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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회사 업무로 파견되어 1년 동안 미국 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됐다. 미국에 짧은 출장을 몇 번 갔었지만 긴 기간을 체류하며 살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국에서 생활한 지난 1년을 떠올려보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미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긴 기간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나라와 문화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게도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다'라는 인지상정을 느끼게도 하였다.

살면서 발견한 미국은 짧은 출장을 다니면서 느낀 미국과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관광객'으로서 서비스업 종사자를 주로 만나는 것과, '주민'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게 되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통상 우리는 미국에 대하여 짧은 출장이나 여행을 다닌 것을 계기로 '관광객'의 입장에서 본 미국을 미국의 본 모습처럼 생각할 위험이 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1년간 내가 미국에 체류하며 발견한 '주민'의 눈에 비친 미국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1. 미국에선 계약서가 중요하다. 계약은 시작점이지 종점이 아니다.

미국과 계약을 할 때 문서를 잘못 만들어 나중에 계약상 낭패를 보는 경우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미국은 모든 일들이 두툼한 계약서를 위주로 움직인다.

지금 세상에 설마 계약을 잘 못할까 싶지만, 모두 영어를 잘해서 미국인들에게 안 속을 것 같지만, 계약서는 영어를 잘하는 것과 미국 사회와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 등 두 가지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 계약서에 대해 문제점이 있을 때, 이미 계약했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손을 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약서가 중요하지만 계약서는 시작점이지 종점이 아니다. 그렇게 꾸준히 검토하고 수정해 나가다 보면 우리도 미국인과 계약할 때 손해 안보는 Know-how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2. 속을 알 수 없다. 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잘 나타내준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유명해진 것은 2차대전을 거쳐 미국과 일본의 교역이 증대되던 시대다. 미국인들은 일본인이 속과 겉이 다르다고 한다. 실제 일본인이 표리부동한 것도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모르는 문화'에 대한 이방인들의 느낌이 아닐까 싶다. 영어를 하고 의사소통이 돼도 '완곡히 뜻을 담아서 표현'하는 것은 문화적 배경이 없으면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하다 부딪히면 함께 술 한잔 하면서 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런 모난 방식의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은 Business 사회에서 프로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버리고 상대하지 않으려고 한다.

3. 논리가 중요하다. 논리는 시스템의 산물이다.

동생이 어학연수를 할 때다. 동생은 영어 공부를 위해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어 그 책을 주제로 토론을 했었다. 그런데 미국애들은 '끈질기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시키기 위해 밤을 새며 토론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말이 안통하면 큰소리를 낸다. 물론 의견을 관철시키는 방법으로 '큰소리 내기'도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비즈니스 사회에서는 효과적이다.

우리나라는 성문법국가고 미국은 판례법국가다. 그것은 눈앞에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판례법이란 상황에 따라 자신의 논리를 잘 성립하여 배심원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논리적인 사람이 이기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논리적인 것이 분쟁을 해결하는 법적 효력을 갖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에서 논리는 아주 중요하다.

4. 노동자의 천국은 어디일까? 미국에도 잔업은 있다.

아는 사람 중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일하는 팀이 있었는데 '미국인들과 일하느라 스케줄이 많이 지연됐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내고 물으니 미국은 잔업을 안 하니까 잔업이 당연한 한국인들이 요구하는 스케줄을 맞출 수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미국에는 잔업이 없을까? 잔업비는 없지만 잔업은 있다. 무리한 스케줄이 아니라도 사용자들의 요구사항이나 상황에 따라서 개발부서는 밤 늦게 일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아무리 훌륭한 스케줄이라 해도 개발 막바지가 되면 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국인들에게 주일은 중요하므로 주말에 일을 안 한다고 하지만 Cisco를 다니던 친구는 주말마다 회사에 나가곤 했다. 바빠서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리해고를 당한 후에도 맨 마지막 근무 일까지 주말에도 나가서 근무를 했었다.

고객이 있는 회사에 '잔업이 절대로 안 되는 곳'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객만족을 위해 미국이든 일본이든 세계 어느 나라도 발벗고 뛰는 것이다.

5. Nine to Five! 미국인들은 9시에 출근할까?

맨 처음 낯선 직장에 가면 눈치 보는 것이 출근시간,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이다. 많이 들어온 Nine to Five. 미국인들은 모두 9시에 출근하는가? 그것을 열심히 살핀 결론은 '아니다'이다. 왠지 풍요롭고 여유로 울 것만 같은 미국이지만 출근시간 Rush hour를 보면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감탄이 나온다.

아파트에서 밖을 내다보면 이른 아침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자녀들과 함께 나가는 것은 일상적이다. 미국 건축회사에 근무하던 친구도 8시30분에 출근한다고 해서 '왜 9시 출근인데 일찍 가?'라고 물었더니 점심시간이 포함 안 된 근무시간이 Nine to Five라는 것이다.

만약 점심시간을 30분 갖고 싶으면 8시 30분에 출근한다. 우리 회사는 8시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한다.그 안에 1시간의 점심시간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비교적 느긋한 점심시간을 즐기는 한국인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도시락을 많이 싸가지고 다닌다.

출근하면 도시락을 냉장고에 저장하고 점심때 전자렌지에서 데워 먹는 것이 미국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회사 식당에서 30분 정도 걸려 식사하고 30분은 산책을 해서 사무실에 찌든 자신을 환기시키곤 하던 한국 회사원의 일상은 이에 비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나 할까.

6. 미국제품은 세계최고! 명품만이 팔릴까?

