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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80년대 후반 그는 자신의 대표작이자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 장편소설인 <비명을 찾아서>를 발표해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신춘문예나 신문연재 등을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밀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그런 관례를 거치지 않은데다 장편소설로 승부를 건 작가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이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지난 90년대 후반 조선일보가 중심이 돼 벌이던 '영어공용화 논쟁'에서였다. 그는 98년 <국제어시대의 민족어>라는 책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민족주의를 제어하는 것'이라며 '영어 공용화론'을 처음 들고 나왔다. 당시 그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찬반 논쟁이 있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대체 그 사람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 복거일 씨의 글을 간추린 <동아일보> 5월 29일자 15면 기사.

그런 그의 이름을 나는 29일 한 조간신문에서 다시 접했다. 그와 관련된 기사는 놀랍게도 친일반민족자(줄여서 '친일파')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친일파 무죄론'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이런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10여년 째 이 분야를 공부해온 나로서는 도저히 지나치기 어려웠다.

그는 6월초에 발간될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친일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라는 소논문을 실은 모양이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을 봐야 알겠지만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그 간추린 내용만으로도 그가 주장하고픈 내용의 골자는 모두 담긴 것 같다.

우선 그의 주장에 대한 반론에 앞서 그가 친일파 연구서나 독립운동사 관련서를 단 몇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지 묻고 싶다. 아마 이 글이 나가면 그가 반론을 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 때 그런 것을 좀 밝혀 줬으면 좋겠다. 이런 걸 묻는 이유는 그가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초보적인 수준의 역사 상식도 갖추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 대한 반론은 두루뭉수리한 총론식 형태보다는 <동아일보>에 실린 요약글 가운데 문제의 구절이나 문단 몇 군데를 뽑아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이 방식이 그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적시해줄뿐더러 또 나의 반론을 직설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리 언급해 두지만 복 씨의 적극적인 반론과 함께 필요하다면 '친일파 논쟁'을 둘러싼 공개토론도 정식으로 제기하는 바이다.(*파란색 굵은 글씨체의 글이 <동아일보>에 실린 복 씨의 주장이며, 그 아래는 필자의 반박내용이다)

1.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일본 정부의 법과 관행을 따라야 했다. 심지어 민족지도자 만해 한용운 선생조차 승려의 결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에게 공식문서를 냈을 정도로 일본지배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원칙적으론 그랬다. 우리는 1910년 국권을 상실하였고, 따라서 당시 우리 정부(대한제국)는 우리 국민들을 지켜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제 강점기 모든 한국인들이 일제의 법과 관행을 100% 전부를 순수히 따랐던 것은 아니다. 일제하 최대의 악법이랄 수 있는 '치안유지법'을 어겨가면서 항일무장 투쟁을 하다가 감옥을 가고 또 옥사를 하기도 했으며, 퇴학을 각오하면서도 '광주학생의거'를 이끌고 또 참여한 나이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일제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법과 관행'을 따르지 않은, 즉 모두 반체제 분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 하나로 1940년 일제가 실시한 '창씨개명'의 경우를 한번 보자. 당시 춘원 이광수 같은 친일분자는 앞서서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이를 실천하고 또 다름 사람들도 이에 동참하라고 친일신문에 글을 써댔다. 그러나 충남 대덕의 이기용과 충주의 김한규는 창씨제도를 비방한 죄로 각각 8개월, 1년씩 징역형을 받기도 했으며, 전남 곡성의 류건영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제를 반대하는 항의서를 보내고 58세로 자결하였다. 또 전북 고창의 설진영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고 하자 자녀를 창씨시킨 후 자신은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그 밖에 수도 없이 많은 민중들이 일제의 폭압통치에 맞서 항일대열에 나섰는데 복씨의 눈에는 유독 일제의 법과 관행을 따른 사람만 보였나 보다.

2. 의병활동은 거셌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07년 323회나 일본군과 충돌했지만 1910년엔 147회로 격감했다.

엄격히 말해 의병은 을미사변('명성왕후시해사건')에 항거해 궐기한 소위 '을미의병' 등 구한말에 그 활동이 왕성했었다. 그러다가 1910년 일제가 본격적으로 이 땅을 통치, 지배한 이후부터는 의병들은 독립군, 광복군 등의 새로운 조직, 형태로 바뀌어 항일투쟁에 나섰다. 즉 항일 투쟁은 일제 강점기 35년 전기간에 걸쳐 끊이지 않고 지속됐다.

