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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정치'의 잔칫날인 6·13 지방선거가 한 달 후로 다가왔다. 그러나 풀뿌리 잔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지방정치의 현장은 썰렁하기만 하다. 선거 기간이 월드컵과 겹친 데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각종 게이트가 방송 화면과 신문 지면을 장식하면서 지방선거는 국민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상태다. 더욱이 대통령 선거라는 결전을 앞둔 중앙정치권은 지방선거를 철저하게 대선전략의 일환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언론 또한 그런 시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방선거는 우리의 '삶의 질'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중요한 정치행사임에 분명하며, 따라서 대통령 선거와는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풀뿌리 정치'와 지방선거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어느 시골군수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후편의 제목은 '월드컵과 시골군수가 만날 때'이다. 아울러 이 글은 단행본 <남해군수, 번지점프를 하다>(새움)에 수록된 400매 분량의 글을 3분의 1로 줄여서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편집자주>


▲경남도지사에 도전하는 김두관 지방자치개혁연대 공동대표(전 남해군수). 경남에서 과연 '제2의 노풍=두풍'이 불 것인지 전국의 풀뿌리 운동가들이 주목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따뜻한 남쪽 나라.'

사람들은 인구 6만의 섬마을 경남 남해를 그렇게 부른다.

그 '따뜻한 남쪽 나라'를 지난 7년 동안 '풀뿌리혁명 율도국'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 경상남도 도지사 출마를 위해 군수직을 포기한 김두관(44) 전 남해군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두관 씨(이하 존칭 생략)는 1995년 부활한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전국 최연소 자치단체장'(당시 37세)의 기록을 세우며 당선됐다.

군수 취임 직후 전격적으로 지방일간지 주재기자실을 폐쇄시켜 행정과 언론의 결탁의 고리를 끊으면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 그는 전국에서 최초로 민원공개법정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환경부의 남해군 환경시범도시 지정을 성사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취임 초기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프로젝트 '남해그린플랜'의 성과였음은 물론이다.

자치단체장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개발'보다 '환경'을 전면에 내세우고도 1998년 선거에서 또 다시 전국 최연소 단체장으로 당선된 김두관은 최근에는 남해군을 전국 최고의 '불법묘지가 없는 마을'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군 단위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월드컵 본선 진출팀(덴마크) 훈련캠프를 유치하기도 했다.

덕분에 김두관은 지역정치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성공시대> <파워인터뷰> <100분토론> 등 중앙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 특히 <성공시대>는 김두관을 '현대판 목민관(牧民官)'의 전형적 인물로 그린 바 있다.

'현대판 목민관' 김두관.

지금부터 필자는 다산 정약용의 역저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그의 '풀뿌리 자치혁명 7년 비망록'을 기록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목민심서』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81년 전에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 많을 수도 있다. 예컨대 당시의 목민관은 임금의 임명을 받고 고을에 부임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주민들이 선거를 통해 단체장을 직접 선출한다. 또한 과거에는 목민관이 행정, 사법, 치안까지 총괄해서 관장했으나 3권이 분립된 현대사회에선 그럴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접근하면 『목민심서』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목민심서』의 행간에서 '현재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예컨대 진황육조(賑荒六條) 비자(備資) 편의 "임금의 은혜는 비록 고르지만 역시 훌륭한 목민관만이 능히 그 뜻을 이어받는다"는 대목에서 '임금의 은혜(上恩)'는 당연히 '국민의 뜻(民意)'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현재 단일한 지방자치제도 하에서도 단체장의 자세와 역할에 따라 주민들의 삶의 질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정약용의 지적은 조금도 그르지 않다.

특히 정약용이 이 책의 자서(自序)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진단에서 『목민심서』의 현재적 의미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온다.

