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정전의 엄숙함에 눌리다
높다란 담장 저편으로 종묘의 중심 건물 정전이 보인다. 장엄하기만 한 정전. 아니 장엄이라 하기에도 뭔가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는 게 종묘 정전이 아닌가 싶다. 거의 40도 정도로 내리꽂히는 정전 지붕은 중압감마저 들게 한다.
ⓒ 권기봉
태풍이 하나둘 지나가고 더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면 이제 영락없는 한여름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저마다 가방을 둘러메고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사람들도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붐빈다. 그런데 여행이란 것이 꼭 멀리 떠나야 제 맛일까. 특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일수록 짜증과 바가지는 비례하는 것인 데도 말이다.

어디를 가든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고 재충전을 위한 여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멋진 여행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종묘는 이 무더운 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특히 종묘는 서울에서는 보기 드물게 울창한 수목들로 둘러싸인 도심 속의 작은 섬과 같아 나무 그늘에 들어가기만 하면 잠시나마 더위를 피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이런 종묘에 피서라도 떠날 겸 생수 한 통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답사를 떠나보자.

▲ 정전의 축소판
정전과 구성이나 모습은 거의 비슷한데 크기만 정전에 비해 약간 작을 영녕전이다. 영녕전에는 태조와 태조의 선대 4대조로 태조가 추존한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 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권기봉
종묘는 지난번에 이미 답사한 사직단과 마찬가지로 왕실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즉 사직이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시설이라면, 종묘는 왕가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의 의미를 갖는다. 느닷없이 웬 제사? 중국의 주례(周禮)에서는 '자신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종묘를 세우는 것이라 했지만, 현재적 의미에 있어서는 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한 방편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런 종묘와 그 격이 같진 않지만 비슷한 기능을 하던 시설들이 곳곳에 있었다. 예컨대 전주의 경기전이나 평양의 영숭전, 경주의 집경전 등이 그것으로, 왕의 영정을 봉안한 채 일정한 절차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 뒤틀린 판문,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전 기둥들 뒤쪽으로는 신주가 모셔져 있는 신실과의 구분을 위해 판문을 드리웠는데,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끝 모서리 부분이 서로 뒤틀려져 있다. 왜 그런지에 대해 그 어떤 서적을 뒤져보아도 알 수 없었고, 누구에게 질문을 해도 시원스레 대답해 주는 이가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 권기봉
이렇듯 중요한 시설 종묘이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화재들이 그러하듯 수난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종묘는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 9월에 창건된 이후, 세종 때 영녕전을 새로 짓고 명종 때 정전 4칸을 증축한 것 외에 약 2백 년 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592년에 있었던 왜의 침입으로 종묘 시설 대부분이 불타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이후 15년간 명종 때의 영의정이었던 명신 심연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다가 선조41년인 1608년에 들어 재건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특이한 것이 함께 불탄 왕궁보다 종묘를 먼저 복원했다는 점이다. 현대의 우리가 생각할 때 선뜻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긴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유교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이후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감실 등이 모자라 증축을 거듭하게 되고 헌종 2년인 1834년에 정전 신실을 4칸 늘리고 영녕전 협실을 4칸 늘리게 되는데, 이후 더 이상의 증축이 없었고 조선 왕조도 막을 내려 더 이상 봉안할 필요가 있는 왕의 영정이 없기에, 그때 완성된 모습이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종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4대문 안 유일한 우물
종묘 정문 앞에 있는 우물 '어정(御井)'이다. 현재 4대문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우물이라고 전해지는데, 말 그대로 '왕이 마셨던 우물'이란 뜻이다. 다만 종묘 지하주차장을 만들면서 물이 말라 버린 것이 아쉽다.
ⓒ 권기봉
▲ 정면에서는 볼 수 없는 또다른 멋
정전의 뒷벽은 보다시피 화방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정면에서 볼 수 있는 멋과는 또다른 종류의 근엄하고 장중한 맛을 풍긴다.
ⓒ 권기봉
무더운 여름날, 종묘를 편하게 찾아가자면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가장 낫지 않을까 싶다. 먼저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려 종로5가 쪽으로 걷자. 월드컵이라는 이유로 가판대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쫓겨나 거리는 널찍해 보이지만 어딘 지 모르게 사람 사는 맛은 들지 않는 거리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종로라지만….

종로3가와 종로4가의 중간쯤 되는 곳에 종묘로 들어가는 입구가 왼쪽으로 나 있다. 거리를 가늠하기 보다 '아! 여기가 종묘구나!'하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주변에 얼마나 많은 할아버지들이 있나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요즈음 들어 '실버타운'이 인기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게 또 실버타운이다.

