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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 나는 원로시인 고은 선생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은 미국에 다녀온 경험을 토대로 "미국은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선생은 주로 도덕의 붕괴에 따른 미국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올해 나는 저명한 미국의 문화역사학자 모리스 버만(Morris Berman)이 쓴 <미국문화의 몰락(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심현식 옮김/황금가지 펴냄)>을 읽게 된다. 미국은 고은 선생이 멸망할 것이라고 진단한 이후 20년이나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의 학자가 자기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세계를 점령할 듯이 호령한다. 테러분자들을 소탕한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축출하겠다고 을러댄다. 여중생들을 장갑차로 깔아 죽인 미군을 내놓으라고 하면 죄가 없다고 강변하고, 우리나라, 우리 문화의 상징인 덕수궁터를 짓밟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배 정도나 되는 규모로 대사관과 아파트를 짓겠다고 으르렁거린다.

더구나 미국기업인 맥도날드, 코카콜라는 상품으로 세계를 평정한다. 세계 어디나 맥도날드의 햄버거로 도배하여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이룩하며,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까지 '가구가락(可口可樂:cocacola)'을 마구 뿌려댄다. 미국이 생산한 군수물자 등 미국의 상품을 사주지 않으면 미국정부의 압력에 당해낼 국가가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21세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리스 버만의 지적처럼 미국문화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지 않을까? 글쓴이는 미국문화가 멸망할 거라는 정황으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다.

1.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즉, 부익부 빈익빈은 극에 달해 있으며,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됐다. 2. 사회보장제도가 위기에 빠져 있다. 3. 반지성주의에 따른 지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문맹률은 급증한다. 4. 상업주의 문화가 지배하는데 따른 정신적 황폐함이 극심하다.

중산층은 전체 사회의 허리 구실을 한다. 이 허리가 붕괴됐으니 사회 전체가 온전할 리 없다.

글쓴이는 말한다. 고대 로마 시민들이 검투경기와 서커스에 넋이 나가 있었던 이후 고대로마제국의 멸망이 온 것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할리우드가 만든 블록버스터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 멸망의 징조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버만이 진단한 말이다. 미국 문화는 엉망진창으로 죽어간다고 판단한다.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고 경제도 호황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책의 부제로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이라고 한 것처럼 기업이 지배하는 상업주의 문화에 목적의식도 창조력도 매몰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의 활력은 상업주의 문화의 광란일 뿐이다.

물론 그는 이 멸망을 해결할 방법으로 수도사적 해법을 제시한다. 수도사적 해법이란 어떤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생활방식을 뜻한다. 즉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 대신 미술관이나 음악회를 찾고, 베스트셀러 대신 고전을 읽는 등의 작지만 의식있는 실천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문화의 몰락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버만이 지적하는 미국문화 멸망의 정황 4가지는 한국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정황 그대로이다. 특히 IMF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책을 읽은 다음 경각심을 갖고 한국문화의 몰락을 방지할 수도사적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필요할 일이다. 미국문화의 몰락은 미국만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 바로 한국의 우리 자신들도 걱정해야할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미국 문화의 몰락 - 기업의 문화 지배와 교양 문화의 종말

모리스 버만 지음, 심현식 옮김, 황금가지(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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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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