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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상영 금지된 정치영화 <잘 돼갑니다>
영화 제목과 달리 제작자 집안은 풍비박산


영화 <잘 돼갑니다>의 포스터.
고(故) 하길종 감독의 문제작 <바보들의 행진>(1975) 중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 하나.

대학간의 연례 친선 체육대회 날 강의실에 모인 대학생들은 "응원을 나가야겠다"며 휴강을 요구한다. 주인공 병태의 친구 영철은 '난 가겠어'라며 분연히 일어서는 데 반해 병태는 빈 강의실에 남아 괴로워한다. 영화는 이어 체육대회 장면과 운동장에 가지 못하고 강의실에 홀로 남아 고민하는 병태의 표정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21세기에 들어 이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70년대에는 체육대회 응원을 나가는 문제가 대학생들의 큰 고민거리였는가?"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장면의 미스터리는 하길종 감독이 찍어둔 대학가 시위 장면이 박정희 정권의 사전 검열 과정에서 무참히 잘려나갔다는 제작 뒷이야기와 연결지어 보면 의외로 쉽게 풀리게 된다. 유신 정권이 독재에 항거하는 시위 장면을 검열 과정에서 잘라버리자 제작진이 부랴부랴 대학가 체육대회를 찍은 필름을 찾아내 시위 장면 대신 끼워넣은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독재에 억눌린 사회 분위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영화에 대한 대우가 이런 마당에 '독재정권의 말로'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영화의 운명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독재정권의 몰락을 다룬 정치 영화 <잘 돼갑니다>(1968)가 소리 소문 없이 사장된 가운데 영화 제작자의 집안은 영화 제목과는 정반대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잘 돼갑니다>의 제작자 김상윤(1975년 타계) 씨의 미망인 홍정순(71) 씨가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찾은 것은 작년 12월26일. 홍씨는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다룬 영화 <잘 돼갑니다>를 만들어놓고도 내용이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21년간 영화가 개봉되지 못해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간암과 식도정맥류, 백납증(피부백반증), 담석증 등으로 시달리고 있는 홍 씨는 진정서를 접수한 직후 병원에 입원했다가 해를 넘긴 지난 3일에야 퇴원했다.

34년 전 만들어진 영화 포스터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홍정순 씨. 오른쪽 상단은 75년 타계한 남편 김상윤 씨.ⓒ 오마이뉴스 손병관
4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영화를 만들어 놓고도 극장에 걸지 못한 채 울화병으로 숨진 남편과 뿔뿔이 흩어진 자식들, 특히 청와대 경비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한 후 정서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로 베갯머리를 적시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라며 과거를 떠올린 홍씨의 눈망울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홍씨의 남편 김상윤(당시 아세아영화사 부사장) 씨가 영화 <잘 돼갑니다> 제작에 착수한 것은 1967년 11월. 원작은 당시 인기리에 방송됐던 동명의 라디오 연속극(동아방송)이었다. <잘 돼갑니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 조용한(김희갑 분)이 경무대(청와대의 옛 명칭) 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꾸민 라디오 연속극으로, 1961년 정초부터 3.15 부정선거, 이 대통령의 하야와 망명,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등을 다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어수선한 정국 속에도 이발사가 대통령에게 '잘 돼갑니다'와 '모릅니다'라는 두 마디 밖에 할 수 없었던 현실과 대통령을 둘러싼 '인의 장막'에 대한 묘사는 박정희 정권 시대에도 고스란히 이어진 권력집단의 행태를 조롱한 것으로 해석됐다.

숨진 남편, 정신장애 아들 생각에 눈물로 보낸 나날

실제 이 작품의 원작자 한운사 씨는 "권력에 너무 맛을 들이면 이승만 정권처럼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청취자들의 폭발적인 성원 속에 라디오 방송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TV가 위력을 떨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영화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영화의 대중 영향력은 라디오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당시 정권의 실력자들 역시 이 같은 영향력을 의식하고 있었고,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등의 유명 감독들도 작품과 관련, 검열당국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던 시절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에도 김상윤 씨는 한운사로 하여금 라디오연속극을 영화 시나리오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군 검찰관 출신으로 충무로 영화가에 뛰어든 김 씨는 <지옥문>, <사랑이란 두 글자>, <얼굴 없는 두 여인>, <명동 4번지> 등을 제작했고, 이중 <지옥문>은 아시아 영화제에서 기획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 <잘 돼갑니다>의 한 장면.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 역을 맡은 김지미(왼쪽) 씨의 젊은 시절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 씨가 정치적인 소재의 영화를 만든 배경에 대해 미망인 홍 씨는 "남편은 군 시절 특무대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김창룡 특무대장의 전횡 등 이승만 정권의 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시절 영화계에는 이화룡, 이정재 등의 정치깡패들의 입김이 막강했지만, 남편은 이들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의협심이 강한 성격이어서 역사의 시비를 가리는 영화를 만든다는 사명감에 불타 거칠 것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지미(박 마리아), 장민호(이기붕), 박노식(조병옥), 허장강(최인기 내무장관), 김희갑(이발사) 등 당대 일류배우들이 주연을 맡았고, 이화장(이승만 생가), 조병옥 생가 등 역사의 현장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흑백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닮은 배우를 찾기 위한 공개 오디션을 거쳐 1백여 명의 응모자 중 당시 72세의 최용한 옹을 캐스팅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별다른 문제 없이 시나리오가 검열에 통과했고, 정부에서 청와대를 촬영장소로 제공하고, 이기붕 가족의 자살 장면도 생가(일명 서대문 경무대, 현 4.19 도서관)에서 촬영하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영화 내용에 대한 통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7년 11월과 이듬해 8월 영화사에 보내진 문화공보부 장관 명의의 공문에는 "거리를 누비는 데모 대열, 법석대는 민주당사 앞, 대학교수 데모 단축할 것", "이강석(이승만의 양아들)이 계엄사령부에 전화하는 장면 전부 삭제할 것"이라는 지시 사항이 쓰여 있다.

