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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진군가'와 '반미출정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의 작곡자 윤민석(38)은 오늘도 '작곡 중'이다. 지난해 12월 그와 후배 둘이 의기투합해 만든 민중가요 보급사이트 송앤라이프닷컴(www.songnlife.com)에 올릴 신곡 작업으로 어제도 밤을 꼬박 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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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진군가'의 작곡자 윤민석. ⓒ홍성식

이번 주 토요일(23일) 사이트에 올려질 새로운 노래는 김진경의 시에 윤민석이 곡을 붙인 '전쟁과 평화'. 이미 10년 전에 쓰여진 시(詩)지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이어진 한국에서의 반미운동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다.

큰 폭력은/작은 폭력을 폭력이라 부르고/스스로를 폭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스스로를 평화라고 부른다//부시는(조지 부시는)/후세인(빈 라덴)을 폭력이라 부르고/스스로를 폭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M식스틴은/화염병을 폭력이라 부르고/스스로를 폭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스스로를 평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평화라는 이름의 전쟁이 지상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그러므로/평화라는 이름의 학살이 지상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작은 폭력이 대오를 지어/큰 폭력을 누를 때까지/전쟁과 학살은 계속된다/작은 폭력이 대오를 지어/큰 폭력을 누르는 혁명 이외에/어느 것도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 김진경 '전쟁과 평화' 전문(괄호 안은 작곡 시 고친 부분).

부시 미대통령이 방한한 지난 19일. 바뀐 시대와는 관계없이 "나는 반미주의자"라 당당하게 말하는 윤민석의 방배동 작업실을 찾아갔다. 그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인간 윤민석'과 '민중가요 작곡자 윤민석' '민중가요 보급사이트 운영자 윤민석'에 관한 이야기를 빼거나 보탬이 없이 그야말로 '솔직하게' 들려줬다.

인터뷰는 "집회나 시위에서 부르는 노래에도 저작권료가 붙는다면 당신은 빌 게이츠보다 더 부자가 됐을 것"이라는 기자의 '실없는 농담'과 "태어난 지 50일 된 딸의 분유를 고르면서도 1000원 더 싼 것을 찾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는 윤민석의 '슬픈 농담'으로 시작됐다.

2002년 벽두부터 한국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금연 열기'를 조롱하듯,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윤민석과 기자는 각각 20여 개비의 담배를 피웠다. 남 따라 가는 걸 싫어하는 건 예술가, 속된 말로 '딴따라'의 기본.

우리는 강요된 듯 한 금연 열풍이 싫었다. "죽을 때까지 민중가요를 부르는 딴따라로 살아가고 싶다"는 그의 흡연은 무죄했다. 그렇다면 기자의 흡연은?

1만 원 후원회원이 1000명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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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식
- '송앤라이프닷컴'은 왜 만들었고, 어떤 사이트인가?
"96년부터 '프로메테우스'라는 작업팀을 꾸려 운영했다. 작업팀 이름이야 그리스신화를 떠올려보면 왜 그렇게 지었는지 다들 알 테고(웃음). 가난한 가수들에게 녹음실도 대여해주고, 음반 제작 시 기술적인 측면도 지원했다. '송앤라이프닷컴'은 '프로메테우스'의 발전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체계적 정리와 인터넷 무료보급을 통해 민중가요를 활성화하고 싶었다."

- 뜻이야 좋지만, 무료로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한다는 게 만만치 않을텐데. 작업실 운영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나?
"돈만을 바랬다면 시작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운영경비와 나를 포함한 동료들-송은영, 박태승-의 최저 생계비는 해결이 되어야하는데 큰 일이다(웃음). 한 달에 1만 원을 내는 자발적 후원회원이 1000명만 된다면 계속적인 운영과 작업진행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하지만 애초 생각보다는 후원회원이 많이 가입하고 있고, 심정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아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이번 일에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의 집을 저당 잡혀 3000만 원을 대출했다. 민중가요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

- 현재 '송앤라이프닷컴'에서 진행하는 작업은?
"옛날 민중가요는 물론, 신곡도 작업이 완료되는 즉시 올리고 있다. 연주기반이 취약한 학교와 작업장 노래패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반주도 올리고 있다. 민중가요에 얽힌 추억담도 공모 중이고,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가사의 영어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웃음). 일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나중에는 민중가요 노래방도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 민중가요 활성화를 위한 선결요건은 어떤 것인가?
"폭을 넓히는 것이다. 기타 하나만으로도 가능했던 투박함의 미학과 의로운 싸움을 부추기는 정신은 계승하되,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끊임없는 실험이 필요하다. 다양화된 세상 아닌가. 경직되지 말고 유연하게 외연을 넓혀가야 한다. 최근 <기특한 과자>도 그런 의미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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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앤라이프닷컴' 홈페이지. ⓒ송앤라이프닷컴

- '송앤라이프닷컴'과 유사한 김호철의 '노동의 소리'가 있는데.
"좋아하고 신뢰하는 형이다. 그 사이트와는 언제든 열어놓고 교류를 가질 생각이다. 호철이 형 생각도 나와 마찬가지고. '노동의 소리'가 현장중심의 목소리를 담아낸다면, '송앤라이프닷컴'은 거기에 예술성과 완성도라는 옷을 입히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이런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노동의 소리'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철이 형에게 고맙다."