"성현은 멀리 있고 그 말씀이 통하지 않으니 그 도가 그치고 시들어 지금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이익을 거두는 데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을 모른다. 이에 아래 백성들은 파리하고 야위고 시들어 병들고 서로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기른다는 자는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신을 살찌우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파편들로 모자이크된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일개 정치 낭인에게 철부지처럼 수억 원의 용돈(?)을 받은 것도 모자라 제 주제도 모른 채 떼돈을 벌겠다며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대통령 아들, 그들의 분탕질에 분노한 민심을 외면한 채 "법대로 처리할 테니 지켜봐 달라"는 말만 답답하게 되풀이하는 대통령, 돈 많은 사돈의 도움을 받아 공짜로 105평의 고급 빌라에 살면서도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다"고 강변해 집 없는 서민의 설움을 외면했던 야당 총재, 입으로는 민생정치를 외치면서도 몸은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는 한편 틈만 나면 색깔론과 지역감정을 조장하기에 급급한 여야 정치인, 정치인 뺨치는 정략적 술수로 여론을 제 입맛대로 조성하기에 급급하고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는 비대한 수구언론….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자서(自序)에서 "그것을 '심서(心書)'라 한 것은 어찌해서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행할 수 없기에 '심서'라 한 것이다"라고 했거니와, 그로부터 2백여 년 후 김두관은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방자치 현장에서 뛰어왔다. '젊은 시골군수'가 지난 7년 동안 온몸으로 써온 '목민실서(牧民實書)'를 소개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는 『목민심서』의 한 구절을 소개한 뒤 이를 연상케 하는 김두관의 역정과 활동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 글을 서술할 것이다.

찰리변물(察理辯物) 물막둔정(物莫遁情) 유명자위지(唯明者爲之): 이치를 살피고 물정을 분별하면 사물이 그 실상을 숨기지 못한다. 오직 밝은 자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형전육조(刑典六條) 제해(除害)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김두관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1995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가장 보수적이고 친여적인 성향의 지역에서 전국 최연소 단체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당시 여당 총재는 부산·경남이 정치적 근거지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그의 당선은 이미 10년 전부터 조직적으로 준비된 지역운동의 구체적 성과였을 뿐이다.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남해에서 제법 알아주는 씨름선수였다. 군내 씨름 2인자였던 그의 특기는 왼배지기와 잡치기. 모두들 질 것이라고 했던 선거에서 그가 '잡치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그는 부산과 수도권에서 보낸 대학과 군대와 민통련 시절을 제외하곤 남해를 떠난 적이 없다. 그나마 그는 곧바로 귀향했다. 그의 회고를 직접 들어보자.

"1986년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한 뒤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감옥 안에서 사회변혁은 지역의 뿌리가 튼튼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죠."

귀향 후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남해농민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농민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1988년 농민회 결정에 따라 '민중의 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했다. 출마의 목표는 당선을 통한 원내 진출보다는 지역운동의 기반 강화에 두었다.

결국 3천여 표를 얻고 4명 중 3위로 낙선했지만 예상대로 총선 출마는 지역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농민회를 더욱 대중적인 형태로 전환시키는 한편 그는 고향 마을인 이어리 이장(里長)을 맡았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주민들이 이해하고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르신들, 젊은 사람한테 동네 살림을 맡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불편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이장이란 게 뭡니까? 심부름하는 동네 머슴 아닙니까?"

▲진정한 정치개혁은 주민들이 참여하는 풀뿌리 정치가 활성화될 때 가능하다. 경남 남해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남해군민의 날 및 화전문화제' 장면. 김두관 전 군수가 6년 전부터 준비한 남해잔디는 덴마크 훈련캠프 유치로 빛을 봤다.
이장 일은 김두관이 현장 행정을 펼친 첫 무대였던 셈이다. 유사이래 이장 출신 단체장은 아마도 그가 최초이리라.