이들은 1910년대, 1920년대에는 주로 간도,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대 이후부터는 중국 상해, 서안, 중경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 기지를 거점으로 8.15 해방 때까지 지속됐다. 비록 적은 인원과 조악한 장비로 풍찬노숙하는 상황이었지만 이국 땅에서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은 결코 끊이지 않았다. 그런 점은 도외시한 채 특정 한 시기에 활동했던 의병만이 마치 항일투쟁 세력인양 적시한 점은 복씨의 자학적인 역사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3. 이 기간(일제 강점기)에 적극적인 반일을 한 몇몇을 뺀다면,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통치를 도운 셈이다. 그저 일본제국의 국민이었다는 사실도 친일행위가 된다.

이 부분은 복 씨의 왜곡된 역사관이 극한을 보인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친일을 변명, 왜곡하면서 궤변으로 사용하는 수법이 바로 이런 방식이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친일의 굴레를 덮어 씌워 그 참뜻을 희석시키는 방식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일제 때 학교 다니고, 세금 내고, 심지어 숨 쉬고 살아남은 것 마저도 모두 친일파인양 둘러대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친일파들의 궁색한 자기변명에 다름아니다.

친일파, 즉 친일반민족행위자란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하여 그를 영속시키는데 동참하는 동시에 자신의 기득권 수호나 영달을 도모한 친외세.반민족분자'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즉 1909년 당시 대한제국 관료들 중 67.6%가 일제시대 식민통치 관료로 충원되었는데 이들의 경우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였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친일파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자들을 한정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이처럼 엘리트 관료에 해당하는 것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일반화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

4. 요즘 우리가 쓰는 '친일'이니 '친일행위'니라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우리가 독립이 된 다음에 나온 말이다. 현재 독립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시 그들이 쓰지 않았던 말을 쓰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차라리 '친체제 행위'나 '친체제파'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간단히 답하겠다. '친일파'라는 용어는 복 씨의 주장대로 우리가 독립된 다음, 즉 해방후부터 사용된 용어가 아니라 이미 1920대부터 사용됐던 말이다. 구체적인 예를 몇 소개하겠다. <동아일보> 창간 이듬해인 1921년 10월 16일자에는 "친일파의 거두 홍준표(洪俊杓)가 방문한 조선인 학생을 구타"라는 제목의 기사가 3면에 실려 있으며, 1924년 3월 21일자에는 "민정식(閔庭植)의 동행자인 친일파 이기만(李起萬), 상해에서 문메되야 퇴거명령"이라는 기사도 실려 있다. 하나더 예를 든다면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에서는 '칠가살(七可殺)', 즉 마땅히 죽여야할 7개 대상으로 매국노와 함께 '친일관료', 밀고자 등을 꼽았다.복씨는 대체 관련자료를 제대로 한번 찾아보기나 하고 하는 소린가?

5. 일본 식민통치 조직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재고해 봐야 한다. 당시에는 그게 합법적이었고, 그렇게 하고싶은 조선인들도 많았다. (일제)통치조직에 조선인들이 충원되었다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치와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다. 높은 자리에 올랐던 조선인들을 골라 내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식민통치 조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친일파로 몰지 않는다. 주로 고위직에 참여했던 적극적 인사를 지칭할 뿐, 즉 말단 '생계형 가담자'를 친일파로 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설사 합법적이었다고 해도 자랑거리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일제 통치조직에 조선인들이 충원된 것이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논리에 맞지 않다. 일제는 조선인 통치를 위해 오히려 조선인들을 의도적으로 채용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이 "자치와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한 대목도 사실과 다르다. 일제는 자기들의 통치 범주 내에서 조선인들을 달래기 위해 형식적인 자치를 실시하였을 뿐이며, '독립'과는 전연 거리가 있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올랐던 조선인들을 골라 내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다"고 한 대목은 당시 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명쾌히 설명해 주겠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제패망 때까지 3년여 경남 하동, 창녕에서 군수를 지낸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고등관, 즉 군수급 이상은 모두 친일파로 봐야 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 이유로 "일제말기 군수는 공출, 정신대 차출 등을 맡은 일선 행정의 최고책임자였는데, 군수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군수가 되기를 희망해 군수가 됐다면 이는 친일파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6. 조선총독부는 통치를 찬양하는 연사들이 필요하면 어느 때나 지식인을 징집했고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필요하면 (마음껏) 만들어 냈다. 그런 요구를 받고 거절한다면 별 탈 없이 살아 나갈 수 있었겠는가?