우리네 노인들 중에 경제적인 여유가 충분한 사람이 몇 되지 않으니 말이다. 경로당에 가려고 해도 회비를 내야 하는 것이 요즈음 사회이다. 그렇다고 집안에만 있기에는 자식들 눈치도 보이고, 또 마실거리라도 찾아 나선 노인들이 바로 이 할아버지들이다.

▲ "대소인원은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
어정 앞에 놓여 있는 하마비로, 종묘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표지이다. 헌종4년인 1663년 10월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권기봉
한때 시골 5일장에서나 볼 수 있던 각종 약장수들과 주위에 늘어서 경청하고 있는 할아버지들을 뒤로하고 종묘공원으로 들어서자. 그러면 정문 못 미처 오른쪽으로 우물로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름은 '어정(御井)'이요, 현재 4대문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우물이라고 한다.

이름은 말 그대로 '왕이 마셨던 우물'이란 뜻인데 종묘에 제사를 지내러 온 왕이 잠시 물을 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종묘 공원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면서 물이 말라버렸다 한다. 그렇게 조선 왕조의 영화는 사라져 갔던 것일까.

한편, 어정 앞에는 하마비가 한 기 놓여 있다. 헌종4년인 1663년 10월에 세운 이 하마비는 종묘를 출입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말에서 내리도록 하는 표지였는데, 경운궁 등에서 볼 수 있는 하마비와 같은 형식이다.

▲ 이제 종묘다
그저 수수해 보이기만 하는 삼문이지만, 이 문 너머에는 조선 왕조 5백년의 숨결이 서려 있다.
ⓒ 권기봉
이제 종묘다. 하마비 건너편으로 보이는 종묘 정문은 그저 수수해 보이기만 하는 삼문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세계문화유산 등록 기념비이다.

종묘는 1995년 2월에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와 거기에 있는 팔만대장경과 판고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주체적으로 느끼는 자존감이나 자긍심보다 일단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큰 사람 혹은 위대한 것이라 여겨온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나 보다. 입구에다가 이처럼 큼지막한 돌을 탁 세워 놓고 '이곳이 바로 세계의 문화유산 중 하나요'하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종묘
지난 1995년 2월, 종묘가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표지판이 종묘 정문 안쪽에 서 있다. 주체적으로 느끼는 자존감이나 자긍심보다 일단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큰 사람 혹은 위대한 것이라 여겨온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나 보다.
ⓒ 권기봉
▲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
세계문화유산 등록 기념비 뒤쪽으로는 네모난 모양의 연못이 하나 있다. 특히 연못 가운데 있는 둥그런 모양의 섬에는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아마도 종묘가 갖는 특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권기봉
역시 할아버지들과 비둘기들이 먼저 반겨주는 종묘에는 입구 근처에 '지당(池塘)'이라 불리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궁궐의 기둥 주초석 등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사상에 의해서인지, 이곳 연못 역시 네모난 방형을 했고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은 둥근 모습을 했다. 특히 가운데 있는 섬에는 일반적인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가 심겨져 있는데 아무래도 종묘의 특성상 심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즉 제례를 올릴 때 바로 이 향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의미에 있어서도 조상들의 영정을 모신 곳에 향나무가 어울렸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현대인의 상상일 뿐이다.

▲ 연못 옆 망묘루
지당 오른쪽부터 본격적으로 건물들이 시작되는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망묘루(望廟樓)로, 임금이 제사를 지낼 때 종묘에 머물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권기봉
▲ 조선의 종묘에 고려왕이?
망묘루 오른쪽으로 작은 건물이 하나 딸려 있는데, 특이하게도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신당이 그것이다. 왜 조선의 종묘에 고려왕의 영정이 있을까? 본문을 한번 읽어보자.
ⓒ 권기봉
지당 오른쪽부터 본격적으로 건물들이 시작되는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망묘루(望廟樓)로, 임금이 제사를 지낼 때 종묘에 머물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망묘루 오른쪽으로 작은 건물이 하나 딸려 있는데, 특이하게도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신당이다. 조선의 종묘에 웬 고려왕의 영정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나라가 조선인만큼 어느 정도의 역사적 정통성을 얻기 위한 생각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마치 일본 만주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노골적으로 '단일민족'이니 '민족주체성', '단군 자손' 등을 운운했던 것처럼.

▲ 향내음을 맞기 위해서는
망묘루와 공민왕 신당의 뒤쪽으로 있는 건물로, 제사에 쓰기 위한 향이나 제기 등을 보관하던 향대청(香大廳)의 모습이다.
ⓒ 권기봉
▲ 조선 왕, 목욕재개 하다
향대청을 지나면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불리는 재궁(齋宮)에 이를 수 있다. 재궁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온 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왕이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목욕을 하던 욕청이 있다.
ⓒ 권기봉
망묘루와 공민왕 신당의 뒤쪽으로 있는 건물로, 제사에 쓰기 위한 향이나 제기 등을 보관하던 향대청(香大廳)을 지나 돌이 깔린 길을 올라가면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불리는 재궁(齋宮)에 이를 수 있다. 재궁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온 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으로, 왕이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목욕을 하던 욕청이 있다.

