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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다방이나 윤락업소에 감금돼 매춘행위를 강요받아온 매춘여성들의 1차 목표는 '탈출'이다. 그러나 이들이 그곳을 탈출한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판 노예각서로 불리는 '선불금 차용증'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9월 군산시 대명동 화재참사 현장에서 발견된 한 매춘여성의 일기장에는 "이 악물고 하루 빨리 빚 갚고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적혀 있었다. 또 올해 2월 있었던 군산시 개복동 화재 현장에서는 '현금보관각서'와 '취업각서'가 무더기로 발견돼 업소여성들이 돈 때문에 성노예 생활을 해왔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들 '각서'에는 마치 매춘여성들이 업소 주인으로부터 선금조로 돈을 받은 것처럼 나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들을 팔아넘긴 전 업주나 소개인들이 몸값 명목으로 책정한 것으로, 그 동안 업주들은 이를 빌미로 매춘여성들을 고소하거나 '고소하겠다'고 협박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매춘여성들은 '강요에 의해 쓴 차용증으로 인한 사기혐의'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사법사상 처음으로 "윤락업주의 선불금 사기죄 고소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 구자헌 검사
이런 '제대로된 처분'을 내린 주인공은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구자헌 검사.

구 검사는 지난 6월 8일 선불금 갈취 혐의 사기죄로 고소당한 탈매춘 여성 2명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구 검사는 또 성매매 업소에서 탈출한 이들 여성을 붙잡아 폭력을 행사하고 선불금을 가로챈 윤락업소 중개인 이 모씨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및 직업안정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했다.

이같은 사실은 한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가 지난 23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조순형(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통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비로소 알려졌다.

구 검사의 이같은 처분은 사법 사상 처음 있는 결정으로, 그 동안 법원과 검찰은 성매매 업소 업주가 매춘여성을 사기죄로 고소·고발한 경우 혐의를 인정, 여성들을 구속처리해온 사례에 비춰볼 때 혁명적 결정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동안 강제로 성매매업(매춘)에 종사하던 여성들은 업소를 탈출해서도 업주들로부터 '사기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거나 더러는 실지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또한 탈출하려 해도 업주의 협박에 시달려 탈출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윤락업소 업주들이 업소여성들을 고소·고발해온 근거는 '선불금 차용증'이었다. 윤락여성들은 보통 업주로부터 '선불금' 명목으로 일정 금액의 돈을 받고 '차용증'을 써주게 된다. 이 차용증은 윤락행위등 방지법에 의해 법적인 효력이 없음에도 업주들은 이를 빌미로 업소여성들에게 협박용으로 활용해왔다. 이들은 또 업소를 탈출한 여성들에게도 이를 빌미삼아 사기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여성계에서는 그 동안 이런 업주들의 행태를 두고 "윤락행위 등 방지법에 의해 '차용증' 작성은 무효임에도 업주들이 여성들을 사기죄로 고소할 경우 여성들이 구속처리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왔다.

또한 검찰수사에 대해서도 "사기죄 성립 여부를 수사하면서 단순 사기죄로 여겨 윤락여성의 인권이나 강제성 여부는 알아보지 않고 '선불금을 갚을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만을 수사해 업소여성들을 구속처리해 왔다"고 비판했다.

구 검사의 이번 '무혐의' 처분에 대해 여성단체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강실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현직 검사가 이런 이례적인 처분을 내린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또한 정미례 전북여성단체연합 대표도 "이제껏 보통 검찰이 여성들 입장보다는 업주 입장에 입각해서 수사해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탈매춘 여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도 "유흥업소 단속에 큰 도움이 되는 결정"이라며 반기고 있다. 김강자 경찰청 여성·청소년 과장은 "이번 결정을 사례로 들어 전국 유흥업소에 전달해 업주들과 업소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킬 예정"이라며 "이번 결정으로 업주들이 굉장한 부담감을 갖게 될 것이며 매춘여성을 함부로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억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구자헌 검사는 23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제대로 수사가 됐다면 다른 검사가 맡았더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며 겸손해 했다. 구 검사는 또 "고소당한 여성들이 성매매 업소에 소개되고 탈출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업주와 소개인의 강제성이 있고 선불금 액수도 여성들의 의사로 정한 것이 아니므로 사기죄 성립에 필요한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무혐의 처리를 내린 것뿐"이라고 밝혔다.

구자헌 검사는 지난 1997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2000년 2월 대전지검에서 처음으로 검사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검사다. 1968년 생으로 올해 34세. 상주지청에는 올 2월에 부임했다.