김두관은 2년 동안 이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청소년들에게 책을 대여해주는 문화공간 '책사랑나눔터'를 개설했다. 그는 동시에 풍물, 등산, 낚시, 바둑, 영화, 문학 등 각종 취미반도 운영했다. 여기서 배출된 사람은 1천여 명이 넘는데, 이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역운동의 주력부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1990년에는 책사랑나눔터를 통해 인연을 맺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남해사랑청년회가 발족됐으며, 1994년에는 다시 이 청년회와 한국통신 등 지역노조가 결합한 남해민주실천협의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그 중심엔 항상 김두관이 있었다.

간호상취(奸豪相聚) 호악부전(0 惡不悛) 강위격단(剛威擊斷) 이안평민(以安平民) 억기차야(抑其次也): 간교한 세도가들이 서로 모여 나쁜 짓을 저지르고 고치지 않으면 굳센 위세로 쳐 끊어서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 또한 그 차선책이다―형전육조(刑典六條) 제해(除害)

군수 출마의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던 『남해신문』을 창간한 것은 그보다 앞선 1989년의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이어리 이장과 『남해신문』 사장을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경력으로 여기고 있다는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총선 직후 농민회의 기관지를 만들 것인가, 대중적인 지역신문을 만들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끝에 지역행정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주민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지역신문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뜻 있는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 군민주 형식의 신문사를 창립했다. 지금은 많은 곳에서 지역신문을 발행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신문이 창간되자 기자와 직원들의 열정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립시다."
"아랫마을에서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대. 이것도 뉴스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현안은 빼놓지 말고 보도하자고."


『남해신문』은 지역의 기득권 세력인 공무원과 토호·유지들의 비리나 잘못도 낱낱이 파헤쳤다. 군청 공무원이 정부보조금을 횡령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해 관련자를 모두 징계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 대신에 촌지는 절대 받지 않았으며 밥 얻어먹는 것도 조심했다.

이런 『남해신문』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약용의 『다산필담』에 나오는 '질치암'을 연상케 되거니와, 그 고사는 다음과 같다.

"해남현 북쪽 30리에 돌벽이 큰 길 가에 있다. 재물을 탐낸 수령이 돌아갈 때마다 아전과 백성이 그 돌벽 위에 몸을 숨기고 굽어보며 그 죄를 낱낱이 꼽는다. 행차를 호위하는 자들은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곳에 이르게 되면 마구 달려서 그곳을 지나간다. 그 돌벽의 이름을 '질치암(疾馳巖)'이라 한다."

재물을 탐낸 수령이 자신의 죄목을 낱낱이 꼽는 '질치암'을 두려워했듯이, 남해의 기득권 세력도 '할 말을 하는' 『남해신문』을 두려워했다. 반면에 주민들은 신바람이 났다. "관공서는 못 믿어도 『남해신문』은 믿을 수 있다"는 말이 돌기까지 했다. 김두관은 『남해신문』을 통해 불의한 권력에 맞서면서 민심을 얻은 것이다.

청성사달(淸聲四達) 영문일창(令聞日彰) 역인세지지영야(亦人世之至榮也):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빛나게 되면, 또한 인생의 지극한 영광이다―율기육조(律己六條) 청심(淸心)

창간 초창기에 '젊은 사장' 김두관과 기자들은 신문을 직접 배달했다.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정보도 얻고 민심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주민들은 덩치가 큰 신문사 사장 김두관이 작업복 차림으로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직접 배달하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다.

"젊은 사람이 예의도 바르고 똑똑하단 말이야."
"기사 내용은 또 어떻고. 정말 가려운 데를 시원시원하게 긁어주잖아."
"『남해신문』이 전혀 봐주질 않으니까 군청에서도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야."


