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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고향친구가 아르바이트 해보라 전화주더군.

“일당 오만 원이구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야. 이벤트 행사인데 물건 설치하고 정리하기만 하면 돼.”

4박5일이니 25만 원을 벌 수 있겠다 싶어 흔쾌히 승낙하고 새벽밥 먹고 약속 장소로 갔지. 유통업에 종사한다는 친구는 네트워크 마켓팅, 흔히들 ‘다단계’라 불리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난 그 회사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위해 모집된 예비사원이 된 셈이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요즈음의 다단계회사가 모두 ‘사람 잡는’ 곳은 아니야. 개인의 자질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 짭짤한 부수입이 되기도 하고, 거기다 사기성이 다분한 사람이라면 큰 돈을 만질 수도 있거든.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 다단계의 본질은 부가 삼각형의 윗부분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지.

친구의 비극은 세상물정 모르는 건 둘째치고라도 심약하면서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놈이라는 점이야. 자신은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내 눈에는 정확히 보이거든. 참..... 황량하더라. 이렇게 착한 부류의 인간이 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에 이런 곳에 정착하는 것인지.

난 친구의 마음을 돌려볼 요량으로 결국 성남에 있는 합숙소까지 함께 갔어. 일단 가니깐 집에 못가게 하더라. 악의는 없지만 힘센 사람도 여럿 있었고. 그 사람들도 약삭빠르지 못하고 순해 빠져 보였어. 결국 직책이 골든가 뭔가하는 담당자한테 얘기해서 밤늦게 우린 합숙소에서 나왔고, 난 소주을 핑계삼아 충고와 잠언과 땀흘린 노동에 대해 말하다가 엎어졌어.

덕분에 만성장염에 시달린 속은 다시 뒤집어졌지만, 그보다는 더 이상 그 친구를 친구로 보기 힘들게 됐다는 사실에 더 고통스럽더라고. 미친놈처럼 머리는 산발해서 가방 메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참 황량하더라. 그 친구와는 상관없이 내 마음이, 내 마음만 너무 황량하더라. 마침 산성비 때문에 잘 썩지도 않는다던 가로수 낙엽이 차창너머 바람몰이에 나서서였을까.

너랑 헤어질 즈음해서 그나마 몇 안되는 인간관계를 모두 끊었거든. 공식적 내지는 비공식적으로, 혹 선언적 내지는 암묵적으로. 그리고 자신 속으로만 속으로만 또아리틀고 내면만 응시하다 걸려온 친구의 전화가 얼마나 고마웠는데. 아, 나라는 인간도 이게 한계구나. 결국 그렇게 결말은 정해져 있었던 거야. 뭐 이런 류의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안녕? 민정아. 서론이 길었지. 이해하지? 내가 복잡한 인간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을테니깐. 주말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늘까지 망가지기로 했어. 내일부터, 열두 배나 멋진 태양이 뜨는 내일부터 더 철저하게 나를 채찍질하기로 미뤘고. 그리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나 비교적 잘 지내고 있어. 살이 좀 빠졌지만 이젠 제법 밥도 잘먹고 있고.

움...예전에 내가 말했잖아, 문무를 겸비한다는 것! 내가 해보고 싶은 거라고. 읽고 싶은 책목록을 정해서 읽고 있고 유도도 다시 시작했어. 그리고 달리기도 자주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3번은 하고 있고. 책은 주로 고전을 보고 있고 그 소설에 관련된 인문학서 정도로 참고 하고 있어. 유도는 날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달리기는 나에게 고통이 뭔지 가르쳐줄 거고.

아무튼 그런 날들이 몇 달 정도 지속되고 있지만 혼자 술먹는 버릇이 생겼지 뭐니. 몸을 혹사시키면 쉬 잠 오는게 순리일텐데 이상하게 피곤한데도 잠이 안오니 더 죽겠더라. 그래서 술병을 잡기 시작한게 꽤 오래가네. 아, 모든 것을 똑똑하고 선명하게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너와 만나서 사귀고 또 다투기도 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주위를 맴돌았던 T군을 포함한 모든 게 그저 꿈인가 싶어. 마치 그런 느낌 있잖아. 내 눈은 저기 서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데 실지로는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뭔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혹은 구닥다리 시골 버스가 그래도 속도라도 내볼량으로 제법 씽씽 달리면 난 창밖으로 손을 펴서 쭉 내밀지, 그러면 뭔가가 잡힐 듯 말듯 해서 손바닥에 와 닿잖아. 공기라 하기엔 너무 부드러워. 그 뭔가...잡을 듯 하면서도 잡을 수 없는 뭔가....