일제는 자신들의 통치정책을 조선인들에게 설명하고 또 강제하기 위해 조선인 사회에 영향력있는 명사들을 회유, 협박하여 대거 친일파로 육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역시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육당 최남선이 총독부의 알선으로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기 직전 그의 친구였던 위당 정인보는 육당의 집 앞에 거적대기를 깔고서 "내 친구 육당이 죽었다"며 곡(哭)을 하기도 했다. 즉 육당이 친일파로 변절해 고액의 강의료를 받고 일제가 세운 건국대 교수로 부임했지만 위당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육당과 춘원 이광수가 학병권유를 위해 일본까지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학병나가라고 외친 반면 조선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더러는 병이나 개인사정을 이유로 칩거로 이를 거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고당 조만식도 그런 사람이고, 시인 정지용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감시 정도 이외에는 특별히 '탈'이 있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복 씨는 역사를 왜곡치 말라.

7. 녹음이나 녹화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기록은 문헌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글을 남긴 사람들이 친일파로 많이 지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일면 사실이다. 오늘날처럼 기록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신문이나 저서 등 문헌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점은 비단 한국 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넘어갈 점은 문헌을 통한 친일의 행태가 정확하게 입증될 뿐더러, 친일의 영향력이 훨씬 더 파괴적이고 광범위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복씨의 이같은 주장은 문인 등 문필가들이 당시 그들이 썼거나 관련한 기록으로 인해 타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친일파로 지목되고 있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따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 앞에 이름내고 글쓰는 사람들은 옷깃을 여며야한다는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고 본다.

▲'창씨개명'이 본격 시행(1940.2.11)되기 이전부터 창씨개명을 결의한 춘원 이광수를 소개한 총독부 일어판 기관지 <경성일보>의 기사(1939.12.12).
8. 춘원 이광수 선생는 고뇌 끝에 이런 절망적 결론('일본에 동화되어 식민지 처리에서 벗어나 '내지'와 동일한 지위를 누리는 것 뿐')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양심수다. 모든 재판에서 동기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어째서 친일문제 '재판'에 대해선 동기가 무시되는가?

복씨는 개인적으로 춘원 이광수에 대해 그가 억울하게 친일파로 내몰리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특히 춘원이 일제의 친일강요가 극심했던 시기, 즉 조선의 독립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 일본인이 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것이 '고뇌 끝에 내린 절망적 결론'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춘원은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책임자로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총독부에 끌려가 매 한 대 맞지 않은 사람이다. 다시말하면 그는 그 때 총독부와 모종의 밀약하에 신변안전을 보장받고 귀국한 것이며, 그는 그 때 이미 친일로 변절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양심수'인가? 설사 그가 당시 민족의 살길이 일본과 동화(同化)되는 것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것이 그의 '판단미스'였다고 해도 지식인으로서 그 결과는 그 자신이 감당할 몫이라고 본다. 그는 반민특위에 끌려가서도 자신의 변명으로 일관했다. 민족대표 33인중 1인이었던 최린이 자신의 친일죄과를 사죄하며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달라"고 눈물로 참회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9.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들 가운데 우리만큼 빨리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살만한 사회를 이룬 경우는 드물다. 그 점에서 우리는 독보적이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의 귀감이다.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2차대전 종료후 승전국은 전범재판(뉴렌베르크재판, 도쿄재판)을, 피압박국은 민족반역자 처단 재판을 각 국에서 벌였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등이, 아시아지역에서는 중국, 대만, 북한, 한국 등에서 그랬다. 이 가운데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무리없이 재판을 마감했고, 그를 계기로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청산했다.

