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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귀옥 박사는 "냉전·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소를 설치하고 3∼4개 중대 규모로 위안대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라면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이 '공공연한 비밀'은 2월22일 <오마이뉴스>에 처음 보도되기까지 지난 50년 동안 남자들의 군 시절 무용담이나 술자리에서나 운위될 뿐 한번도 공론화되지 못했다.

한국군의 어두운 과거를 담은 이 공공연한 비밀은 학계에서도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구(舊)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근대사 연구가 눈을 돌리게 된 것이 냉전체제가 붕괴된 이 10여 년 사이의 일임을 감안하면,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뒤늦은 관심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더욱이 오랜 분단 상황과 군부 독재정권 하에서 군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종종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한국군의 이 부끄러운 치부를 처음 '공론의 장'으로 끌어낸 이는 여성 사회학자인 김귀옥 박사(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사회학)다. 김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과 정체성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1996년 월남인 정착촌(속초시 청호동 아바이마을 등)에 들어가 현지 조사활동을 벌이다가 한국전쟁 당시 군이 운영한 위안소와 위안부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 접했다.

이산(離散)과 폭력 같은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문제들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온 김 박사는 지난 수년간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들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오면서 그 동안 그 실체가 전혀 공개되지 않았던 북파공작원과 민간인 납치(납남)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월간 <말>지와 <민족 21> 등에 기고해 주목을 끈 바 있다.

젠더(gender) 관점의 평화 연구자로서 늘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김 박사를 만나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를 연구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았다.


▲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중인 지난 2월20일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 앞에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의 상징인 '평화의 비둘기'를 들고 1인 시위중인 김귀옥 박사.


"북파공작원들 '위안부'도 현지조달"

- 한국군이 위안대를 설치·운영한 사실을 언제 어떤 계기로 처음 알게 되었나.
"1996년 11월 속초에서 월남민 인터뷰를 하던 중에 이 문제를 처음 접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에 체포된 이 월남민은 당시 민간인인데도 인민군으로 분류되어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포로로서 미군부대를 따라다니며 취사와 빨래를 했다. 그런데 이 월남민에 따르면 당시 부대에는 이남 말씨를 쓰는 위안대 여자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는 점령지(이북)에서 끌고 온 여자들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즉 미군과 국군이 50년 10월 휴전선을 돌파할 때 이미 여자들을 끌고 갔다는 얘기였다."

- 그것은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 부대가 위안대를 운용한 얘기 아닌가.
"바로 그 얘기가 출발이 되어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1956년 육군본부가 편찬한 <후방전사>에서 발견했다. 사람들의 입 소문이나 기억의 소산이 아니라 군이 '특수위안대'라는 이름으로 위안소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확실한 근거 기록을 찾게 된 것이다."

- 관련 기록을 찾은 뒤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했는가.
"그 뒤로 군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이 기록의 진위 문제나 위안부 운용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이었는지를 물어 확인하고 예비역 장성들의 회고록에 관련 기록이 있는지를 검토했다. 또 다른 위안대의 형태는 북파공작원과 위안부 여성의 만남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북파공작원이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가운데, 원산 앞바다의 섬에서 첩보·공작활동을 하면서 북한 지역에 침투해 여성들을 납치하면 십중팔구는 강간을 하거나 여자들은 섬으로 끌고 와 위안부 역할을 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것은 HID 첩보부대의 일부에 국한된 얘기 아닌가.
"내가 만난 북파공작원들은 원산 앞 바다 섬을 몇 개 전전했는데 이런 위안부들이 그 섬마다 다 있었다고 증언했다. 원래 게릴라부대는 보급품을 현지 조달하게 돼 있지만 이들은 북한 여성까지 현지에서 (보급품으로) 조달했다는 얘기다. 나는 이런 현상이 증언자의 부대에만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도 청취했는가.
"구체적인 증언을 청취하지는 못했다. 그 중에는 1951년 당시 16살에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고 아이 둘까지 낳은 할머니(1936년생)를 수소문해 어렵게 찾았는데 '전쟁 때 아이 낳고 고생하며 산 것밖에 없다'며 더는 할 얘기가 없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 친구들과 4명이서 여맹(女盟) 회의를 하다가 한밤중에 북파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임에도 말해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엄에 발표한 김귀옥 박사의 한국군 위안부 관련 논문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2월24일자 기사.
- 군이 위안소를 설치·운영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1950년 전쟁 중에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겁탈을 당했다. 그런데 51년 여름이 되면 전선이 교착된다. 그러니까 50년에는 앞서의 유엔군 민간인 포로가 말한 것처럼, 여자들이 비정규적인 형태로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낮에는 빨래하고 밤에는 군인을 위안하는 그런 형태로 운용되었는데 51년 여름 전선이 교착되자 군 스스로 위안부 제도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필요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50년에는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납치 그리고 강제된 위안부 생활이 가능했다면, 51년에는 전선이 고착되어 후방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주기적으로 전선에서 후방으로 교체되는 장병들에게 뭔가 유인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것은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이 있는 한국군 수뇌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경험한 것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는가.
"예비역 장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전쟁 당시 군의 골간이었던 일본군·관동군 출신 장교들에 의해서 군 위안대가 창설되었다는 추정이다. 이것은 51년 당시 육군본부 휼병부(恤兵部)를 누가 주도했는지를 파악하면 훨씬 더 진전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간·납치에 의한 위안부도 있었을 것 추정"