한편 재궁 왼쪽으로 나 있는 돌길을 따라 올라가면 제사 때 이용하기 위한 제물 등을 마련하던 건물인 전사청(典祠廳)에 이르게 된다. 특히 전사청 앞에는 찬막단이라고 불리는 널따란 축대가 하나 있다. 검은색 돌로 중앙이 채워져 있는 이 석단은 제사에 올리기 위해 전사청에서 마련한 음식물 등의 상태를 점검하던 공간으로, 제사상 하나 올리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지나친 낭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비단 현대인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지적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종묘의 위상을 생각할 때 대놓고 비판할 수는 없었겠지만, '명종실록' 원년 4월 8일의 기사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제사 때 이용하기 위한 제물 등을 마련하던 건물인 전사청(典祠廳)이 정전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정성을 가득 모아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과연 낭비의 요소는 없었는지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한편 전사청 앞에 보이는 단은 '찬막단'으로, 제사에 올리기 위해 전사청에서 마련한 음식물 등의 상태를 점검하던 공간이다.
ⓒ 권기봉
"…살아있는 때처럼 받는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4∼5 차례에 걸쳐 음식을 푸짐하게 차리느라 많은 국가 경비가 낭비되고, 또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항상 도마나 솥 주변에 서 있어 깨끗하게 다루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훔쳐 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오히려 신명을 더럽히고 있으니 백해 무익한 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비단 이 기사를 실록에 쓴 사신만의 생각일까.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마음속으로나마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던 상황에서는….

▲ 듬직하기만 한 담
재궁에서 전사청으로 이르는 신도 옆으로 정전을 둘러싼 담장이 보인다. 정사각형의 사고석으로 쌓은 담장은 모양새가 듬직할 뿐만 아니라 높이도 높아 정전의 엄숙함을 더해주고 있다.
ⓒ 권기봉
재궁에서 전사청으로 오면서 왼쪽에 끼고 온 널따란 담이 바로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의 담이다. 담이 끝나는 부분에 문이 나 있다. 이는 동문으로, 보통 정전이나 영녕전의 남문은 신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인데 반해 왕이나 신하들은 오른쪽에 나 있는 동문으로 들어가 제사를 지낸 후, 서문으로 나오는 형식을 따랐다. 제사를 지내는 헌관이 된 입장으로 동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서 보자.

이건 뭐랄까. 많은 답사도 해보고 서양 건축물들도 많이 보아왔지만, 장엄하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아니 장엄이라 하기에도 뭔가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는 게 종묘 정전이 아닌가 싶다. 정전은 그렇게 다가왔다. 나중에 정전의 남문인 신문 바로 아래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겠지만 거의 40도 정도로 내리꽂히는 정전 지붕은 중압감마저 들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른 건축들에서는 대부분 용마루가 완만하나마 곡선을 그리는데 반해 이곳 종묘 정전의 용마루는 일직선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기왓골 역시 용마루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듯 하다.

▲ 19칸 101m
총 19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정전은 그 길이가 70m에 이르며, 좌우의 협실까지 합하면 총 길이가 101m에 달한다.
ⓒ 권기봉
또 장중함을 넘어 매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다른 어떤 서양 건축물에서도, 심지어 한국의 그 어떤 건축물에서도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종묘 정전에 이르러 정전을 바라보느라 상당히 오랜 시간을 정전 정문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전은 모두 19칸으로 이루어진 길다란 건물로 배흘림을 살짝 가미한 20개의 거대한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장중한 맛을 더해주는데, 다른 왕실 건축물들과는 달리 단청이 하나도 칠해져 있지 않아 또 다른 멋을 풍긴다.

