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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광장에 있는 바닥 조형물로, 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 서울역의 의미는 열차를 타고 내리고 지나가는 '역'을 넘어 서울 교통, 나라 교통의 중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 권기봉
斷頭臺上 사형대에 홀로 서니
猶在春風 춘풍이 감도네.
有身無國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豈無感想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강우규 의사가 남긴 유언)


설악산과 내장산이 단풍 관광객으로 한차례 홍수를 치른 지 오래인 지금, 사람들은 아직도 늦단풍이라도 보기 위해 이 각박한 도시를 떠난다. 올해에는 가을다운 가을을 만끽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에 더욱 큰 기대가 서린 것처럼 보인다.

요즈음 들어서는 서해안 고속도로도 개통되는 등 도로사정이 좋아져 이런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자가용을 많이 이용한다지만, 일행이 여럿이거나 여행 과정에서의 운치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섣불리' 자가용 승용차에 몸을 싣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여행의 묘미는 여유와 함께 달리는 기차 여행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광무 4년인 1900년 7월 8일, 지금의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에 남대문역이 세워졌다. 원래 남대문역 부지는 남서로 남대문에서 숙대입구까지, 동서로는 남관제묘 뒤의 힐튼호텔 자리부터 만리재 마루턱까지 약 11만 평 규모였다고 한다.
ⓒ 서울역
서울에서 저 멀리 태백이나 동해로 떠나는 여행이라면 청량리역을 이용할 테지만, 남녘 산으로 떠나는 대부분의 열차들은 보통 서울 교통의 중심인 서울역에서 출발하게 마련이다. 대우그룹 빌딩으로 앞이 막혀 다소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탁 트인 서울역 광장에서 정겨운 일행을 만나며 늦가을 여행은 시작한다. 일행을 만날 생각과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들에게 서울역은 그저 통과역일 뿐이다. 단풍지고 벌써 낙엽이 떨어지는 산을 찾아가는 여행에 있어, 그저 삭막한 도시의 번잡스러운 역은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역이 그처럼 단순한 역은 아니다. 아무리 여행에 빠져들고 싶어도, 여기서 잠깐 서울역을 찬찬히 둘러볼 필요가 있다. 그다지 호락호락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은 역, 우리 역사의 뒤꼍을 묵묵히 지켜준 역, 그 역이 서울역이기 때문이다.

근·현대사의 영욕을 고이 간직한 역, 서울역

▲ 1922년 6월 1일부터 1925년 9월 30일까지 현재 서울역이 있는 자리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새 역사가 들어서게 된다.
ⓒ 서울역
지금은 내년 12월 개통(서울~대전간 1차 개통)될 고속철도 역사를 짓느라 역 주변이 소란스럽고 일견 희망에 넘쳐 보이지만, 서울역이 그저 21세기의 희망찬 미래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눈앞에 보이는 희망 저편엔 쓰라린 역사도 함께 저며 있기에.

1900년 서울역은 일제가 조선의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지은 역사(驛舍)들 중 '최고(最高)'의 역할을 하던 것으로, 저 멀리 개마고원 넘어 만주와 간도에서부터 의주와 원산을 거쳐 군산이나 목포, 부산 등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던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병력과 군수품 등을 실어 나르던 철로의 중심에 해당하던 역이었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여기서 출발한 열차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독립선언문을 실어 날랐고, 지방을 순행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순종 황제나 조선총독부 관리들 역시 여기서 출발하는 특별 열차에 몸을 실었다.

뿐만 아니다. 8·15광복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기쁨에 겨워 태극기를 휘날리고 눈물 흘리던 곳이 바로 이곳 서울역이요, 조선 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들어온 미군이 서울에 처음 발을 디딘 곳도 바로 이곳 서울역이다. 그 뿐인가. 1960~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이들이 서울 땅에 발을 들여놓는 창구였고, 역시 이들을 보살피러 곡식 한 짐 둘러메고 상경하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맞이하던 역이었다. 물론 1980년 '서울의 봄'을 기억하는 이는 응당 서울역 광장에서 울려 퍼진 '유신 철폐!', '계엄 해제!'의 함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1월 들어 특히 서울역이 가슴 속에 아련히 맺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는 29일이 3·1 운동 이후 드높아진 조선인들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에게, 첫 부임 선물로 '폭탄'을 안긴 65세의 강우규(姜宇奎, 1855.6.5~1920.11.29) 의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 항일 역사에는 65세의 노(老)투사도 있었다