잘 알려진대로 한국은 친일파들의 방해책동으로 반민특위가 중도에 와해돼 친일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미완의 역사'의 남아있는 실정이다. '황국신민'에서 그 뜻이 유래한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해방 반세기가 넘어 지난 96년에야 비로소 '초등학교'로 바뀌었으며, 서울시 종로구 관할 동명(洞名)의 60.9%는 아직도 일본식 그대로다. 즉 한국사회는 아직도 각종 인적, 제도적 일제잔재를 제대로 털어내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우리만큼 빨리 부정적 유산을 극복한 나라가 드물다'니. 그리고 '그 점에서 우리는 독보적이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의 귀감'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프랑스는 해방후 드골의 주도로 나치협력자를 철저히 숙청, 민족정기를 다진 나라로 유명하다. 사진은 전후 50년만인 지난 94년 반인륜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투비에(사진 아래)가 재판정에 선 모습. 그는 2차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친나치 의용대의 정보총책이었다.
10. 제2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처리한 예를 들며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흔히들 주장하지만 그 나라들은 우리와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던 기간은 4년 남짓에 불과하고 지배성격도 식민지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전후 부역자들을 철저히 응징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프랑스가 전후 나치 협력자를 모범적으로 처단하고 민족정기를 세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료와 문헌기록으로 입증된 바 있다. (이 점에 대해 복 씨에게 언론인 주섭일 씨가 펴낸 <프랑스의 대숙청>(도서출판 중심, 1999년)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대체 복 씨가 뭘 근거로 '프랑스가 전후 부역자들을 철저히 응징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하나 덧붙여 프랑스와 우리가 역사적 경험, 즉 외세지배 경험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우선 기간만 봐도 프랑스가 4년 남짓하다면, 우리는 '한일병합' 이후부터만 쳐도 35년이나 된다. 그러나 이를 두고는 두 가지 견해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우선 피지배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외세협력자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러니까 그런 자가 프랑스에 비해 숫자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점은 양자를 고루 따질 문제이지만 프랑스가 처단한 나치협력자(실형을 선고받은 자만 15만여 명)에 비하면 반민특위가 취급(682건)한 건 수는 한참 모자란다는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11. 친일파니 친일행위니 하는 개념들을 정치의 영역이 아닌 역사의 영역으로 돌려야 한다. 친일파 척결을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에 어떤 상업적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그들이 정작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 친일문제는 이제 '역사의 영역'이다. 그래서 친일파 연구는 주로 역사학자(재야 역사학자 포함)들이 맡고 있다. 복씨가 '정치의 영역' 운운하고 나선 것은 정치인과 관련된 사안이 더러 발생한 것을 지칭한 모양인데 문제는 그 역시 역사적 미청산에서 비롯한 탓이 아닌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복 씨는 '친일파 척결을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에 어떤 상업적,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라고 한 대목은 친일연구자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할만한 사안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나같은 연구자도 상업적, 정치적 고려에서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고 있다는 얘긴가? 오히려 복 씨처럼 친일파 문제를 왜곡하고 덮으려는 자가 혹시 배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정치적, 상업적 고려가 있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다.

12. '조국이 해방되거든, 그 때 내 유골을 조국에 묻어 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압록강변에 묻혔다는 편강렬 선생의 위대한 행적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민족정기를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면 아직도 허술한 항일운동사 정립에 힘을 쏟아야 한다.

▲지난 80년대 초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을 계기로 국민적 성금을 모아 건립한 독립기념관 전경. 이곳에는 일제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행적과 관련자료 수 만점이 전시돼 있으며, 민족교육의 성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옳은 말이다. 아직도 민족정기가 바로 세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이유가 다른데 있다. 친일파 문제를 거론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역대 친일정권 하에서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이다. 일제시대사는 크게 일제통치.지배사, 항일독립운동사, 그리고 친일반민족사 등 세 영역으로 나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해방후 가장 활발하게 연구돼 오고 있고 연구자층도 두터운 분야가 바로 독립운동사 분야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일제시대사 연구 가운데 독립운동사 연구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일제통치사 연구 역시 절대적으로 미흡한 실정이나, 친일반민족사 연구는 1989년 친일파연구가 임종국이 타계하기 전까지는 오직 그 혼자 뿐이었고, 그의 사후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신진 연구자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정도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엉뚱한 얘길 늘어놓고 있는 복씨는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편강렬 의사 예를 들었으니 하는 말인데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독립기념관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 등을 통해 예전에 비해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그렇다면 을사오적('을사오적'도 5명의 이름을 제대로 다 대는 사람 몇 안되겠지만)에다 춘원 이광수 정도를 빼면 과연 몇 명이나 친일파들의 이름을 댈 수 있을까? 모르긴해도 5~6명을 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친일파 보다는 독립운동가 이름을 대기가 쉽고 숫자도 훨씬 많을 것이다. 기념관이 세워진 독립운동가만 해도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안창호, 신채호, 김구(금년 10월 완공예정) 등 여섯 분이며, 여기에 의병장(이강년, 신돌석 등), 독립군(김좌진, 홍범도 등), 광복군(지청천, 이범석 등) 지도자 몇 분의 이름만 보태도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다.