▲ 지난 1월 29일 군산 개복동 윤락가에 화재가 발생해 여종업원 등 10명이 '감금' 상태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불에 완전히 그을린 윤락업소 '아방궁' 내부.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다음은 구자헌 검사와의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 이번 사건의 내용은 무엇인가.
"무혐의 처분한 여성은 대전에 있는 모 티켓다방에서 선불금을 받고 강제로 윤락업을 하던 여성들이다. 이 여성들을 다방에 소개한 사람이 구속기소된 중개인 이 모씨다. 중개인 이모씨는 대전 티켓다방에서 여성들의 선불금 보증을 서게 되는데 후에 다방에서 여성들이 탈출하게 되자 이들을 쫓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하수인까지 2명 고용했다. 여성들을 추적해 결국 속초에서 찾아 이들을 다시 포항 윤락가의 룸 가요방에 소개해 팔아 넘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각종 경비와 최초의 선불금 명목으로 3100만원을 포항 가요방 업주에게 소개비로 청구해 받았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포항 가요방에서 또 다시 탈출하게 되고 이 가요방의 업주가 업소여성과 소개인 이모씨를 지난 해 7월 고소한 사건이다."

- 이전의 사례와 다른 처분을 내리면서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
"부담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다른 검사가 맡았어도 일련의 과정을 제대로 수사했다면 같은 처분을 내렸을 것이다. 이번 사건은 실질적으로 고소당한 여성들이 그 업소에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선불금 액수도 자유의사로 정한 것 아니므로 사기죄에서 필요로 하는 기망행위(채권자를 속이려는 행위)가 없었다고 판단됐기 때문에 사기죄 성립이 되지 않아 무혐의 처리한 것이다."

- 여성단체들의 반응은 '제대로 수사를 했기 때문에 제대로된 처분이 나왔다'는 입장이다. 수사의 초점이 무엇이었나.
"여성들이 업주를 기망해서 선불금을 받았는가, 아닌가를 중시했다. 업주와 소개인 이모씨가 강제로 여성들을 고용하거나 소개했는지 선불금 액수는 어떻게 정해졌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윤락업주를 법으로 보호를 해줘야 될 것인가, 그보다는 강제적인 과정을 거쳐서 자유의사 없이 고용되고 선불금을 받게 되는 업소여성의 인권을 고려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 것은 사실이다."

- 앞으로 같은 사안의 처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아마 비슷한 경우라면 적용될 것 같다. 또한 앞으로도 수사의 방향을 윤락업소의 업주가 업소여성을 상대로 선불금 사기로 고소할 경우 그 여성이 어떤 경로를 거쳐 그 업소에 오게 됐는지, 윤락업소의 업주가 어떤 형태로 영업하고 있는지 등도 동시에 수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기죄 무혐의 결정"의 숨은 공로자들
[인터뷰] 조순형 민주당 의원·배금자 변호사

▲ 배금자 변호사(왼쪽)과 조순형 민주당 의원.
ⓒ오마이뉴스
사실 이번 결정은 지난 6월 8일 내려진 처분임에도 언론이 이를 보도하지 않아 묻힐 뻔했다. 이같은 내용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데는 조순형 민주당 의원의 공이 크다.

조 의원은 지난 23일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이런 결정을 공개하면서 "윤락업주가 차용증을 근거로 성매매 종사자를 사기죄로 고소하면 수사기관은 오히려 여성을 사법처리해 왔다"며 "이같은 처리가 시정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법사위 소속 의원으로 성매매 사건과 윤락여성의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온 대표적 의원이다. 조 의원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고 그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려 노력해왔다"며 "윤락여성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대표적 소수집단인 만큼 관심을 기울인 것뿐"이라고 말했다.

조 의원은 이어 "40여년 전에 만들어진 윤락행위등 방지법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이제라도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이런 법 취지와 윤락여성의 인권에 맞춰져 진행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또 한 명의 공로자는 배금자 변호사. 배 변호사는 군산 대명동 화재 참사 사건의 유가족을 무료 변론해 지난 7월 사법사상 처음으로 '성매매 사건에 대한 국가 배상 판결'을 얻어낸 주인공이다. 이번 대구지검 상주지청의 결정에 앞서서도 상주지청에 의견서를 보내는 등 안팎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배 변호사는 "이번 무혐의 처리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임에도 그 동안 언론을 통해 보도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다"면서 "조순형 의원이 아니었다면 이번 처분은 묻혀버렸을 것"이라며 그 공을 구 검사와 조 의원에게 돌렸다.

이어 "이번 무혐의 처리된 여성들이 새움터에 도움을 요청하고 새움터에서 다시 조언을 구해 이번 사건을 알게 됐다"며 "구자헌 검사에게 이번 결정이 앞으로 미치게 될 영향이나 수사에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 등에 대해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앞으로 윤락행위등 방지법을 적용시켜 아예 윤락업주와 업소여성 사이의 채권·채무 관계는 무효임이 입증돼야 한다"며 이번 사건이 형사상 '사기죄 성립 무효'로 그친 것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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