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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중앙일보는 "북, 서해교전 때 24명 사망"이라는 이례적인 기사를 1면 톱기사로 올렸다. 반면 같은 날 조선, 동아일보는 "김대통령, 북, 사실상 사과"(조선일보), "정부, '북 유감' 대응 혼선"(동아일보)이라는 제목으로 1면 톱기사를 채웠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 동아에서는 서해교전으로 인한 북측의 피해에 대한 보도는 찾을 수 없었다. 한 달째 접어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한 이른바 메이저신문의 보도는 아직도 적잖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7월 30일 북한군 17명 사망=한겨레).

▲ 2002년 7월 27일자 중앙일보
서해교전관련 북측 피해상황
ⓒ 최정은
중앙일보는 이번 보도에서 서해교전이 우발적 충돌이었고, 그 과정에서 북한군의 피해도 컸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물론 중앙의 이 보도가 진실이라는 확증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신문이 줄곧 이번 서해교전을 북한수뇌부의 계획적 도발이라고 단정하고, '전쟁불사론'을 주창해온 점과 사뭇 대비된다.

북한의 유감표명과 대화제의를 사실상 사과로 받아들이고 남북대화를 수용할지, 아니면 재발방지책이 없다는 이유로 남북대화를 거부할지는 물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른바 '통석의 염'이니 유감표명이라는 것이 고도의 외교적 언사라서 그것을 액면 그대로의 사과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래서 특정 정파의 정책선호를 반영하는 보도까지 시비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일부 언론이 고의적인 사실누락에 익숙해 있지 않느냐는 의혹이다. 그것은 취재된 사실에 대한 취사선택과정의 문제일 수도, 아니면 의도적인 취재기피일 수도 있다.

서해교전 때 북한군 24명이 사망했다는 팩트에 대해서, 다른 신문이 의도적으로 취재를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취재는 했지만 사실을 누락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실보도로서의 뉴스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북한군 24명이 서해교전으로 사망했다는 팩트를 두고도 나름의 상상을 곁들인 논평은 가능하다. 일부는 남한군의 전과가 더 컸다고 자위할 수도, '빨갱이'들의 선제공격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남북의 젊은 병사들이 분단의 희생양으로 애꿎게 희생당했다고 애도할 수도,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한 평화보장책을 찾아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자유로운 논평의 전제조건은 적어도 언론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이다. 그래서 필자는 흔히 조중동으로 속칭되는 메이저언론의 비판자들도 그들이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안티에 나선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이번 서해교전 보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꽃게잡이 어선의 월선조업이라는 팩트를 이른바 독과점신문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그 단적인 예에 속한다. 서해교전 당시 일부 선주들의 담합에 의한 월선조업과 이에 대한 군 당국의 묵인 등이 있었고, 그것이 서해교전의 한 원인(遠因)를 이루고 있었고, 심지어는 "꽃게가 사람을 죽였다"라는 제보도 이어졌다.

물론 이것이 북측의 개전책임론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 없음은 명백하지만, 서해에서의 군사적 충돌이 발발하게 된 한 배경을 이루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누락시키는 것은 국익을 위한 것도, 언론의 정도도 아니라 믿는다. 그것은 일부 선주들의 과욕으로부터 우리 어민의 안전을 보호하고, 남북한 젊은 병사들의 생명과도 적잖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데올로기는 있는 사실을 덮어버릴 정도로 정당한 것일까. 독과점신문은 물론 일부 방송도 월선조업이라는 팩트를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오히려 이를 특종보도한 한 방송국이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비방했다.

적잖은 신문들이 특정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중요 사실을 누락해 자의적으로 편집하고, 경우에 따라선 팩트가 아니라 의견을 톱기사로 올리기도 한다. 햇볕정책의 반대론자들은 햇볕정책의 부정적 인상만을 끌어낼 팩트만을 수집해 강조하고, 이를 전제로 논평한다.

반대로 찬성론자들은 그 긍정적 인상만을 끌어낼 팩트만을 수집해 강조하고, 이를 전제로 논평한다. 그로 인해 한 신문의 지면 내부에는 한 방향의 여론몰이만 있을 뿐 그들이 피를 토하며 열망하는 언론의 자유는 없다. 한번 목표와 방향이 정해지면 모든 사실은 그 아래 복종해야 한다.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 일부 신문이 보여준 '광기'는 그 전형적 예에 속한다.

객관적으론 언론사 세무조사의 순기능도 역기능도 있었을 터다. 물론 찬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독과점신문은 최소한의 기계적 균형조차도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이다. 또한 언론이 특정 정치인 죽이기를 결심하면 그를 둘러싼 모든 팩트는 죽이기를 위해 복종한다. 똑같은 복지정책도 갑이 하면 좌경이고, 을이 하면 서민층 보듬기가 된다.

이처럼 가장 자유롭고 이성적이어야 할 언론매체가 '선동기관화'하는 경우 국민의 알 권리는 외면당하고, 결국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더 전진할 수 없다. 또 다른 6·25가 남북한 국민들 상당수의 희생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필자는 여전히 독과점신문의 고질병은 보수적 논조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고의적인 외면에 있다고 믿는다. 입장의 차이는 선택할 수 있으나, 사실을 알리느냐 이를 누락시키느냐는 언론의 기본적 윤리에 속하는 일이다.

30여년 전 동아, 조선일보에서 벌어진 자유언론수호투쟁은 사실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 단짜리 사실보도를 관철하려는 데서 촉발됐다고 한다. 월드컵 4강 신화의 꿈을 이뤄준 히딩크 감독은 고별인터뷰에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히딩크식 언론읽기에서 나온 혜안일 게다. 그는 한국언론의 과거 히딩크 때리기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월드컵 직전에는 일부 신문의 '축구경시 또는 무시보도'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불만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독과점신문의 폐해는 보도 그 자체보다 마땅히 알릴 것을 알리지 않는 '무보도'에 있다는 저항이다.

물론 신문도 상품이어서 상업적 목적을. 기자도 '정치적 동물'이어서 정치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신문기업이 보도, 논평, 정보 등을 담은 종합상품을 어떻게 포장할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영역에 있다.

▲ 김택수 변호사·민언련 정책실장
ⓒ 희망네트워크
한편 신문은 타인의 권리침해를 전제하는 특수한 상품이다. 그래서 헌법은 언론자유의 헌법적 한계를 직접 규정할 만큼 그 책임도 가중되어 있다.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도,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 정보를 잘못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에 대한 의도적 왜곡과 누락을 통한 '선동기관으로서의 언론'이 여론시장을 독점하는 한 언론의 자유는 없다. 이제 독과점언론에게는 한 신문만 읽어도 다양한 여론을 알 수 있는, 내적 언론자유가 구현된 '권위지'가 되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11>은 8월 1일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김택수 변호사를 비롯해 권오성 목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남북문제 전문가 김창수씨, 권오성 목사,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소설가 정도상씨, 한서대 이용성 교수, 대학생 오승훈씨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며 일반 독자 1인의 기고를 포함한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의 기고와 ‘최고-최악의 기사’에 대한 의견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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