- 군 위안부 제도의 도입을 기획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는가.
"육군본부의 공식기록인 <후방전사>에는 위안부 제도를 도입한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장군들의 증언으로 볼 때 일본군·관동군 출신으로 추정하는 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육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작전지휘권을 유엔군(미군) 사령관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위안소 설치·운영에 관한 건도 유엔군(미군) 사령관이 최종 승인했거나 적어도 묵인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 미군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진 것과 후방지역에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하는 것은 별개라고 보는데.
"왜 위안부 제도의 미군 승인 문제를 꺼내냐면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이 위안대를 운영하려고 계획을 했는데 미군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이 그렇게 증언을 했다. 월남전 때도 한국군이 사기 진작을 위해 위안부 운영을 계획했는데 미군이 동의하지 않아 운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 때도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군의 승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안부 설치·운영에 관한 보고는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한국전쟁 당시 군은 위안소를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나.
"크게 보면 육군본부에서 관할한 고정식 위안소과 이동식 위안소 그리고 비정규적인 위안부의 세 가지 형태이다. <후방전사>에 보면 육군은 서울에 3곳, 강릉에 3곳, 그리고 속초·원주·춘천 등 총 9곳에 고정식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붙박이로 두고 운영했다. 그리고 필요시에, 이를테면 전방에서 준후방지역으로 빠져나온 부대가 위안부를 요청하면 위안부 여성들을 거기로 보냈다. 일종의 이동식이다. 제3의 형태는, 일부 장군들의 기억에 따르면, 각 사단이나 연대 단위에서 사창의 여자들을 데려와 위안부로 이용하고 사단 휼병부나 연대 인사처에서 돈을 지급하는 비정규적인 임시 위안소이다. 비정규는 부대 사정에 따라 자체적으로 위안부를 이용한 것이지만 정규 위안소와 공통점은 개인(군인)이 아닌 군(부대)이 비용을 지급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정규적인 형태로 운영한 위안부가 정규적으로 운용한 위안부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가설이다."

- 한국전쟁 당시 고정식 위안소의 설치 장소는 어디이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서울에 세 군데가 있었는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충무로 4가 148번지에 소재한 위안소였다. 대한극장 앞인데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광희동이다. 물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번지수의 건물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6∼88년 무렵에 철거가 되어 지금은 기종빌딩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자리에 있었던 낡고 허름한 건물을 사람들이 '해병대아파트'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광희동 토박이 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았지만, 사람들은 왜 해병대아파트라고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 그곳이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한 '군 전용 위안소'라는 근거가 있는가.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군 전용 위안소'라는 것은 <후방전사>에도 나온다. 또 군의관이 성병 관련 정기검진을 했다. 그리고 그 성격을 공창으로 파악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후방전사>는 위안소 폐쇄 배경을 '공창이 없어지는 시대 조류에 따라서 없앤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공창이다, 또는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군)가 운영한 것을 육군이 인정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김귀옥 박사가 <민족 21>(2001년 9월호)에 쓴 '속초 세 할머니가 겪은 6·25 전쟁'에 관한 글과 사진. 이산(離散)과 폭력 등 전쟁과 분단이 야기한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 그렇다면 군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위안소를 운영했으며 위안부들은 어디에서 충원했나.
"위안소를 설치한 시점은 51년 여름으로 추정되고 폐지 시점은 54년 3월로 명시되어 있다.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충원되어 왔는지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것을 밝히는 것이 큰 숙제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일부 예비역 장군들이 기억하듯이 '종3 여자'(사창)만으로 충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속초 같은 데도 전시(戰時)에 사창이 있었는데 사창 여자들과 위안소 여자들은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해방 이후 공창이나 유곽의 여성은 약 2천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이 48년 말에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가 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중반이 되면 30여만 명으로 늘어난다. 이런 통계를 보면 당시 사창 여자들만으로 군 위안소를 충원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인원은 여염집 여자들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가난과 빈곤 때문에 흘러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강간과 납치에 의한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한 여성은 자기가 군부대에 잡혀 있을 때 그 부대에 이미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우익이 반성해야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 있다"

-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문을 이번에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심포지움'(2월22∼25일)에서 발표하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는가.
"지난 2000년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관련 학술행사의 종합토론회에서 아직까지 현대사에서 풀어내지 못한 과제의 하나로 한국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처음 얘기했다. 그래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몇몇 신문기자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 규모나 실태를 아직 조사중이어서 지금은 얘기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그해 겨울에 북파공작원에 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위안부 얘기가 약간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 연구자인 후지메 유키 교수(일본 오사카 외대)가 이 글을 보고는 제5회 동아시아 평화 인권 대회에서 이것을 주제로 글을 발표하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고민 끝에 결국 글을 발표하기로 결심을 했다."

- 한국군 위안부라는 민감한 주제의 논문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표할 경우 이 논문을 일본 우익이 악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소신이나 반론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
"물론 그에 대한 고민은 여러 번 했다. 당연히 걱정하게 되는 것은 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아직 매듭짓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우익들이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다. 그래서 사실 이 문제를 96년에 처음 접했으면서도 공론화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일본 우익도 문제지만 우리나라 우익도 그에 못지 않게 문제라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에서 드러났지만, 냉전 친일파가 그 원조인 우리나라 우익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한 일본 우익을 반성시킬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른바 국익을 앞세워 이를 미뤄둘 것이 아니라, 군이 작성한 공식문건이 있는 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역사 청산을 제대로 함으로써 일본 우익의 관점을 바꿔내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사과도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고 발표한 배경이다."

- 왜곡된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한국군 위안부 문제 진상규명을 위해 정부와 군 그리고 민간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군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데 여자들이 그 까짓쯤이야,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위안부를 동원한 것은 아니라고 발뺌하는 일본 정부의 논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군이 어두운 과거사를 밝히는 것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 당시 자료를 공개하고, 진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제2의 김학순 할머니(일본군 위안부 증언자) 같은 분이 나와서 증언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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