13. 식민통치 6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친일행위들과 그런 행위들을 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덧나는 상처'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차라리 세월에 맡겨 손을 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친일행위와 친일파 처벌이 우리사회를 개선하는 데 긴요하다는 쾌도난마와 같은 주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라는 물음조차 제기되지 않고 있어 이 글을 쓰게 됐다.

우선 여기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우리사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그룹으로 과거 친일세력이나 그 후손, 그리고 수혜자 이외에 또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친일파 청산 논의를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친일파 청산 문제를 세월에 맡겨 손을 털자니. 그러면서 한 켠에선 독립운동가를 현창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친일파 청산은 그 자체가 바로 독립운동가 현창사업인데. 아직도 치욕의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해 역사의 굴레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민족의 '아픈 상처'를 과연 그는 알기나 알고 하는 소린가?

그리고 친일파 청산 주장에 대한 '물음'(즉 반론)은 그동안 무수히도 많이 나왔다. 한 예로 금년 3.1절 에 일단의 국회의원 등이 주도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하자 김동길 씨(전 연세대 교수)는 <월간조선>4월호에서 친일파를 비호하고 친일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왜곡하는 글을 써 물의를 빚는 등 최근까지도 이같은 '물음'은 제기돼 왔다. 그런데 웬 뚱딴지? 참다못해 한마디 하겠는데 복 씨는 앞으로 이런 글 쓸 때 제발 관련자료를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끝으로 복 씨에게 한 마디 하겠다. 우선 역사적 논쟁사안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글을 쓰기 바란다. 그리고 공인자격으로 쓰는 글이라면 '역사의 정의'가 무엇인지도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복 씨의 이번 글을 통해 그가 우리사회에서 비뚤어진 역사관을 가진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즉 이름있는 문필가의 역사관이 이러할진대 민초들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에서다. 복 씨가 쓴 글의 전문이 공개되면 그 때 다시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아쉬운 대목을 거론하겠다.


아래는 복거일씨의 관련 기사 전문.

"친일논쟁보다 항일운동사 정립 힘써야"


‘이 땅에 진정한 친일파는 없다.’
소설가이자 사회 평론가인 복거일씨(54)가 ‘친일파 척결’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는 6월 초 발간될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친일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에서 “오늘날 누구 누구를 친일파로 가려내 기소하고 처벌할 법적 도덕적 근거가 없으며 이는 역사 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논문 내용을 요약했다.

친일 행위를 뚜렷하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일본 정부의 법과 관행을 따라야 했다. 심지어 민족지도자 만해 한용운 선생조차 승려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병합 조약(1910년 8월)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때인 1910년 9월, 식민통치 책임자인 데라우치 마시다케(寺內正毅) 통감에게 ‘통감 자작 사내정의 전(統監 子爵 寺內正毅 展)’이라는 공식문서(탄원서)를 냈을 정도로 일본 지배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제 여론도 일본에 호의적이었다. 병합 3년전인 1907년 ‘헤이그 국제 평화 회의’에 이준 열사 등 3인이 고종 친서를 갖고 갔었는 데도 대표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의병 활동은 거셌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1907년 323회나 일본군과 충돌했지만 1910년엔 147회로 격감했다.

일본 지배는 철저했고 혹독했으며 길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그대로 한국에 머물렀다. 식민통치는 반세기 가까이 계속됐다고 봐야 한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조선 땅은 마하트마 간디가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정체성을 없애려 했다. 문물을 강요했고 역사를 왜곡했고 말도 쓰지 못하게 했고 이름까지 바꾸라고 했다. 이 기간에 적극적 반일을 한 몇 몇을 뺀다면, (아주 엄격하게 말해서)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 통치를 도운 셈이다. 그저 일본 제국의 국민이었다는 사실도 친일 행위가 된다.

