행하여진 소사(小祀)의 산이다.

산정상 두 곳에 작은 못이 있어 물이 고여 그 물에서 용이 산다고 하였다. 용왕신을 많이 신봉하던 고려시대에는 마이산 용이 꼭지점에서 오른다 하여 용출산 이라고 하였다.

고려시대 전라도관찰사 이규보가 이곳에 와서 마이산 단풍을 구경하는데 이곳사람들이 걸핏하면 산으로 사슴처럼 달린다고 하였다.

조선 연산군과 중종시대의 영의정 김수동(金壽童)이 이곳 마이산의 꼭대기에 사는 용을 어떻게 하여 풍년비를 내리기 위한 풍악 농악에 나발소리를 내보고 싶다고 하였다. 아마 김수동은 연산군 때에도 이런 산신의 기도 등 가무의 국가 제사행사에 와서 글을 남긴 듯하다.

▲ 코키리의 형상 마이산 바위의 단풍2002.11.4
ⓒ 권희덕
연산군 때에는 단군 숭배를 위하여 강화 마니산에 단군신전 중건하고 성균관의 공자신상을 꺼내고 곰. 호랑이를 사육하고 궁 밖에서 어린이 관람을 위한 국악공연 등을 행한 시기이므로 산천가무의 화랑도적인 행사가 대단한 큰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오랜 전통에서 이곳에는 증평 농악이 건재하게 고증되고 전수되고 있다.

또 중종시대 개혁 사림파 김종직 역시 여기에서 "내 이곳에 가을비 뒤에 오니 푸른색과 붉은 빛이 비단처럼 수를 놓았네 높은 곳을 오래 바라보노라 문을 열어놓고 밤을 세우고 바라보네.

신선은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오르는지 나도 세상의 더러움을 버리고 저 돌탑절집(碎石菴)에서 묵고 또 정상에 올라가서 신선과 노닐고 싶네" 하는 글을 동국여지승람에 기재했다. 그러니까 김종직이 벼슬에 오르기 전에 신선을 동경하는 선경의 경지로 살고 싶어 하였나보다.

▲ 마이산의단풍에 취한 관광가족들 2002.11.4
ⓒ 권희덕
쇄석암(碎石菴 )또는 쇄암사(碎巖寺)라는 잔돌암자 즉 지금의 돌탑들이 최근에 도사 이갑용이 처음시작이 아니고 김종직이 이곳에 왔던 중종시대에도 돌탑으로 된 암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이산은 경상도 관광객이 대단히 많다 대개 진안읍에서 자가용차로 오기에 북쪽마이산 부분만 구경하고 간다 그래서 보통 산으로 알고 있다가 후에 단체관광의 기회에 마령과 임실쪽에서 남쪽 마이산 돌탑골짜기를 보면서 감탄하며 이구동성으로 옛날에 와서 못 보던 곳이라고 말하는 분을 많이 본다.

10여년 전에는 골짜기에서 하늘로 올려보는 관광로를 잘 보이는 높은 곳으로 바뀌어서 전망이 좋아졌고 물을 막아서 뱃놀이와 조랑말타기 막걸리 사발과 안주 굽는 풍경으로 비교적 사람이 붐비지 않는 휴식관광의 적지가 아닌가한다.

그간의 진안 마이산 관광을 하였으나 기괴한 마령면의 마이산 비경을 못 보신 분이 대단히 많기에 이 사진을 기재한다.

▲ 못에 마이산이 비치고 갈대꽃이 구경하네 2002.11.4
ⓒ 권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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