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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어느 땅이든 역사가 없는 곳은 없다.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재만이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에는 무심하다. 유적이나 유물로서 역사를 더듬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지만 이 땅 어느 곳에도 우리 조상의 숨결이 서려있지 않은 곳은 없다. 비록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전설이 되고 설화로 꾸며져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고의 수리시설인 벽골제 옆에 위치한 김제시 부량면 제월리堤月里. 벽골제를 지난 부량면 소재지 중간쯤에 나있는 우측 도로를 따라 들어가 만나는 첫 번째 동네다. 이 마을에는 벽골제에 비친 달이 보이는 마을이라 해서 제월堤月이라 했다는 설과 벽골제의 물이 넘어가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제월堤越이라 했다는 유래가 전한다.

1789년 호구수를 조사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제월堤越로 기록돼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제월堤月로 적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마을은 놀랍게도 조선 선조宣祖시대 인물로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발명한 것으로 전해지는 정평구鄭平九가 태어난 곳으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설화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아직까지는 학술적인 연구와 고증작업이 미흡한 상태지만 김제지역 향토사학자들은 미국의 라이트 형제보다 300년이나 앞선 조선시대에 이 마을 출신인 정평구가 세계 최초의 비행기인 비차飛車를 발명했다는 기록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 비행기의 구조나 원리 등이 구체적인 사료史料가 전해지지 않아 정사正史에서 다소 비켜서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 정평구에 의해 비행기가 발명돼 전투에 사용했다는 기록은 여러 서적과 자료에서 발견됐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광문사廣文社에서 출판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제 38과 '고인古人의 復習方法(112쪽)'에 '정평구는 조선의 비거飛車(지금의 비행기를 뜻함) 발명가로 임진난때 진주성이 위태로울 때 비거로 친구를 구출해 삼십리 밖에 내렸다'고 쓰여있다. 이 책은 한글학자인 권덕규權悳奎 선생이 쓴 책으로 당시 학생들에게 조선어강독 교재로 사용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권덕규 선생은 다시 '조선사朝鮮史'(경성정음사京城正音社 간刊)를 보면 비행기의 존재와 발명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신경준申景濬(1712년 숙종38∼1781년 정조5)의 차제대책車制對策과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93)의 손자 이규경李圭景(1788∼?)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30리를 날았던 비차飛車의 존재를 확인하고 발명가를 정평구로 적고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보다도 무려 300년 이상 앞서 비행기를 발명한 셈이다. 또 라이트 형제는 동력 비행기로 4회를 비행했으며 첫 번째 비행에서 12초 동안 36m를 날고 마지막 4회 비행에서 59초 동안 날았던데 비해 이보다 먼 30리를 비행한 것으로 나타나 비거飛車의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고 있다.

정평구는 동래東萊 정씨鄭氏 대호군파大護軍派 명금파鳴琴派로 시조始祖 지원之猿의 19세손 계주繼周의 아들로 자는 유연惟演, 호는 평구平九이다. 명금파의 족보族譜를 보면 김제시 부량면 제월리에서 1566년 3월 3일 출생해 1624년 9월 졸卒로 되어 있으며 소시천재少時天才로 병법 축지법에 능통하고 선조 24년 무과에 등과, 비차飛車를 발명해 1592년 진주싸움에서 외부연락 및 아군보급용으로 사용, 큰 공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정평구의 碑文에는 진주병영특별군관으로 진주성 싸움에 참여했으며 이 때 비차를 발명, 아군의 식량보급과 군사연력용으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또 비차를 이용해 경상 고성에 갗혀있던 성주를 탈출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평구의 비차에 대한 기록은 우리의 임진왜란사에 보이지 않고 임난사壬亂史를 적은 '倭史記'에 나타나 있으며 '비차로 말미암아 왜군이 작전을 전개하는데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까지 곁들이고 있어 후손들과 향토사학자들은 역사적인 조명을 염원하고 있다.
정평구에 대한 행적은 옛 군지郡誌에도 전해지고 있다.

1884년과 1895년 발간된 김제읍지와 김제군지를 보면 '정평구鄭平九=탁적골계유심방광托蹟滑稽遊心放狂 병란적신丙亂赤身 통격청진通格淸陣'이라고 적고 있다. 즉 역사서적에 근거하여 골계(익살, 우스개소리)를 잘하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자유분망했으며 병란때 맨몸으로 일본 군대를 농락했다는 것이다. 1929년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도 이 같은 기록은 남아있다.

그러나 정평구는 불운한 전략가이자 발명가였다. 비차 발명을 선조에게 몇 번의 상소를 통해 보고했으나 벼슬이 미미하고 계보가 없었던 그는 번번히 묵살 당했고 끈질긴 상소에 선조로부터 요사스런 자의 광언이라고 노여움을 사 귀향하고 말았다.

그가 선조에게 올렸던 상소 가운데는 "이 위급한 국난을 맡겨 준다면 3개월 안에 평정시킬 것을 맹세한다"는 조금은 허황된 것도 없지 않으나 정평구는 고향에서도 의협심과 정의감으로 약한 자의 편에서 살았으며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해학가로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의 해학가로서의 면모는 다소 비약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평구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만큼 강하게 부각돼 있다. 그의 행적은 제주방죽 물오리를 한양사람에게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이야기를 비롯, 벌통으로 왜군을 혼내준 이야기, 당산에 명당을 쓴 이야기, 시골양반들을 골탕 먹인 이야기, 소금장수 골탕 먹인 이야기 등 설화가 되어 전해진다.

물오리를 두 번이나 팔았던 일화를 남긴 제주방죽은 제월리 앞에 있는 명금산 아래 위치했던 연못으로 1925년 논으로 바뀌었으나 주민들은 지금도 제주방죽에 대한 기억과 정평구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제월리에는 아쉽게도 그의 후손이 살지 않으며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제월리를 마주보고 있는 명금산 남쪽 기슭에 그의 묘소가 있다. 인근 마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들이 매년 시제를 모시며 구국충절救國忠節과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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