오늘 아침까지도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내게 재잘거리던 네가 보낸 멜들이 지워졌더라. 뭐가 잘못됐거니 싶어 다시 클릭해도 역시 마찬가지야. 설정을 따로 해놓지 않으면 일정기간이 지나 삭제되는 거였어. 가슴 한 곳을 마녀같은 손이 할퀴는 것 같았지만 고쳐 생각해보니 더 잘된 일인 듯 싶어. 어차피 좀 더 지나면 추억도 바래질텐데, 조금 앞당긴다해도 그렇게 나쁘진 않겠지.

그래서 더 용기를 내 너와 함께 듣던 음악도 오늘 다 지웠어.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고. 우연도 도와주고 어제 토하고 나서 못먹은 소주도 ‘자식, 나 잊었어?’하길래 오늘을 ‘지우개의 날’로 정하기로 결심했지.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

우리 누가 더 힘들었고 누가 더 나빴다는 얘기 따윈 하지 말자. 옆차기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우린 가난한 연인들이었으니깐. 마음도 몸도 현금까지도. 너랑 사귀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게 뭔줄 아니? 나라는 인간도 겁쟁이에다가 떠벌이인 불량품질의 나라는 인간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 그런 거였어. 나도 누구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되돌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구나! 이젠 또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자신도 여력도 없지만 저쪽에서 또하나의 나는 음산하고 교활한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르지. 웃기지 말라고. 넌 그래도 비겁하게도 기어다닐 거라고, 짚신벌레처럼 수면 아래서 그짓을 할지도 모른다고.

오빤 민정이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식상한 말이라서 미안해. 하지만 그 말을 꼭 하고 싶어. 나같이 용기없고 심약한 남자 만나지 말고 좀더 당당하고 멋지고 민정이를 잘 아는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난 너희 연인에게 상장을 줄 거야. ‘일찍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었나니....’로 시작하는 장황한 말로 말이야.

그리고 기억나는데 네가 보낸 멜 중에 오해한 게 있어서 말이야. 나는 민정이가 100사람중의 한명일 거라고 말했는데 니가 반대로 받아들었던 것 같애. 민정이 같은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내가 말하면서, 아마 봄날은 간다 영화보고 그에 비유해서 한 말인 것 같은데. 암튼 민정인 사랑이 뭔줄, 비닐팩처럼 투명하게 싸인 세상의 감춰진 진실이 뭔 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니깐.

하지만 정말 아쉬운 게 있어. 너는 만나면 못헤어질 것 같다고 전화로 끝내자고 말했지만 그때, 정말 이별다운 이별 못해본 게 비수가 돼 가슴에 꽂히는구나. 네 마지막 눈망울 다 마셔보지 못하고, 네게서 나는 알 수 없는 향수 한번 더 킁킁대지 못한 채 헤어졌구나. 여름이면 냉장고라고 내손을 식혀주던 싸늘한 네 손 한번 잡지 못하고 헤어졌구나. 하지만 민정아! 너는 헤어지면 불지를 거라고 내게 우겨댔지만 내 방엔 하얀 김이 몽글몽글 말렸다가 곧 사라진다.

그래 이제 민정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았어. 사랑이 지나가고 난 후 남는 건 이쁘게 포장된 자의식의 그리움이지만 이젠 그만 일어서야겠어. 3x3아이즈의 삼지안운가라족처럼 내 속에 있던 네 마음을 풍선처럼 하늘로 띄어올려야겠다. 난 쓸데없는 예민한 감성 때문에 많이 괴워웠지만 운동이 날 강하게 해 줄 거야.

이것봐, 내 어깨가 이렇게 커지고 단단해졌어. 이것봐, 내 가슴이 이렇게 두꺼워졌어. 이제는 미풍에도 묻어오던 네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거야. 너와 함께 지나갈 때면 함께 웃음을 뿌리던 ‘민정숯불갈비’집 앞에서도 더 이상 널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술병은 모두 깨버리겠어! 너와 헤어지고 썼던 편지는 모두 지울 거야.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음 ‘스트레이트 스토리’봤니? 눈이 유난히도 맑아서 울먹울먹하는 것처럼 보인 노인있잖아. 그런데 왜 권총자살을 했을까? 그 영화가 유작이됐대. 그 노인이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더 이상 쓸데 없는데 신경쓰지 않을, 그런 때가 오면 햇살처럼 밝게 우리 만나자. 그곳에서 민정인 가장 환하게 웃고 있을꺼야. 네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그 고향친구’한테 문자 메시지가 왔어.

‘최고의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승환아! 네가 예전에 쓴 기사 읽어봤다. 잘썼더구나. 우리 좀 더 큰 다음에 좀 더 멋지게 만나자~’

안녕, 입을 꼭 다물 때가 왔어.
안녕, 알콜 기운도 떨어지고 있고.....
안녕, 내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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