요즘 우리가 쓰는 ‘친일’이니 ‘친일 행위’니 라는 말도 그렇다. 이 말은 우리가 독립이 된 다음에 나온 말이다. 현재 독립 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당시 그들이 쓰지 않았던 말을 쓰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차라리 ‘친체제 행위’나 ‘친 체제파’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일본 식민통치 조직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재고해 봐야 한다. 당시에는 그게 합법적이었고 그렇게 하고 싶은 조선인들도 많았다. 통치 조직에 조선인들이 충원되었다는 것이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치와 독립을 위한 첫 걸음이다. 높은 자리에 올랐던 조선인들을 골라 내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다.

물론 군국주의, 천황 숭배, 역사왜곡, 조선어 말살같은 혐오스러운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통치를 찬양하는 연사들이 필요하면 어느 때나 지식인들을 징집했고 순사들이나 헌병들이 필요하면 (마음껏) 만들어 냈다. 그런 요구를 받고 거절한다면 별 탈 없이 살아 나갈 수 있었겠는가?

광복 후 지난 반 세기 우리 역사를 보자. 기업가들은 정권에 밉보이면 살아 남기 힘들었기 때문에 정치 자금이 나온 것 아닌가. 군부정권 밑에선 한번 밉보이면 누구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군부독재보다 더했다. 절대적 권력이었고 인권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국제여론이라는 것도 없었다. 사정이 이랬는데, 지금 우리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에 대해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모두 다 용감한 달걀이 되어 바위처럼 버티고 선 조선총독부 권력에 부딪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친일파에 문인들이 많은 이유

고대 생물학자들은 화석을 바탕으로 생물계를 재구성할 때 뼈 있는 생물들이 없는 생물들보다 화석들을 훨씬 많이 남긴다는 것을 고려한다. 이와 마찬가지다. 녹음이나 녹화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기록은 문헌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글을 남긴 사람들이 친일파로 많이 지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긴 일본이 1930년대 만주까지 점령하자 독립에 대한 전망은 어두워져 갔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제 조선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에 완전히 동화되어 식민지 처지에서 벗어나 ‘내지’와 동일한 지위를 누리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고뇌 끝에 이런 절망적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양심수다. 모든 재판에서 동기는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어째서 친일 문제 ‘재판’에 대해선 동기가 무시되는가?

우리가 친일파를 단죄할 법적 권위를 지녔는가

어떤 사람의 행동은 그것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을 때에만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이 있다. 선택의 문제가 없었다면 비판은 부당하다.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지금의 눈으로 친일 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당시 조선인들이 행동에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 통치가 엄중하고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는 역설적 결론을 낸다. 그런 역설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지만 혹독한 식민의 경험을 극복하고 놀랄만한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의 성취를 스스로 깎아 내린다.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들 가운데 우리만큼 빨리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살 만한 사회를 이룬 경우는 드물다. 그 점에서 우리는 독보적이고 식민지 경험을 가진 사회의 귀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처리한 예를 들며 친일파를 단죄해야 한다고 흔히들 주장하지만 그 나라들은 우리와 역사적 경험이 다르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던 기간은 4년 남짓에 불과하고 지배 성격도 식민지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전후 부역자들을 철저히 응징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친일파니 친일 행위니 하는 개념들을 정치의 영역이 아닌 역사의 영역으로 돌려야 한다. 친일파 척결을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에 어떤 상업적 정치적 고려가 있는 것은 아닌 지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그들이 정작 독립 운동가들의 업적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조국이 해방되거든, 그 때 내 유골을 조국에 묻어 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압록강변에 묻혔다는 편강렬(片康烈) 선생의 위대한 행적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민족정기를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면 아직도 허술한 항일운동사 정립에 힘을 쏟아야 한다.

식민통치 6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친일 행위들과 그런 행위들을 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덧나는 상처’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차라리 세월에 맡겨 손을 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친일 행위와 친일파 처벌이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데 긴요하다는 쾌도난마와 같은 주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그런 주장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라는 물음조차 제기되지 않고 있어 이 글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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