▲ 서울역은 그저 길손들이 드나드는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 시대에 이어 군사정권 시절의 자유화 운동까지, 우리 역사의 뒤꼍을 묵묵히 지켜준 역이 서울역이기 때문이다.
ⓒ 서울역
윤봉길(尹奉吉) 의사와 조명하(趙明河) 의사 각각 24세, 이봉창(李奉昌) 의사 32세, 김상옥(金相玉) 의사 33세, 나석주(羅錫疇) 의사 36세, 김지섭(金祉燮) 의사 44세. 이 중 1924년 일본 천황의 궁성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만 40대 중반이었을 뿐, 몸과 마음을 바쳐 항일 의거를 한 사람을 꼽으라면 혈기왕성한 20·30대의 청년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사에 있어 이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환갑을 넘긴 노투사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알려진 최고령 독립투사일 수도 있는 강우규 의사는 한때 한의학을 배워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고 개화사상에 힘입어 기독교장로회에 들기도 했는데, 특히 이동휘 선생의 영향으로 사립학교와 교회를 설립해 학생들에게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0년 8월 들어 조선의 국권이 일제로 넘어간 이후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 보고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1911년 50대의 몸으로 가솔을 이끌고 북간도 화룡현으로 넘어가, 1915년에는 우수리강 대안의 만주 길림성 요하현에 독립운동기지로 쓰일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중학과 교회를 세워 교육사업에 몰두했던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특히 3·1운동의 열기는 만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강우규 의사 역시 만주와 노령 등지에서 광동중학 학생들과 주변 동포들을 모아 독립선포식을 열기도 하고 독립만세운동도 하긴 했으나 '역시' 변하는 것은 없었다. 즉 소위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일제를 꺾을 수 없다는, 그 나름의 진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었다.

▲ 저 멀리 염천교가 보인다. 원래 강 의사가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자리는 남대문역인데, 남대문역은 현 서울역과 염천교 사이에 있었다.
ⓒ 권기봉
이후 당시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이동휘 선생을 찾아가 1919년 3월 26일, 40세 이상 70세 미만의 노인들로 구성된 대한국 노인동맹단에 가입하고, 박은식(朴殷植)과 김치보(金致寶) 등과 상의한 끝에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50원을 주고 산 영국제 폭탄 한 개를 가지고 8월 5일 서울에 잠입하기에 이른다. 그가 노리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1919년 9월 2일 신임 총독 사이토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강 의사는 미리 서울역(당시 남대문역) 주변에 유숙을 하며 현지 답사를 하는 등 면밀한 준비를 했다. 드디어 2일 오후 5시에 역에 도착해 환영식을 마치고 쌍두마차에 오르는 사이토 총독에게 준비한 폭탄을 지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를 폭사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경기도 경시(警視) 스에히로(末弘又二郞)와 마차를 호위하던 병력의 일부, 취재 중이던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橘) 특파원과 야마구치(山口諫男) 특파원 등 신문기자 등 37명에게 사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한편 이때 폭탄이 떨어진 자리는 사이토 총독이 타고 있던 마차로부터 불과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고 전해진다.

▲ 일제시대에는 물자 수탈과 병력 이동을 위해 쓰였던 서울역. 현존하는 최고(最古) 역사인 서울역은 지금도 철도 교통의 중심지임을 자부한다. 오늘도 서울역 대합실은 갈 곳 바쁜 사람들로 붐빈다.
ⓒ 권기봉
사건 직후 일제는 남대문 일대에 비상령을 선포했지만 60을 넘긴 노인을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유유히 자리를 빠져 나와 재거사를 계획하던 강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한국인 순사 김태석(金泰錫). 사건이 있은 지 보름 정도 지난 9월 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 대표적인 친일 순사에 의해 체포된 그는, 고등법원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된 후 면회를 온 장남 강중건(姜重健)에게 '사람은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 네가 나의 사형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 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 내가 이때까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이번에 죽어서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 어떠한 감상과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이상 보람있는 일이 없겠다…'며 이를 전국 각 학교와 교회에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1년간의 옥살이 뒤 결국 이듬해 11월 29일 오전 9시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서 '사형대에 홀로 서니(斷頭臺上) 춘풍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요(豈無感想)'라는 유언을 남기고 쓸쓸하지만 의미 있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

구석진 곳, 그마저도 그른 장소에 서 있는 표지석

▲ 그대는 '서울의 봄'을 기억하는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은 학생들이 중심이 된 군중들로 붐볐다. 이들은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게 된다.
ⓒ 김천길
지금 서울역 정문 오른쪽 예매표를 사는 곳 입구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찬 바람을 홀로 맞으며 서 있다. 그런데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하는 구석진 곳에 서 있어 이를 눈여겨보는 여행객들도 하나 없을 뿐더러, 현재 표지석이 서 있는 자리 역시 올바른 곳은 아닌 듯 하다.