한편, 기둥들 뒤쪽으로는 신주가 모셔져 있는 신실과의 구분을 위해 판문을 드리웠는데,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끝 모서리 부분이 서로 뒤틀려져 있다. 왜 그런지에 대해 그 어떤 서적을 뒤져보아도 알 수 없었고, 누구에게 질문을 해도 시원스레 대답해 주는 이가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정전이 서있는 월대 역시 남다르다. 상월대와 하월대의 두 월대가 정전을 받치고 있는데, 하월대는 좌우 길이 109m라는 수치답게 정전을 두르고 있는 담장 안쪽을 거의 메울 정도로 넓게 조성되어 있다. 이는 마치 하늘 위에 정전이 서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에 하며, 아마 처음 조성했을 때도 그런 의미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왜냐하면 왕이 하늘에서 온 사람인 만큼 그가 죽어서는 다시 하늘로 갔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하월대 위에도 역시 신도가 놓여져 있다. 정전 신문을 통해 들어온 신도는 정전을 향해 길게 쭉 뻗어나가다가 이내 멈추는데, 특이하게도 그 부분 오른쪽에 이전에 전사청 찬막단과 비슷한 모양의 단이 하나 놓여 있다. 찬막단보다 다소 작은 이 판위는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왕이 잠시 대기하던 곳을 표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좌우 길이 109m
정전이 서있는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의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월대는 좌우 길이가 109m에 이른다. 한편 신도가 끝나는 부분에 놓여져 있는 검은색 돌의 석단은 '판위'라고 하는 것으로,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왕이 잠시 대기하던 곳을 표시하는 것이다.
ⓒ 권기봉
▲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정전은 모두 19칸으로 이루어진 길다란 건물로 배흘림을 살짝 가미한 20개의 거대한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어 장중한 맛을 더해주는데, 다른 왕실 건축물들과는 달리 단청이 하나도 칠해져 있지 않아 또다른 멋을 풍긴다.
ⓒ 권기봉
이곳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국에 흩어져 살던 전주 이씨들이 한데 모여 큰 의식을 치른다. 바로 그 유명한 '종묘대제'이다. 또 그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악이 '종묘 제례악'으로, 궁중 음악이 아악과는 악기 구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특히 그 음률이 장엄해 일반 국악이나 아악과는 또다른 느낌이다. 이런 종묘 제례악을 위해서는 악사들이 필요한데, 바로 그 악사들이 대기하던 장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정전과 영녕전 사이에 있는 악공청(樂工廳)이 그것인데, 지금은 다소 쇠락한 모습을 보인다. 즉 그저 덩그러니 박석만 깐 마루로 보이는 구조만 달랑 남아 있다. 그것마저도 유지가 시원치 않은 모양인 지 이리저리 튀어나온 박석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기둥들도 완전히 둥글다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8각형이나 16각형을 띠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이유 역시 알기 힘들다.

한편, 종묘에는 정전과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 하나 있는데 영녕전이 그것이다. 그 구성이나 모습은 거의 비슷한데 크기만 정전에 비해 약간 작을 뿐이다. 오히려 그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의 크기여서 더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녕전은 태조와 태조의 선대 4대조로 태조가 추존한 목조와 익조, 도조, 환조 등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이다.

▲ 장안의 선비는 종묘제례악을 들어야 한다는데
종묘제례악에는 아악과는 달리 장고나 아쟁과 같은 당악기와 대금과 같은 현악기도 쓰이지만 금이나 슬 등의 현악기는 쓰이지 않는다. 사진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기 위한 악사들이 대기하던 악공청(樂工廳)으로, 지금은 다소 쇠락한 모습을 보인다.
ⓒ 권기봉
▲ 왕도가 아니라 신도
이는 왕궁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도가 아니라 신령만이 통행할 수 있다는 신도이다. 즉 가운데 길은 오직 혼백만이 통할 수 있는 개념상의 길이고, 제관들이나 일반인들은 오직 양쪽으로 한 단이 낮은 길을 통해서만 지나다닐 수 있었다.
ⓒ 권기봉
종묘에서도 왕궁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 돌길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길은, 왕궁이나 사직단 등을 이미 둘러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듯 일종의 '왕도'로서, 종묘의 경우에는 특성상 '신도(神道)'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운데 길은 오직 혼백만이 통할 수 있는 개념상의 길이고, 제관들이나 일반인들은 오직 양쪽으로 한 단이 낮은 길을 통해서만 지나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재미없고 단순하기만 한 답사기를 읽는 것보다 직접 한번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이 백배천배는 나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과제를 하나 제시해도 될 지 모르겠다
.
앞서 살펴본 대로 종묘는 1608년 재건된 뒤 몇 차례의 증축을 하게 된다. 이 증축은 원래 있는 건물을 그대로 두고 오른쪽으로 공간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인데, 재미있게도 그 과정이 정전이나 영녕전 등 주요 건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힌트를 주자면, 그런 흔적은 돌로 만들어진 부분에 주로 남아 있을 것이란 사실이다. 아무래도 비와 바람에 강한 것이 나무보다는 돌일 테니 말이다. 물론 나무로 된 부분에서도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방심하진 말자.

▲ 잠깐 대기하세요
정전이나 영녕전 등의 동문 밖에는 이와 같은 판위가 문 앞에 서 있다. 왕이 잠시 대기하던 판위로, 사진은 영녕전의 동문 밖에 있는 것이다.
ⓒ 권기봉
▲ 보물 제821호 영녕전
영녕전은 전체 15실의 규모로 정전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중앙의 4칸이 양옆보다 높게 구조되었는데, 이는 이후 객사 건물 등의 본이 된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신촌클럽(www.shinchonclub.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