1967년 11월7일 영화사에 보내진 공보부 장관 명의의 공문. "거리를 누비는 데모 대열, 법석대는 민주당사 앞 등을 단축하라"는 시정사항이 적혀 있다.


영화 제작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져 68년 3월 촬영이 마무리됐고 그해 국도극장의 추석 특선프로로 정해져 예고편까지 만들어졌다. 미망인 홍 씨는 "다른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잘 돼갑니다> 예고편이 나오면 객석이 찬물을 끼얹듯 조용했습니다. 객석의 정적은 다른 영화들에 대한 반응과는 사뭇 달랐어요. 장안에 '볼 만한 영화가 나왔다'는 입소문이 돌기도 했죠"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68년은 정초에 터진 1.21 사태와 푸에블로 사건으로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아가던 해였다. 한편,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간 것도 이 해였다. 예고편에 대한 소문이 한창일 때 정부 고관 대상의 시사회가 열렸고, 고위층들에게는 '대통령에게 아부하고 부정선거도 서슴지 않는 집권세력'에 대한 야유를 담은 이 영화가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비쳐졌을 것이라는 것이 홍 씨의 주장이다.

"고위층들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홍 씨는 "개봉 하루 전날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극장에서 남편에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서 간판을 떼어가며 '별도 통지가 있을 때까지 영화를 틀지 마라'는 지시를 했다'고 연락을 해왔죠. 이미 3천만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남편은 이만저만 낙심하지 않았죠"라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회고했다.

거듭되는 상영 허가 요청에도 주무부서인 문화공보부는 "정치적인 색채가 강해 상영은 시기 상조"라며 대신 '부분 수정'을 요구했다. 김상윤 씨는 재심을 받기 위해 8차례나 개작에 응했고, 이 과정에서 다시 1천만원을 추가로 투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보부는 71년 5월 영화진흥공사로 하여금 540만원의 융자금을 김 씨에게 주는 조건으로 필름을 압수하도록 지시해 영화 상영에 전혀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어떻게든 상영 허가를 얻어내려고 동분서주하던 김 씨로서는 울분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유신 체제를 준비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영화 상영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김 씨는 생계를 위해 다른 영화 제작에 착수했으나 누적된 빚에 대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충격에 시달린 끝에 72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반신불수의 몸이 됐다.

김 씨는 3년간의 투병 끝에 75년 9월 4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며 "이 영화는 독재정권 하의 정치인들이 꼭 보아야 할 영화다. 내가 죽더라도 이 영화는 꼭 세상에 선보여야 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그러나 가족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당시 돈 4천여 만원을 들인 영화는 극장 수입이 없으니 제작비 회수가 불가능했고, 김 씨의 투병 중 얻은 빚까지 더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유가족들은 빚쟁이들에게 쫓겨 사글세방을 수십 차례 옮겨야 했고, 이 과정에서 5남매도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재직 중에 군법무관과 결혼,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홍 씨도 남편이 죽은 뒤 파출부, 서적 외판원 등의 일을 하며 생계를 연명해야 했다. 그러나 홍 씨는 이 같은 어려움 속에도 남편의 유서 등 증빙 서류들을 꼬박꼬박 챙기고 탄원서를 만들어 청와대와 공보부를 내 집 마당처럼 드나들어야 했다.

그러던 1979년 4월23일. 유일하게 어머니곁에 남은 차남 김형국(42, 당시 대학재수생) 씨가 매번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다못해 단신으로 청와대를 찾아갔다.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는 형국 씨를 경비경찰들이 정문에서부터 제지한 것은 불문가지. '독재자 박정희'를 외치는 형국 씨에게 경찰의 곤봉세례가 이어졌고, 무차별 구타에 정신을 잃은 형국 씨가 3일만에 깨어난 곳은 서울시립 정신병원이었다.

