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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및 정리 - 정운현 최유진 / 사진 - 권우성 기자

"부친의 '친일죄과'를 대신 사죄합니다" 파인 김동환의 3남인 김씨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를 펴내면서 서문 말미에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과 역사앞에 대신 사죄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4일 오전 여의도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일제하 친일작가들의 명단과 작품목록 공개, 그리고 후배 문인들이 선배문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대신 반성하는 자리가 있었다. 친일인사 명단 공개는 지난 2월 28일 일단의 국회의원들이 708명의 명단을 공개한 데 이어 두번째다.

이어 이날 오후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친일문제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 추최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제목은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로, 내용은 문화예술계 친일인사들의 친일논리와 성격을 다룬 것이었다.

본 행사 직전 사회를 맡은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몇몇 저명인사들을 소개하고는 이어 한 초로의 인사를 소개했다. 그는 일반석도 아닌, 장내의 뒷편 마련된 임시의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찌보면 그는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부자연스런'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바로 오전에 그 자리에서 발표한 친일작가 42인 가운데 한 사람인 파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69)씨였다.

대체 친일파로 지목된 인사의 아들이 친일파를 지탄하는 자리를 제 발로 찾은 까닭은 무엇이며, 또 주최측이 그를 떳떳이 소개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그는 선대의, 즉 부친의 친일행위를 부친을 대신해 민족과 역사앞에 용서를 빈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그가 그 자리에 동석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을 펴내면서 '펴내는 말' 말미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 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 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친일인사 가운데 해방후 자신의 친일죄과를 사죄한 사람이 없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친일로 변절했던 최린은 반민특위에 끌려와 눈물로 자신의 죄과를 사죄했으며, 일제때 전남도 광공부장 출신으로 제2공화국 때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는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선전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뉘우친 바 있다. 또 일제말기 군수를 3년여 지낸 걸 두고 부끄럽다며 남들이 오해할 정도로 참회를 해오고 있는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씨도 당연히 이 대열에 설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례가 많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겨우 이 정도가 전부일 정도다. 대부분의 친일인사들은 말로, 더러는 자서전이나 후학들이 쓴 일대기에서 글로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변명하거나 심지어 미화, 왜곡, 은폐해 왔다.

자신의 죄과도 아닌, 선대의 죄과를 대신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는 말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쉽다면 아마 김씨와 같은 사례가 속출했을 것이나 김씨 전후로 아직 그런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일 그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최근의 심경, 근황 등을 들었다.

- 지난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친일문인 42인의 명단과 작품목록을 공개했다. 그 속에 선친의 명단도 포함돼 있는데 심경이 어떤가?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이미 내 자신이 수용한 내용이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날 제시된 아버지의 친일작품은 40여건으로, 내가 찾아낸 52건에도 미치지 않는 수치다. 아버지는 반민특위 재판부에서 실정법(반민법)으로 처벌을 받은 인물로, 죄상을 두고는 왈가왈부할 것이 전연 없다. 내 자신이 공개석상에서 부친의 친일행위를 사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경우는 신문기자, 가곡작사자로서는 공(功)이 크나 문인, 잡지인, 출판인으로서의 행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저께 학술세미나장에 갔더니 사회자가 뜻밖에 나를 인사를 시켜 미안한 마음으로 두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분들이 왜 나를 소개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나를 향해 항의를 하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아버지의 친일죄과에 대해 사죄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부친을 친일문인으로 지목한 이번 결과에 대해 승복하는가?
"아버지가 명단에 포함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다. 아버지는 반민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다만 친일문인을 가늠하는 잣대로 식민주의와 파시즘 옹호를 들이댄 것은 조금 이견이 있다. 그들의 친일행태를 '이즘', 즉 '주의'로만 판단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친일문제는 현시점에서 역사적인 교훈의 사례로 이야기돼야 한다고 본다. 내 자신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그래서 그날도 학술회의장을 찾은 것이다."

▲ 파인 김동환이 조선일보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총독부로 받은 촌지를 모아 창간한 잡지 <삼천리>. 이 잡지는 초창기 민족적 색채가 짙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잡지로 돌아섰다.
- 부친의 친일행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문인으로서 시와 평론을 통해서 50편 정도의 친일성 글을 썼다. 또 일제하 전시협력단체인 임전보국단 출범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조선문인협회 간사 등 친일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둘째, 잡지인으로서 1938년도 이후 친일 성향의 잡지인 <삼천리>, <대동아>를 발행했으며, 셋째, 출판분야로 단행본 출간에서도 역시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3가지 분야에서 친일행적을 남겼다고 본다."

- 친일경력자 후손 가운데 유독 혼자 선대의 친일죄과를 사죄했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93년 3월 모친이 돌아가신 후 누이동생(김영주·시인·캐나다 거주)과 함께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으로 정리해 보자고 의견일치를 보고서 아버지 관련자료를 수집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일대기는 그로부터 1년 뒤인 94년 11월 출간하게 됐는데, 자료수집 과정에서 아버지의 친일행적이 담긴 자료도 같이 입수하게 됐다. 아버지의 친일행각을 대신 사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가 해방후 간행한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한 글을 보고 나서다. 아버지가 사죄한 이상 나도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아버지 일대기를 펴낼 때 서문에 그 내용을 실었다"

- 다른 친일경력자 후손들이 사죄하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남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관련된 일만 상관한다. 잘 모르겠다."

- 부친을 대신해 사죄를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혹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나?
"나를 잘 알고 아껴주시는 어떤 대학교수 한 분이 그런 일을 왜 했느냐고 따지듯이 말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나의 사죄가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거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친일파에 대한 잣대 자체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친이 실정법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관해서 아무런 의의가 없다고 봤다."