날이 갈수록 『남해신문』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와 애정은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김두관 사장이 군수에 출마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김두관이 무소속으로 출마하고도 당선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군수에 당선된 뒤에도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전국 곳곳에서 남해의 지방자치 모범사례를 배우기 위해 그를 초청하거나 남해를 방문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번에 광주광역시장에 도전하는 정동년 광주시 남구청장은 1999년 보궐선거에 당선된 후 주변에서 "김두관 남해군수처럼만 하면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청사부관(淸士赴官) 불이가루자수(不以家累自隨) 처자지위야(妻子之謂也): 청렴한 선비가 고을살이를 나갈 때에는 가루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고 하는데, 가루를 처자를 이른다―율기육조(律己六條) 제가(齊家)

『목민심서』는 목민관의 제가(齊家)를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들이 거의 예외 없이 처자와 친인척 비리 문제로 비난을 받아온 점에서 볼 때 '제가'의 현재적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약은 율기육조(律己六條) 제가(齊家)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은 세 가지 버리는 것이 있다. 첫째, 가옥을 버린다. 대개 집은 비워두면 허물어진다. 둘째, 노복을 버린다. 대개 노복들은 놀려 두면 방자하게 된다. 셋째, 자제를 버린다. 대개 자제들은 호사한 분위기에 젖으면 방탕해진다'고 하였다."

김두관이 군수가 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군청 옆에 있던 군수 관사를 헐어버린 것이다. 정약용이 제시한 '제가 3계명' 중 첫 번째 항목을 실천한 것이다.

대신에 그 자리에 그는 민원인 전용 주차장과 느티나무 쉼터를 조성했다. 특히 느티나무 쉼터는 이제 음악회, 시 낭송회 등 주민들의 문화행사가 열리는 단골 장소가 되었다. 실제로 『목민심서』 공전육조(工典六條) 선해 편에 보면 "관아의 건물을 이미 잘 수선했으면 꽃을 재배하고 나무를 심는 것도 또한 맑은 선비의 자취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군수실의 한쪽 벽도 아예 투명한 유리로 바꿨다. 그것은 주민들과 언제나 만나서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이자 투명하고 공개적인 행정을 펼쳐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런 조치들을 두고 전시행정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관선시대가 민선시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일반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상징적 계기가 됐던 것만은 분명하다.

해유귀괴(0 有鬼怪) 이고구기(吏告拘忌) 의병물구(宜 0 勿拘) 이진선동지속(以鎭煽動之俗): 관청 건물에 귀신과 요괴가 있다고 하여 아전들이 기피하도록 아뢰더라도 마땅히 모두 구애받지 말고 현혹된 습속들을 진정시켜야 한다―부임육조(赴任六條) 계행(啓行)

정약용은 목민관의 부임과 관련해 중요한 발언을 했다. 부임육조(赴任六條) 계행(啓行) 편에서 "지나가는 길에 기피하고 꺼리는 것이 있어 바른 길을 버리고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마땅히 바른 길로 감으로써 사악하고 괴이한 속설은 무너뜨려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올바른 목민관이라면 모름지기 처음부터 '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충고한 것인데,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취임 초기에 개혁의 방향을 분명히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김두관이 군수에 취임하던 날 있었던 일이다. 행사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기 직전에 한 직원이 슬그머니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이게 뭡니까?"
"기자들한테 줄 겁니다. 군수님이 나오실 때 건네주세요."


그날 그가 부하 직원의 권유를 받아 얼떨결에 기자들한테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돈봉투였다. 그 직원은 그게 관례였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사실 취임 초기 지방일간지들은 그에게 과분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농민회 활동한 고향 젊은이'라고도 했고 '전국 최연소 군수'라고도 했다. 남해군의 개혁행정에 대한 보도가 지방일간지의 지면에 흘러 넘쳤다. 군수 관사를 허물었을 때는 굵직한 활자로 '관치 허물고 민치 활짝'이라고 써주기도 했다. 얼마 후 김두관은 기자 몇 명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난번에 군정 시책을 아주 꼼꼼히 잘 보도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일하기가 아주 수월했습니다."
"군수님도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도리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새삼스럽게 뭘 그러십니까."
"…."