3번이 감옥살이...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반미주의자"

- 세상이야기 좀 하자. 최근 한총련 학생들이 미 상공회의소를 점거했는데 반미운동의 선배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반미주의자다. 광포한 80년대는 청년으로 하여금 조국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내게 조국사랑의 핵심은 통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미국이었으니, 반미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지금 한국상황에서의 반미가 일종의 유행이나 트랜드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고 지금까지 반미를 외쳐온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결과물이다. 후배들을 보며 87년에 KBS를 점거하던 일도 떠오르고(잠시 침묵)... 청년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착잡했다."

- 감옥에도 수 차례 다녀온 걸로 안다.
"87년에 KBS 점거 때문에 재판 받느라고 5개월, 89년 겨울에 종석이(임종석 전 전대협의장, 현 민주당 국회의원) 석방투쟁 때 화염병 투척으로 4개월 정도 살았다. '졸업이 임박했으므로 정상을 참작한다'며 집행유예를 주더라(웃음). 가장 오래 있었던 건 92년 세칭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다. 그 건으로 60여 명이 구속됐는데 '수괴'로 지목된 선배는 사형을 구형 받았다. 남산 안기부 조사실에서 고위간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맞기도 많이 맞았다. 서울구치소와 원주교도소 0.75평 독방에서 꼬박 3년을 살았다. 지금 생각해도 원주감옥의 추위는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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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감옥에서 숨겨 나온 작품 중 하나. ⓒ홍성식
- 한창 피 뜨거운 시절에 3년을 갇혀 있었다는 건 큰 고통이었을 텐데.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그 시절을 이겨내게 해준 건 95년 후배 김정환(공연연출가)이 주도해서 열어준 <윤민석 통일음악회>-안치환, 꽃다지, 신형원 등 출연-였다. 바깥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았고, 내 노래가 아직도 그들의 입에서 불려진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그 공연의 비디오를 교도소장과 보안과장의 입회 하에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작곡을 다시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16절 갱지를 숨겨와 오선을 그리고, 깨알같이 노래말을 썼다. 출소할 때는 전기면도기 모터를 떼어내고 꼬깃꼬깃 접은 그 종이들을 숨겨 나왔다. 나와서 보니 대략 30곡쯤 되더라."

-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당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상식이 통하고, 공동선이 서 있는 세상이다. 부연이 필요한가(웃음)?"

- 아내와 딸 이야기도 좀 해달라.
"뭐 창피하게 그런 걸... 아내는 '조국과 청춘'이라는 노래패의 가수(양윤경)였다. 결혼은 98년 10월31일에 했는데, 여러 사정 때문에 아기는 늦게 낳았다. 이제 50일쯤 됐다. 이름이 '설(雪)'인데 학교 후배이자 시인인 신동호(37)가 지어줬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사람에게 희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복사된 80년 광주항쟁 사진이 나를 바꿨다"

- 타임머신을 타고 당신의 과거로 가보자. 어릴 때부터 작곡하고, 노래하는데 소질이 있었나?
"경북 영주가 고향인데 아버지가 그 도시에서 가장 큰 학원을 경영했다. 장남을 뭐든지 잘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아버지의 교육 모토라 피아노와 기타도 배우기는 했다. 80년 전두환의 과외금지 조처로 아버지가 망하기 전까진 시골에 살면서도 소꼴 한번 베어보지 못한 부잣집 귀한 아들이었다. 공부도 곧잘 했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싶지만 가난한 친구들에게 으스대기도 했다. 영주고등학교 다닐 때는 '스핑크스'라는 그룹사운드도 했다. 최근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 보면서 그 시절을 생각했다. 기타와 보컬을 맡았는데,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인기가 최고였다. '딴따라의 피'는 그때부터 흘렀던 모양이다(웃음)."

- 84년에 대학에 입학한 걸로 안다. 엄혹했던 시절 아닌가.
"시골에서 수재로 대접받던 선민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보다 공부 못하던 아이들과 어울리기 싫어 동문회도 안 나갔고, 1학년 때부터 행정고시 준비한답시고 기숙사와 도서관만을 왕복했다. 데모하는 애들도 이해가 안 됐다. 심지어 '부모는 소 팔아 등록금 주는데 너는 이 짓거리나 하고 있냐'고 집회에 나가는 친구를 질책하기도 했으니까. 그저 나 하나 입신출세해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개인적 고민 속에서만 살았다."