물론 표지석에는 당시 남대문역이 강 의사의 의거 자리라고 쓰여있지만 정작 남대문역이 어디인 지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칫 큰 관심이 없다면 표지석만 보고 그 자리를 강 의사의 의거지로 오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 의사가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역인 남대문역은 원래 현재의 서울역과 근처에 있는 염천교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남대문역도 한강철교 준공과 함께 처음 영업을 시작한 1900년 7월 8일부터 경부선 전구간이 개통된 후 1905년 3월 24일까지 경성역으로 불렸다. 초창기의 남대문역은 지금과는 달리 2층 목조 구조로 지어졌는데, 1915년 10월 들어 역사를 개축하면서 다시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던 것을 1922년 6월 1일부터 1925년 9월 30일까지 현재 서울역이 있는 자리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역사를 짓고, 이름도 1947년 11월 1일부터 서울역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다. 한편 이전의 목조 건물은 용산역 역사로 옮겨져 쓰이게 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졌다.

한국의 역사를 간직한 건물, 다가올 세상을 위한 꽃단장을 하다

▲ 지금 서울역 정문 오른쪽 예매표를 사는 곳 입구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으나,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하는 구석진 곳에 서 있다. 또한 현재 표지석이 서 있는 자리 역시 올바른 곳이 아니다.
ⓒ 권기봉
항일 역사는 물론 근·현대사 역시 우리와 함께 한 서울역은 현재 새로운 꽃단장을 하느라 바쁘다. 서울역이 서울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하던 1960년대에는 남부역사와 서부역사가 각각 들어섰고, 1988년 9월 들어 현재 대합실로 이용되고 있는 현대식 건물이 원래의 서울역 뒤에 들어섰지만, 지금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변신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2003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고속철도 민자역사 건설사업이 끝나면 서울역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이하리라 생각한다.

일제의 흔적과 해방 이후의 한국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서울시 중구 봉래동 2가 122번지 서울역. 그저 통과역 정도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근처를 지난다면 한번쯤 강우규 의사 의거 표지석을 눈여겨볼 일이다.

▲ 1919년 9월 2일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 오는 29일은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날이기도 하다.
ⓒ 권기봉
▲ 서울역 본관의 왼쪽에는 역장실과 함께 '회의실'이라고 이름 붙여진 귀빈실로 통하는 문이 있다.
ⓒ 권기봉
▲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양감이나 곡선이 아름다워 보이는 기둥들. 귀빈실로 들어가는 문에 서 있다.
ⓒ 권기봉
▲ 귀빈실 안에는 아직도 서울역 완공 당시의 벽난로가 남아 있다. 당시에는 귀빈실 자체도 더 화려하지 않았을까.
ⓒ 권기봉
▲ 귀빈실에서 나오면 사진에서와 같이 문이 하나 나오는데, 이 문을 나서면 바로 플랫폼으로 연결된다. 편하게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어서 VIP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 권기봉
▲ 서울역 본관 건물 천장에는 사진과 같이 태극 문양과 그를 둘러싼 봉황 네 마리, 무궁화 등이 길손들을 맞이한다. 원래 건물이 지어질 당시에는 일장기 스테인드 글래스 있었다고 하나, 한국전쟁 때 부서졌다고 한다.
ⓒ 권기봉
▲ 서울역 본관의 중앙 현관과 귀빈실 입구 사이의 2층에는 서울역 문화관이 있는데, 내부에는 귀빈실의 벽난로보다 약간 큰 벽난로가 있다. 원래 이곳에 있던 그릴은 우리 나라 '양식당의 원조'로 불리는데, 실제로 여운형이나 서재필 등의 독립지사와 최무룡과 김지미 등의 배우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 단골이었다고 전해진다.
ⓒ 권기봉
▲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가 설계한 서울역은, 준공 당시 동경역에 이어 동양의 양대 건물로 꼽히는 등 건축미에 있어 많은 찬사를 받았다. 한편 사진에 보이는 돔은 1984년 태풍에 일부가 부서진 것을 85년 새로운 동판으로 보수한 것이다.
ⓒ 권기봉
▲ 서울역사 정면에 있는 지름 1.6m 규모의 대형시계 '파발마'는 한국전쟁 당시 3개월간 멈춘 것을 제외하곤 처음부터 지금까지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 권기봉
▲ 현재 서울역은 고속철도 민자역사 공사로 한창 시끌벅적하다. 새 민자역사가 들어서면 서울역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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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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