그때만 해도 '초보 군수'였던 김두관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군청과 언론의 '부적절한 관계'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 동안 관선 군수들은 주재기자들을 업고 살았습니다. 사실 신문기사도 공보실 직원들이 대신 써주다시피 했지요. 심지어 지방신문에서 펴내는 연감의 원고까지 직원들이 작성해줄 정도였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절과 연말에는 반드시 '인사'를 해야 했다. 안 하면 지면을 통한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지방자치단체의 주재기자실은 공무원의 무사안일과 주민의 알 권리를 거래하던 밀실이었던 겁니다. 공무원들과 주재기자들은 주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래서 비판과 폭로가 필요한 사안을 은밀한 거래를 통해 철저하게 은폐시켰던 겁니다. 나는 언론과 행정의 이런 공생관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지방자치의 핵심인 주민참여와 공무원 의식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김두관은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영영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관청 건물에 '귀신'과 '요괴'가 있어서는 안 될 일. 공무원들은 '관례'를 내세우며 기피하라고 했지만 김두관은 거기에 현혹될 수 없었다.

기무명지물(其無名之物) 출어일시지류례자(出於一時之謬例者) 극의혁파(0 宜革罷) 불가인야(不可因也): 명목도 없는 물건이 한때의 잘못된 전례로 나온 것은 마땅히 급히 혁파해야 하고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호전육조(戶典六條) 평부(平賦)

1995년 9월의 어느 날 아침.

김두관은 출근하자마자 비서실 관계자를 불렀다.

"김 비서! 문화공보실에 연락해서 예산집행 내역을 빠짐없이 정리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세요."
"하나도 빠짐 없이요?"
"특히 신문사 쪽과 관련된 예산 내역은 세부항목까지 다 정리하라고 하세요."


김두관은 문화공보실에서 보고한 예산집행 내역서를 검토하면서 지역신문과 군청의 뒤틀린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군청 시책을 기사화하는 대가로 기자들에게 지급해온 홍보사례비 액수가 연간 약 2천만원에 이르는 것은 물론이고 연간 약 6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서 일간지를 구독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목민심서』 율기육조 절용 편에는 "개인적인 씀씀이를 절약하는 것은 어느 사람이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청의 재물을 절약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공적인 재물을 사적인 재물처럼 보아서 절약해야 이것이 현명한 목민관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홍보사례비와 계독지구독료도 결국은 군민의 혈세가 아닌가.

김두관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간부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는 '폭탄선언'을 했다.

"세 가지 개혁조치를 발표하겠습니다. 첫째, 기자들에게 주던 홍보사례비는 일절 금합니다. 둘째, 매년 예산에서 계도용 신문 구입 항목을 삭제합니다."
"저…, 군수님. 이건 몇십 년 간 지속되어온 관례입니다. 없앤다면 큰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군 예산은 우리 군민의 혈세입니다. 신문 먹여 살리는 데 쓰라는 돈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 번째 조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청 내의 주재기자실을 폐쇄하겠습니다."


1995년 10월 4일 주재기자실은 전격적으로 폐쇄됐다. 음성적인 촌지 형태로 지급되던 홍보사례비와 계도용 신문 구독료도 전액 삭감시켜 버렸다.

얼마 후부터 당장 지방일간지 지면에서 남해군수 동정과 남해군 소식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에 김두관은 매일 아침 출근하면 남해군 행정을 비난한 신문기사 스크랩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했다. 6개월 동안 무려 2백건 이상의 비난성 기사가 쏟아졌다. 다시 그의 증언이다.

"주로 비방성 기사가 많았지요.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행정력을 키워주는 보약이 된다고 믿었으니까요. 난 언론과 행정이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나 지역주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의 그런 보도 태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때 이 지역의 최대 이슈였던 현대제철 유치논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방적인 보도가 대표적인 경우다.