Wal-Mart에 가보면 모든 제품이 너무나 싸서 눈이 동그래진다. 그러나 사용하고 나서 느끼는 것은 '싼게 비지떡이다'라는 것이다. 미국은 싸게 만들어 많이 판다가 기본전략이다. 심지어 미국 월마트에서 너무나 투박한 Philips가 한국에 들어오면 세련된 디자인을 추구한다. 한국의 필립스를 보면서 '미국인들은 물건은 정말 고급스럽게 만드네. 미국 것이 좋은 것이겠지'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월마트에서 가장 싸구려 물건 또한 필립스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많은 제품은 싸게 만들어 많이 파는 것을 기본전략으로 삼는다. 차별화 전략이 철저해서 비싼 백화점에 가면 한국에서 파는 수준의 물건들이 훨씬 비싸게 팔리고 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패션 및 디자인에 민감한 편이고 소비자 시장이 크지 않으므로 예쁘고 개성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델들은 미국에서는 고급상품에 속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는 Mall에서는 그 것보다는 간소한 기능에 투박한 모델, 저렴한 가격의 제품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 것을 보면 미국은 양으로 승부하는 듯해서, 오히려 몇 십년 전의 한국 생산전략을 보는 것 같다.

우리나라 정보통신 속도나 신제품 출시 속도에 비교해서 미국은 시간이 훨씬 더 늦게 흐르는 거 같다. 아직도 영화 속의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나이트에서 춤을 추는 곳이 텍사스다. 지역이 넓기 때문에 유행이나 새로운 제품의 보급속도가 느린 편이다. 서울처럼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은 뉴욕같은 도시가 있는 반면 유사 이래로 인간의 손길이 가지 못했을 오지에 살면서도 '나는 미국인이다'라는 자부심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미국에서 최고의 제품만으로 승부를 한다면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똑같이 커피메이커를 갖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20불짜리를, 부유한 사람들은 200불 짜리를 갖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7. 미국은 인종차별은 언제 사라질까?

미국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데 시끄럽게 떠드는 백인 아이들이 있었다. 비행기 안의 사람들은 그 아이들을 모두 귀엽고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나도 저런 백인으로 태어나면 좋겠다' 라는 부러움이 생겨서 깜짝 놀랐다. 미국에 산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한국 부모들이 곤란해 할 때가 아기가 비행기를 타면 울어제끼는 것이다. 어느 피부색의 아이라도 이코노믹 좌석에다, 이착륙 시 기압의 변화로 울게 마련인데 황인종 아이가 보채는 것에 황인종 부모 자신이 '아 미국아이들은 안 그럴 텐데'라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우연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마주치는 백인들의 싸늘한 눈빛을 볼 때, 그리고 그것이 경멸이라는 것을 말이 아니라도 느낄 때 미국은 인종차별이 있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사회 내부에 은근히 스며들어 있다. 겉으로는 화합하고 있어 보이지만 서로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너무나 다른 문화를 갖고 있어 섬뜩할 정도다. 흑인의 말투, 백인의 말투, 멕시칸의 말투, 동양인의 말투가 뚜렷이 다르다.

같은 영어지만 서로 다른 자기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인종차별이란 미국 자신에게 도전한다. 언제니 진정한 다인종 국가가 아닌 다문화 국가가 될 수 있을지 의문만 남을 뿐이다.

9. 영어를 말하기? 자신을 말하기!

한국 사람들에게서 부족한 것은 말투를 모방하는 것이다. 영어단어를 많이 알고 독해도 잘하고 심지어 듣기도 잘한다고 하자. 그리고 스스로는 말도 잘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지내다 보면 알아 듣기 힘든 영어와 알아듣기 쉬운 영어가 있다. 긴 문장이 아니라'I'm busy right now'라는 짧은 문장을 말하는데도 능숙하게 말하는 사람과 능숙하지 않은 사람은 존재한다. 이유는 영어에는 강약과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연음이라고 해야 하나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문장을 만들 때 잘 이어서 말하는가에 따라 상대가 알아 듣기도 쉽고 '영어를 잘 한다'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수업을 듣다 보면 수면제 선생님이 있다. 말에 강약이 없이 그냥 줄줄줄 말을 해대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대화는 같은 한국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리듬을 주며 말하는 미국인들에게 그런 평탄한 어투는 완전히 수면제다. 사람들이 한국인들은 자신있게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곤 한다. 바로 그러한 부분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 지낸 시간들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미국이란 부유한 나라지 우월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에 온 사람들은 생각이 과거의 한국에 멈춰 있다. 그래서 한국하면 못사는 나라라든지 불친절하다, 품질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한국은 빨리 변해가는 나라다. 빨리 끓고 식는 냄비라고 스스로를 비하하지만 빨리 변화하는 나라라서 경쟁력이 많다.

미국 생활을 하다보면 무릎을 탁탁치며 이건 우리나라가 더 좋은데, 우리나라의 이 아이디어를 여기다 팔면 돈을 많이 벌 텐데라는 아쉬움들이 생긴다. 미국은 큰 생산공장이기 전에 거대한 소비시장이다. 미국을 잘 파악하고 그 소비시장에 활발히 진출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이문화를 체험한다는 것은 단지 미국을 좀더 배우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의 보편성과,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을 탐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 안에서만 살며 세상을 보았을 때를 돌아보면, 내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로 세상을 보았는가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겨우 다른 한 나라에 더 살아 봤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많이 커지게 된 거 같다. 우리 문화의 장점을 찾아내며 자부심을 갖고 세계에 대한 눈을 키운다면 우리나라는 더욱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처럼 거대한 자본을 갖지 않더라도 로마, 영국은 조그만 나라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계로 넓게 뻗어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세계 문화를 체험하고 경제의 무대를 한국을 넘어서 세상으로 뻗어 나간다면 '작지만 큰 나라' 한국이 되지 않을까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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