청와대 경찰 폭행에 깨어난 곳은 정신병원

홍 씨는 "아들애가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불안해하던 차에 정신병원에서 오라고 해서 가보니 형국이가 횡설수설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의식이 깨어난 이후에도 폭행 후유증을 앓던 김 씨는 병원에 1개월 더 입원해야 했고, 82년부터 87년까지는 경기도 화성의 모 재활원에 수용되기도 했다.

김 씨는 이 같은 전력 때문에 결혼은 고사하고, 취직도 힘든 상황이다. 79년 이후 24년째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는 김 씨는 "지금은 중독이 돼서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룬다"고 토로했다.

박정희 시대는 1979년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영화가 해금되기까지는 다시 1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박정희의 철권 통치를 계승한 전두환 정권 역시 정치적 소재의 영화 개봉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홍 씨는 "민주복지국가를 만들겠다"던 전두환의 취임 공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이 죽었으니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1984년인가 청와대 민원실에 진정서를 접수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하루는 청와대에 항의하러 갔다가 돌아서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 광경을 보던 청와대 비서관이 내가 불쌍했는지 하는 말이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세상이 달라지는 법이니 이 다음에 제대로 된 민주국가가 될 때 상영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세요'라고 위로하는 거예요. 세상에나, 청와대 직원도 자기 상전이 독재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거죠."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후 영화 <잘 돼갑니다>는 20년만인 1988년 상영 허가를 얻어 89년 9월 명보극장 추석 특선 프로로 걸리게 됐다. 그러나 열흘 상영에 관람객 수는 고작 3500명. 21년이 지난 세월의 무게 탓에 관객들의 취향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때마침 방송국들이 이승만 정권 시절을 다룬 정치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방영, 흥미가 반감된 상황이었다.

열흘만에 상영이 중단되고 간판을 내린다는 소식을 들은 홍 씨는 그해 9월18일 둘째 아들이 복용하던 신경안정제를 입에 한꺼번에 털어 넣고 자살을 기도했다. 병원으로 급히 후송돼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홍 씨는 편지지 4장 분량의 유서를 통해 "독재정권에 야합한 정치인들 모두에게 영화를 보여주겠다던 남편의 유지를 받들지 못했다. 상영해줄 극장만 있다면 무료로라도 필름을 제공하겠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저조한 관객 동원에 실망, 음독 자살 기도
영화 상영을 위한 홍 씨의 '지난한 투쟁'은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다. 일본의 시사잡지 '아에라'가 1990년 6월19일자에 홍 씨의 사연을 보도하기도. ⓒ 오마이뉴스 손병관
홍 씨는 여전히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경기도 수원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월 40만원의 생활보조지원금으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차남과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영화 한 편으로 한 집안이 몰락한 상황이지만, 홍 씨는 죽은 남편과 유가족들이 영화를 상영시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정부에서 민주화 투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2000년 8월부터 민주화 관련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보상 신청이 시작되자 홍 씨도 자신과 남편, 차남의 사례를 설명한 서류를 접수시켰다.

그러나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작년 7월 홍 씨의 요청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영화 <잘 돼갑니다>의 주제 및 영화 상영을 위한 행위는 민주화 운동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상영 허가 과정에서 발병한 질병도 민주화 운동과 인과 관계가 없다"며 기각 사유를 밝혔다.

위원회는 차남에 대한 청와대 정문 폭행 건에 대해서도 "폭행 사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입증 자료가 미비되고, 폭행과 질병의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결정을 내렸다.

보상심의위원회 활동의 근거가 되는 '민주화운동보상법' 제2조 1항은 민주화 운동의 정의를 "3선개헌 발의일인 1969년 8월7일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잘 돼갑니다>의 상영 금지 조치가 민주화 보상법 적용 시기 이전에 이뤄졌고, 상영을 위한 노력과 민주화 운동의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청와대 경찰의 차남 폭행 건도 사실 증명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 씨는 "3선 개헌 이후에도 영화 상영 금지 조치가 20년 이상 이어졌고, 가족들의 고통이 계속된 상황에서 임의로 정해진 적용시기를 이유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얼토당토않는 논리"라고 주장한다. 홍 씨는 차남에 대한 경찰의 일방적인 폭행을 증명하는 서류를 가져오라는 것도 너무나 행정적인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홍 씨는 "나야 칠순이 넘어 온갖 병에 걸린 상황에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경찰에게 마구잡이로 폭행당한 후 인생이 완전히 망가진 아들이 손가락질받으며 살아갈 세상을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저 녀석이 원래 내성적인 성격인데, 폭행을 당한 후 말이 많아지고 횡설수설을 자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국 씨는 인터뷰가 끝난 후 "기사 좀 잘 써서 꼭 청와대의 높은 어르신들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고, 이 같은 호소는 기자가 기사를 준비하던 주말 동안에도 전화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어떻게 됐나요? 기사 다 쓰셨나요?"라는 형국 씨의 반복되는 질문에 고심을 거듭하던 기자는 한 마디 대답 밖에 해줄 게 없었다.

"잘 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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