남해군은 현대그룹이 하동에 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자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김두관이 그 선두에 섰다. 군수가 이른바 주동자가 된 것이다. 반면에 하동군과 경상남도는 현대제철 유치운동에 나섰다. 대구에 위천공단이 들어서면 경남지역 환경이 파괴된다면서 반대했던 경상남도가 이번에는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이율배반적인 주장에 대해 지적하거나 비판한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현대제철이 들어설 경우 발생되는 오염물질의 총량이 당시 광양만의 10여 개 공업단지에서 배출되는 양의 1.5배에 이른다는 환경부의 연구보고서도 지방일간지는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김두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고, 그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승리했다.

▲김두관 전 남해군수는 이미 6년 전에 기자실을 폐쇄하고 행정과 언론의 결탁의 고리를 끊었다. 그는 당시의 체험과 소회를 정리해 월간 <말> 1996년 1월호에 발표한 바 있다.
김두관이 보여준 이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교훈은 최근 언론권력과 싸우고 있는 노무현 후보와 김대중 대통령의 태도와 관련해서도 매우 시사적이다.

우선 노무현 후보는 자신을 비겁한 방식으로 줄기차게 공격해온 한 언론권력과 분명한 대립전선을 펴는 한편 이런 사실을 국민에게 공개해 버렸다. 자신이 아무리 비굴하게 굴어도 그 언론의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이 명백하므로 차라리 이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국민에게 직접 심판을 받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설사 그 신문이 노 후보를 공격한다 해도 국민들은 그 이유를 이미 잘 알게 될 것이 아닌가.

그 반면에 김대중 대통령은 언론권력과의 싸움을 정권 초기에 과감하게 벌이지 못함으로써 그 효과를 반감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애초에 국민의 지지보다는 언론과의 타협을 통해 국정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겠다는 일말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다수 국민이 탈세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방침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김 대통령의 이른바 '언론개혁'이 지리멸렬하게 끝난 것도 이런 태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 사람은 김두관의 교훈을 수용했고, 또 한 사람은 수용하지 않은 셈이다.

지아호재(知我好財) 필유지이리(必誘之以利) 일위소유(一爲所誘) 즉여지동함의(則與之同陷矣): 내가 재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면 반드시 이로움으로써 유혹하고 한번 유혹에 넘어가면 그들과 더불어 함께 빠진다―이전육조(吏典六條) 속리(束吏)

그러나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언론과의 전쟁은 공무원들의 자세를 바꾸어 놓았다. 작은 실수라도 언론이 그냥 두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감을 가지고 업무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김두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관치행정'에 길들여진 공무원들의 의식을 '자치행정'에 걸맞게 변화시켜 나갔다. 낮은 재정자립도에도 불구하고 군비를 들여 공무원들에게 해외연수를 시킨 것도 바로 그 일환이었다.

사실 그는 취임 초부터 지역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그가 군청에 출근한 첫날 6백여 명의 남해군 공무원들은 그를 '점령군'으로 대했다. 10명 전원이 여당 소속이자 지역 유지들인 군의원들도 젊은 무소속 군수가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6개월 뒤 결국 통과하긴 했지만 선거공약이었던 남해2000기획단 구성과 야심차게 추진한 행정조직 개편안이 군의회에서 제동이 걸려 부결된 것도 그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이 공무원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대다수 간부급 직원들이 고향의 대선배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는 전 직원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에게 인사 청탁을 하는 사람은 불이익을 주겠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관습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계십니까?"
"누구세요?"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김 군수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지금 애 아빠는 집에 없는데요."
"마침 우리 처남이 군청에 있어서…. 이거 애들 주시고 저 왔다 갔다고만 전해주세요."


그가 들고 온 케이크 상자 속에는 명함과 현금 한 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현금은 바로 명함에 적힌 주소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리고 그 청탁 대상자는 2년이 지나도록 승진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공무원들이 군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연줄이나 처세술이 아니라 주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인사고과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너무나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지켜지지 못했던 원칙이 천명되면서 공무원 사회에는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군수를 '점령군'으로 여기고 있던 공무원들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을 지방자치시대의 '동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 김두관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후편 '월드컵과 시골군수가 만날 때'는 이틀 후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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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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