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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의 고질적 병폐인 외신조작이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기사의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자사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사선택하는 것은 물론, 있지도 않은 내용을 자의적으로 삽입하거나 본래 기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사를 왜곡하는 행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할 언론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기사를 왜곡하는 행위는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해행위일 뿐 아니라,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사회여론을 어지럽히는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의 언론이 이런 악습을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에서 '외신'이 갖는 터무니 없는 권력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외신의 비뚤어진 영향력은 무엇보다 한국언론의 고질적인 사대성에서 유래한다. 서구, 특히 미국의 언론이 보도한 거라면 아무런 검증절차 없이 부풀려 써대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마저 국내의 보도보다 한국발 외신에 더 소란을 피우는 것이 우리 언론의 한심한 모습이다.

문제는 한국언론의 이런 짝사랑이 단순한 '순진함'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독자들이 원문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외신'이라는 이름하에 자사의 입장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기사를 날조하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외신 왜곡보도의 혐의를 받았던 <조선일보>는 여전히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이 신문은 카터의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미국의 대 이라크 정책을 비판한 노벨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신'을 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CNN과 회견을 통해 '올해로 설립 20주년을 맞은 카터센터가 국제사회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며, '노벨 평화상이 평화와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점에서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제 위원장은 '카터를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 당위성을 주장해온)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 <조선일보>, 2002월 10 월 12일자


위의 기사는 미국의 CNN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래의 외신 보도는 <조선일보>의 보도와는 전혀 다르다. 11일자 CNN보도를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카터의 수상에 대한 노벨 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을 기사화하지 않은 것은 물론, 수상 자체를 부시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부분을 "비난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바꿈으로써 위원장의 발언이 갖는 의미를 애써 희석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카터의 수상, 부시에게 주먹을 날리다"

오슬로, 노르웨이 -- 지미 카터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노벨상 위원회 회장은 전 미국 대통령을 선정한 것을 현 정부의 대 이라크 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Carter's award a swipe at Bush

OSLO, Norway -- The head of the committee that awarded Jimmy Carter the Nobel Peace Prize said the selection of the former U.S. president "must be seen" as a swipe at current Washington policy on Iraq.

베르제는 "군사력의 사용이라는 위협에 직면한 현 시점에서, 카터는 분쟁이 국제법과 인권 존중, 그리고 경제발전에 기초한 중재 및 국제적 협력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고 밝히고, "이것은 미국의 노선을 지지하는 모든 자들의 다리를 걷어찬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In a situation currently marked by threats of the use of power, Carter has stood by the principles that conflicts must as far as possible be resolved through mediation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based on international law,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economic development," Berge said. "It's a kick in the leg to all that follow the same line as the United States."

노벨위원회 위원장의 부시 비판 발언에 전혀 모호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은 12일자 <뉴욕타임즈>를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노벨 평화상, 부시에게 잽을 날리며 카터에게 가다"

오늘 전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지난 25년간 평화와 인권운동에 헌신해온 노력이 인정되어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노벨위원회는 이 시상식을 부시행정부의 공격적인 대 이라크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Nobel Peace Prize Awarded to Carter, With Jab at Bush

For his peacemaking and humanitarian work over the last 25 years, former President Jimmy Carter was awarded the Nobel Peace Prize today, and the Nobel committee used the occasion to send a sharp rebuke to the Bush administration for its aggressive policy toward Iraq.

"군사력의 사용이라는 위협에 직면한 현 시점에서, 카터는 분쟁이 국제법과 인권 존중, 그리고 경제발전에 기초한 중재 및 국제적 협력을 통해 해결되어야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노벨위원회 위원장인 구나르 베르제는 더욱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이번 수상은 "현 미국 정부가 취해온 노선의 비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오슬로에서 시상 발표 직후 소감을 밝혔다. 노벨평화상은 종종 정치적 메시지를 담긴했지만 이번처럼 직접적인 대상을 겨냥한 적은 없었다.

"In a situation currently marked by threats of the use of power," the Nobel citation read, "Carter has stood by the principles that conflicts must as far as possible be resolved through mediation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based on international law,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economic development."

Gunnar Berge, the Nobel committee chairman, was even more direct. The award "should be interpreted as a criticism of the line that the current administration has taken," Mr. Berge said shortly after the award was announced in Oslo. The peace prize often carries a political message, but never before has it been so pointed.

왜 <조선일보>는 외신을 왜곡해가면서까지 노벨위원회 위원장의 발언이 갖는 의미를 희석시키려고 했을까? 자매지인 <월간조선>이 부시가 당선되기도 그의 연설 테입을 부록으로 끼워팔았던 것이나, <조선일보>가 부시 집권 후 계속해서 그의 보수적이고 냉전적인 대외정책을 지지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조작의 동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외신이 갖는 객관성의 신화를 악용한 이러한 행위는 스스로 언론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선일보>는 알아야 한다. 독자들은 "할 말은 하는 신문"이나 "신문 이상의 신문"보다 진실을 말하는 신문을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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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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