▲ <삼천리>를 발행하던 당시의 파인 김동환과 문인들. 왼쪽부터 춘원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그리고 파인. 최정희와 파인은 한 때 동거했었다.
- 이번에 발개된 친일문인 명단 작성은 적절하다고 보는가?
"문학인 분야는 상세하게 자료가 분석이 되어서 불만이 없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문인이 50여명이었는데 이번에 친일문인으로 지목돼 발표된 사람의 숫자가 42명이다. 친일성이 극히 경미하거나 작품이 하나밖에 안돼 이번 명단에서 제외된 정지용, 김정한, 김사량 등 몇몇을 포함하면 대부분의 문인들이 친일을 한 셈이다. 항일시인이랄 수 있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등 겨우 몇 사람이 빠지는 셈이다. 이것은 언젠가 누구의 손에서라도 밝혀지게 되는 사안이다. 문학분야에 비해 다른 분야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하다고 본다."

- 14일 장철 광복회장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친일파는 다 죽고 후손만 남았으니 이제 (친일파를)용서하자고 했는데, 이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그 내용을 봤다. 그 내용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광복회 회장이 '친일파청산 중단론'을 주장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광복회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공(功)이 있을 경우 과(過)가 상쇄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이율배반적인 얘기가 되겠는데, 잘 된건 잘된 것이고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다. 따로 생각해야한다. 공이 있다고 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흔히 공과론을 거론할 때 자주 거명되는 김성수와 김활란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제대로 돼 왔다고 보는가?
"나는 아버지 것만 관심이 있다. 다른 사람 것은 잘 모르고, 또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하기 곤란하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우리사회에 민족정기는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고 보는가?
"민족이 존재하는 한은 민족정기가 바르게 서고 전승이 되어야 한다. 다만 시대상황에 따라 그것이 조금 가려질 때도 있다고 본다.친일문제 연구가 본격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서 역작용이 오히려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언젠가 서강대에서 친일파 모의재판이 열려 보러 간 적이 있다. 행사 전에는 행사알림 기사가 나왔는데 정작 대상자 10명이 모두 사형판결을 받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곳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다루기 어려운 사안이었는지 빈 메아리일 뿐이었다. 신문이 이같은 사안을 다뤄야 한다고 본다."

- 그간 언론의 친일문제 보도가 미약했다는 얘긴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신문보도가 좀 의아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전에 행사소개는 보도해놓고 그 결과를 보도하지 않는다면 그 보도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친일문제와 같은 주제가 언론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부친과 관련된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 있다면.
"지난 93년 어머니(신원혜)가 작고하신 후 아버지 관련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지 근 10년이 돼 간다. 아버지의 친일자료를 접하면서 언젠가 가진 의문은 대체 부친이 어떤 이유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모 대학교수를 통해 그가 국회도서관에서 아버지가 반민특위에 잡혀와서 쓴 '자술서'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교수에게 여러 차례 자료를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으나 자기 논문에 먼저 사용한 뒤 보여주겠다니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 김씨의 부친 파인 김동환이 자신이 친일한 이유를 "잡지를 위해"라고 보도한 <평화일보> 기사(1949.5.8)
늘 아버지의 친일변절 이유가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해답을 찾았다. 금년 5월쯤에 한 자료수집가가 1949년도에 발행된 신문들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거기서 1949년 당시 반민특위서 재판을 받고 있던 아버지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신은 잡지를 지키기 위해 친일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시인이자 기자출신이지만 <삼천리> 창간 이후 잡지에 미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지난해 부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 것으로 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또 자식으로서 어떤 정을 느끼는가?

김영식씨는 어떤 인물?

파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 씨는 1933년 서울출생으로, 경복고,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내무부, 청와대 비서실, 주불대사관 등에서 경찰공무원(최종계급은 총경)으로 근무하다 92년 정년퇴직했다.

93년 모친의 타계를 계기로 부친의 행적에 관한 자료을 수집, 이듬해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을 펴냈는데 고서적상, 고서수집가 사회에서는 '꾼'이자 '효자'로 소문나 있다. 그는 부친 관련 자료라면 전국을 찾아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웬만한 연구자 뺨칠 정도로 역사·문학 분야에 폭넓은 식견을 갖추었다.

10년 가까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그는 지난 95년 <파인 김동환 전집>(전5권), <삼천리 영인본>(전 32권)을 펴낸 데 이어, 98년에는 <파인 김동환 문학연구>(전 30권)를, 2000년에는 <언론인 파인 김동환 연구-신문기자. 잡지인>(전 15권)을, 그리고 지난해에는 부친과 부친의 동거인 소설가 최정희씨가 보관해온 서한을 묶어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영인본, 도록)을 펴냈다. 김씨가 펴낸 파인 관련 자료집들은 파인과 문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해 파인 탄생100주년을 맞아 그는 시화전, 가곡의밤, 자료전 등 총 7개 분야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펼쳤는데 주변에서는 "일개인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행사를 치렀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6.25때 납북된 부친의 '최후'를 확인하기 위해 어서 빨리 통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정운현 기자
"지난해 파인탄생 100주년행사는 총 7회의 행사를 가졌는데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공인이었기 때문에 탄생100주년 행사도 공인으로서의 모습을 부각시켜 행사를 진행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어두운 면도 당연히 드러냈다. 올 9월 100주년행사 기념 자료집을 내는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수록된다. 30여 편의 논문, 평론, 언론의 보도기사 등 파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적으로 아버지는 대단히 노력가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초기에는 분명 민족지사의 풍모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시국순응이다 시류편승이다 해서 결국은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런 형태로 친일대열에 끼여 잡지를 만들다가 43년 3월에 잡지가 막을 내리면서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결국 하루아침에 몰락한 그런 분이다.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아버지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잘 한 것은 잘 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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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