- 거창한 질문 같아 어색하지만, 사회적으로 개안(開眼)한 때는 언젠가?
"재발한 '딴따라 병' 때문에 공부에 흥미를 잃고 학교 앞 음악다방에서 DJ하고, 이태원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2학년 초여름 무렵이다. 흐리게 복사돼 형체분별조차 어려웠던 광주항쟁 사진을 봤다. 창피하지만 난 그때까지도 광주항쟁이 국군이 빨갱이를 죽인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한 순간에 깨어졌고, 인간에 대한 신뢰까지 무너졌다. 집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다."

- 사진 한 장이 당신 인생을 고난으로 빠뜨린 것인가(웃음)?
"듣고 보니 그렇네(웃음). 그 이후 학교 앞에 있던 '한마당'이라는 사회과학서점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등의 금서를 구해 읽었다. 하나 둘 알게 되는 새로운 진실은 나를 '이런 식민지 조국에서 공부는 해서 무엇 하나'라는 생각으로까지 이끌었고, 실지로 3학년을 마치곤 휴학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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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에는 전국 문화부장 연석회의에 참여해..." ⓒ홍성식
- 전대협 초기 문화운동의 핵심세력이라 그러던데.
"누가 그런 말도 아닌 소리를 하고 다니나(웃음). 신동호가 그랬나? 사실 신동호의 아내(허정숙, 현 노래패 아줌마)가 가장 열심히 활동하던 문화전사였다. 다른 학교에는 다 있는 노래패가 없어서 87년에 '소리개벽-윤민석, 반미청년회의 김성기, 임종석 등이 창단 멤버-'을 만들었고, 89년에는 전국 문화부장 연석회의에 참여해 전대협에 문화국이 생기는 계기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그건 나 하나의 힘이 아니지 않는가."

-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는지.
"아무런 후회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MT 가서 기타 치는 것조차 힐난의 대상이 되던 시절을 산 딴따라의 심정이 이해가 가나(웃음)? 86년에 성신여대 앞에서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한동준(가수), 지근식(변진섭의 '새들처럼' 작곡자) 등과 친했고, 나도 대중가요를 작곡했었는데, '철의 규율로 적과 대치해야 될 상황에서 무슨 대중가요냐'라는 선배의 질책에 눈물을 머금고 만든 곡들을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내 결정이 아직도 옳았다고 믿고, 앞으로도 내 노래로 세상의 작은 부분이나마 바꾸고 싶다는 꿈은 여전하다."

민주화운동 유가족 위한 장학재단 만들 터

윤민석은 '송앤라이프닷컴'이 후일담이나 양산하는 사이트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다. '그 시절' 민중가요가 가졌던 힘과 감동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맥을 계승하여 오늘날 대중정서에 맞는 음악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후원회원들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는 민중가요를 하는 후배들이 "너 아직도 밥 안 되는 그 짓하고 있냐"는 질시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슬퍼한다. 민중가요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의 분유 값까지 걱정해야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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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식
그러나, 아직 윤민석은 슬프고도 안타까운 현실에 투항하지 않았다. 카랑카랑하고, 신념에 찬 그의 목소리는 그것을 증명한다.

"청춘의 한 시절을 모두 떼어 바쳤음에도 승리의 기억이 없는 우리 세대들. 그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냉소적이고, 망가져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내 노래로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위무해주고 싶다. 그게 '딴따라 윤민석'의 벗을 수 없는 행복한 짐이고, 의무다. 그리고, 내 노래가 돈이 될 수 있다면 자신보다 조국을 사랑했기에 먼저 이 땅을 떠난 사람들, 그들의 유가족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다. 아니 기필코 만들 것이다."

한편, 윤민석 씨는 지난달 프레젤 과자를 먹다 졸도한 부시를 풍자한 노래 '기특한 과자'를 발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쇼트트랙 판정시비를 다룬 노래 'Fucking U.S.A.'를 발표했다. 윤씨의 웹사이트 '송앤라이프'에 판정시비 하룻만에 올라온 이 노래는 '그렇게 금메달 따니까 좋으냐 더러운 나라 Fucking U.S.A'라는 구절 등을 삽입, 미국의 국수주의를 통렬히 비웃고 있다.

"fuck'n USA" - 작사·곡 윤민석/노래 박성환

덧붙이는 글 | 형님(윤민석이 이렇게 부르는 걸 허락했다), 꿈이 있는 자는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형님의 꿈을 지지하며, 나도 후원회원이 되렵니다. 1만 원으로 '아름다운 딴따라'의 꿈을 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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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