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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별안간 무서워질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사람들이 자기 입장을 언성을 높이면서 자신 있게 밝히는 경우가 있는데 열의 아홉은 정치면이다. 현 정권이나 여야에 대해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을 할 때는 그 정치적인 확신에 대해서 옆에서 다른 의견을 말할 분위기가 아니다.

그럴 때는 그 말이 옳고 틀린 것을 따지기보다는 은근히 화제를 바꾸는 것이 현명한 처세술이 되어 버렸다.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닌데 서로 심사가 뒤틀려 인간관계까지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 2002년 7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 최정은
그런데 살면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무섬증이 들 때가 생길까? 바로 특정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그대로 자기 확신으로 바꾸어 버리는 단순함 때문이다. 언론에 보도되면 일단 그 내용을 가치중립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국민들의 상식인데 언론사의 입장과 판단을 그대로 내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억지를 펴고, 주장할 때는 여론 조작까지 생각이 나서 무섬증이 든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실 그 자체를 보도하는데 있다(그래서 기사작성의 ABC가 바로 ‘5W 1H' 즉, 6하 원칙이다). 사실을 우선 제대로 전한다는 전제 아래 언론사 자체의 논평과 해석도 유효하다. 언론이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독자나 청취자들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나름대로 객관적인 입장을 정리하게 되고, 그것이 모여질 때 국민 여론이 생겨난다.

그런데 그 반대로 취합된 사실들을 놓고 언론사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하여 보도하고, 자신들의 입장과 해석을 불편부당한 사실처럼 보도한다면 언론으로서는 그것처럼 큰 죄악이 없다. 언론사들이 스스로 이 죄악성을 의식하지 않으면 극우 나치시대나 관료적인 사회주의 국가들이 했던 국민 여론조작이라는 선까지 거리낌 없이 넘나들게 된다.

‘내일신문’이 입수하여 24일 보도한 것으로 알려진‘이회창 불가론’이라는 제목의 문건에 대하여 오늘 아침에 훑어본 몇 개의 주요 신문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다뤘다. ‘民主黨 계열 또 정치공작 文件’이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이회창 불가론’이라는 문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그 ‘문건’에서 이회창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린 1,3,4면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그 기사를 사설로 실을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고 판단한 다른 신문사들의 경우를 보면 동아일보 4면, 중앙일보 4면, 한겨레신문 5면에서 ‘문건’에 나오는 이회창 후보의 약점을 편집,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문건이 현 여권의 ‘정치 공작’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세우고 관련 사설과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정치공작 문건’이라는 2면의 사설에 따르면 처음 시작은 ‘지난 4년 반 동안 현 여권이 보여준 국정 운영의 한 패턴’이고, 두 번째 문단은 ‘언론 길들이기 작전에서 확인된 바 있는’ 것이고, 세 번째 문단에서는 ‘그 발상의 음모성과 공작적인 수법’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네 번째 문단에서는 ‘정권 차원의 정치 목표가 항상 거창한 개혁 구호로 포장’되었는데 이 ‘문건’도 그런 구호로 가득 차 있다는 지적이다. 다섯 번째 문단은 여권이 ‘남남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TV등 여론 매체와 일부 친여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문건의 작성 경위’와 ‘동원된 매체와 지식인들이 있는지 여부 등을 공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설에서 일관된 것이 있다. 이 ‘문건’ 내용이 이러한 사실을 담고 있으니 ‘이것은 정치공작이다’라고 해야 사설로 마땅하다. 그 반대로 사실을 어디에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정치공작’이라는 전제를 분명히 세우고 ‘지난 4년 반 동안 현 여권의 국정 운영의 한 패턴’을 다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언론 길들이기’라고 표현된 자사 관련 세무조사 사건까지 끼어 넣은 것은 양념일까? 아니면 주된 목적일까? 하는 호기심도 생긴다. 언제까지 이런 기사를 읽어야 하나?

▲ 권오성 목사
前 CBS시사자키 진행
ⓒ 최정은
사실 국민들은 ‘정치공작’ 여부도 알고 싶지만 현재의 대통령 후보들이 진정 대통령으로 적절한 자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도 무척 궁금하다. 우리 언론들이 후보들의 장점과 약점, 정책들에 관해서 사실 관계를 밝히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또 어느 언론사라도 자기 입장이나 이해관계로 한 번 걸러놓고 사실처럼 보도하는 기사를 국민들에게 내보내는 일은 중단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언론에서 여론 조작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이제는 ‘5W 1H’ 훈련을 제대로 거친 신문을 일고 싶다는 것이 과연 지나친 욕심일까?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 9>는 7월 27일(토) 연세대 4학년에 재학중인 오승훈씨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대선을 앞둔 시기, 신문의 편파·불공정·왜곡보도에 대한 감시운동을 위해 각계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표세대인 3,40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희망네트워크'(www.hopenet.or.kr)의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는 매주 화, 목, 토 격일간격의 모니터링 칼럼을 이어가고 있다.

“13인위원회의 신문읽기”에는 권오성 목사를 비롯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최민희 사무총장, 문학평론가 김명인씨,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씨,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남북문제 전문가 김창수씨, 권오성 목사, 김택수 변호사,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방인철씨, 대학생 오승훈씨, 소설가 정도상씨, 한서대 이용성 교수 등 각계 전문가가 함께 하며 일반 독자 1인의 기고를 포함한다.

독자로서 필진에 참여하고자하는 분들의 기고와 ‘최고-최악의 기사’에 대한 의견은 희망네트워크 홈페이지(www.hopenet.or.kr)「독자참여」란이나 dreamje@freechal.com을 이용.-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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